나 말고 다의 모든 챕터: 챕터 51 - 챕터 60
331 챕터
제51화
신유리는 약간의 알레르기가 있었고 턱에 두드러기가 생겨 서준혁한테 꼭 필요한 일 외에는 외출을 하지 않겠다고 휴가를 냈다.그녀의 턱이 나았을 때쯤 송지음은 성남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래서 그녀의 휴가도 길지 못했다.신유리는 서준혁이 그녀와 함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이 가지 않자 의외라고 생각했다.송지음도 신유리랑 서준혁을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가기 전에 서준혁을 잡고 한참 동안 말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신유리한테 말했다.“유리 언니 수고하네요. 준혁이 성격을 잘 아시잖아요. 잘 부탁해요.”이 말은 겉치레로 하는 말 같았지만 실제로는 유리를 경계하는 것이었다.송지음을 보내고 신유리는 서준혁과 함께 약속한 고객을 만나러 갔다.이번에는 서준혁이 운전을 했고 신유리는 자료를 보고 있었다. 차 안은 아주 조용했다.핸드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받았다. 요즘 리연지가 그녀에게 연락을 너무 자주 했다.이연지는 입만 열면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유리야, 네 동생이 또 발작이다.”신유리는 핸드폰을 잡은 손을 꽉 쥐고 “전에 이미 이백만을 주지 않았나요?”라고 물었다.이연지는 우물쭈물하며 “유리야, 동생한테 사백만을 더 보내주면 안 되겠니? 미미가 또 재촉하는구나.”라고 말했다.신유리는 “제가 이번 달에 대체 몇 번이나 이체했는데요.”라고 말했다.이연지는 여전히 훌쩍거렸고 무슨 일인지 우물쭈물거리며 제대로 말은 하지 않고 결국 소란을 피우다가 전화를 끊었다.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서준혁은 그녀의 통화 내용을 듣고 눈을 살짝 치켜 올리며 “무슨 일이야?”라고 물었다.신유리는 리연지에 대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싫어서 입을 오므리고 말하지 않았다.서준혁도 강요하지 않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업무에 지장 주지 마.”고객은 세련된 중년 여성이다. 성남 출신이라고 하던데 후에 시한에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문선경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서준혁한테 인사를 하며 말했다.“나와 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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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네 그렇게 할게요.” 서준혁은 잠시 고민하다 흔쾌히 대답했다. 문선경은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한다. “예전에 네 어머니와 농담 삼아 사돈 맺자고 했었어.”신유리는 곁에서 그들이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문선경은 회사 얘기는 단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 말끝마다 자기와 하정숙의 관계가 얼마나 좋은지 강조한다. 서준혁이 언제 회사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고 만약 돌아가면 문선경 쪽 일 처리가 쉽지 않을 것이다.신유리는 자기 일을 생각하느라 서준혁과 문선경의 얘기가 끝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서준혁은 시더우드 향이 나는 외투를 신유리에게 벗어던졌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신유리의 주의를 끌었다. “문 대표님 모셔주고 와.”신유리는 서준혁의 외투를 받아 문선경과 함께 나가려다 문선경의 제지를 받았다. “난 괜찮아.”말을 마친 문선경은 서준혁을 보며 말한다. “요 며칠 현이는 네가 잘 케어해줘.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는 게 많을 거야.”서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네, 알겠어요.”신유리는 흠칫했다. 문선경은 주현을 아예 서준혁 곁에 있게 하려고 마음먹은 것 같다. 서준혁이 알아차렸는지가 미지수다.하지만 서준혁이 모를 리가 없었다. 송지음이 성남에 있는데 어떻게 대처하려나.서준혁은 신유리를 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차 가지고 와.”신유리는 고개를 떨구고 차를 가져오려고 몸을 돌린 찰나 주현이 말한다.“준혁 씨, 오늘 준혁 씨랑 호텔 가도 돼요?”신유리는 멈칫했다. 서준혁의 외투를 들고 황급히 주차된 곳으로 갔다.서준혁의 대답을 듣지 못한 주현은 가까이 다가가 서준혁의 소매를 잡으면서 묻는다.“혹시 불편해요?”서준혁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주현을 보고는 맘에 없는 듯 대답한다.“괜찮아요, 좋을 대로 해요.”신유리가 차를 가지고 왔을 때 서준혁과 주현은 이미 호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세워놓자 서준혁은 차 뒷문을 열고 주현에게 말한다.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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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차 안은 한순간 조용해졌다. 신유리도 서준혁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서준혁이 운전한다면 자신은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주현은 서준혁이 침묵하자 웃으면서 한발 물러선다. “당신이 운전하기 싫다면 내가 운전하죠.”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서준혁은 고개를 들어 신유리를 바라본다. 신유리는 태연하게 입을 뗀다. “혼자 갈 수 있어.”서준혁은 낮게 알았다고 대답한다. 신유리는 가방을 가지고 차에서 내린다.이렇게 맑은 날씨에 느끼는 시한의 강한 자외선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회사에서 꽤 걸어야 차를 탈수 있어 핸드폰으로 콜택시를 불렀지만 시간이 지나도 오는 택시가 하나도 없다.태양이 내리쬐는 상황에서 걸어갈 수밖에 없다.절반 정도 걸었을 때 연우진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아직도 신유리에게 친구 소개해 주는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내가 시한에 있어서 당장은 시간 내기 힘들어.”“괜찮아. 이신도 마침 시한에 있거든. 걔 귀국한지 얼마 안 됐어.” 연우진은 사소한 일도 신유리에게 전했다. “유리야, 시간 나면 이신 한번 만나봐. 걔가 이쪽 세계에서는 프로야. 팀도 있고.”연우진은 신유리의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신유리도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어 이신의 연락처를 받아 시간 되면 만나서 얘기해 보겠다고 했다.마음이 놓인 연우진은 그제야 웃었다. “ 이신과 내가 절친이지만 걔 성격이 좀 이상한 편이거든.”호텔로 돌아온 신유리는 이신의 카톡을 추가했지만 상대방은 감감무소식이다. 나중에는 신유리도 신경 쓰지 않았다.오히려 연우진의 전화로 인해 시한이 무척 민족 특색이 있는 도시이고 그중 전시회나 예술품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신유리는 잠시 호텔에서 휴식을 취한 후 근처에 있는 옛날 거리로 구경을 갔다.재미있는 공예품을 보자 연우진이 생각나 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리액션이 좋아 봐둔 공예품을 모조리 샀다.더 이상 볼거리가 없자 신유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서준혁과 주현은 아직도 밖에 있는 모양이다.밥 먹고 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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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주현과 서준혁이 가까이 앉은 탓에 주현의 향수 냄새가 서준혁의 코끝에서 맴돌았다. 주현은 무릎으로 서준혁을 터치하면서 낮게 말한다. “내가 당신 비서보다 더 괜찮을 수 있어요.”주현을 바라보는 서준혁의 눈빛에 더 이상의 흥미가 없었다. “나는 문 대표님과 일 얘기를 하러 온 것이지 그분의 따님과 자러 온 게 아닙니다.”주현은 잠시 굳었다가 서준혁의 옷소매를 잡았다. “엄마는 준혁 씨를 탓하지 않을거예요. 엄마도 준혁 씨 맘에 들어 하세요.”서준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일어선다. 신유리가 테이블에 놓고 간 약을 들어서 본다. “이러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잠시 뜸을 드리고 다시 말한다. “더군다나 집에 사람도 있어서.”서준혁을 바라보는 주현의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이내 그의 손에 들린 위약으로 눈길을 돌린다. “여비서가 사다 준거에요?”“당신과 상관없을 텐데요.”신유리는 샤워를 마치고 잠이 들었다. 시한은 날씨도 적당하고 낮에 이리저리 구경했어서 오늘 밤엔 푹 잘 수 있었다.새벽이 되자 침대 옆에 놓인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전화를 받자 서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심한 밤에 목소리가 더 낮게 깔렸다. “올라와.”신유리는 핸드폰을 쥐고 목이 잠긴 채 되물었다. “무슨 일인데?”주현이 아직 방에 있을 텐데 서준혁은 올라오라고 한다.그는 대답 대신 전화를 끊었다. 신유리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올라갔다.방문은 열려있었지만 신유리는 뜸을 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방에는 누구도 없었다.신유리가 나가려 하자 발코니 문이 열리면서 잠옷을 입은 서준혁이 보였다.그는 키도 크고 다리도 길었다. 잠옷은 무심하게 걸쳐져 있었고 허리에는 벨트가 매여져 있었다.통화할 때 신유리에게 눈길 한번 슥 주고 목소리를 낮춰 상대방과 굿나잇 인사를 했다.신유리는 옆에서 목석처럼 서있었다. 서준혁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도저히 알지 못했다.드디어 서준혁이 통화를 마쳤다. 굿나잇 인사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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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신유리는 태연하게 설명했다. “주현 씨, 이건 화인 그룹의 규정입니다.”주현은 코웃음을 치며 옆에 있는 서준혁을 바라봤다. “준혁 씨, 정말 회사 규정이에요?”서준혁은 고개를 들어 주현을 보고, 그다음 신유리를 보면서 대답했다. “오후에 주현 씨랑 함께 어제 찜해놓은 가방을 사러 가죠.”주현은 기분이 나쁜지 입을 삐죽였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에요?”서준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시선을 신유리한테 두면서 말한다. “심심하면 신유리 시켜서 같이 쇼핑해요.”고민할 틈도 없이 거절했다. “왜 신유리랑 쇼핑해요?”말속에 담긴 불쾌함이 그대로 느껴져 신유리는 몸을 굳었다. 서준혁을 바라보지만 그는 낯빛 한번 변하지 않았다. “그럼 좋으실 대로.”주현은 남고 싶었지만 서준혁의 거절의 의사가 확실해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주현이 나간 후 서준혁은 서유리를 보고 냉담하게 말했다. “자료 다 가져와.”사실 자료를 다 정리했지만 출발할 때 주현이 다른 자료를 얻는 바람에 모든 자료가 뒤엉켜 있었다. 한참을 찾은 뒤에야 원하는 자료를 꺼내 서준혁에게 건넸다. 그는 기다리다 짜증이 나 책상을 두드리며 질책했다. “업무능력이 벌써 이 정도로 떨어진 거야?”미팅에 참석하는 인원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신유리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서준혁 옆으로 착석했다.지사의 책임자인 왕부장이 마른 손을 비비며 서준혁을 난처하게 바라본다. “서 대표님, 상대방의 기세가 너무 강해서 저희 일 처리가 어렵습니다.”서준혁은 아무 감정이 없이 책상만 톡톡 두드린다. “제가 전에 요청했던 구체적인 데이터와 마케팅 사례들은 왜 아직도 전달받지 못했죠?”왕부장은 난색을 표하며 해명하려 했으나 정작 해명할 핑곗거리도 찾지 못했다.서준혁의 얼굴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화내기 일보 직전이다. 신유리는 곁에서 필요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되도록이면 서준혁과 터치를 하지 않았다.서준혁이 화를 내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긴장해서 신유리의 팔을 쳤다.서준혁은 신유리의 곁에서 자료를 보고 있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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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상대방이 말이 없자 이신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연우진 알아요?”신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거두며 말한다. “제 친군데요.”손을 내밀어 이신에게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신유리에요.”이신은 그녀와 악수를 하고 맞은켠에 앉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연우진한테서 들었는데 그쪽이 아트 디렉 일을 하고 싶다고요?”“네, 관심 있어요.” 신유리는 대담하게 말했다. “한번 시도해 보고 싶어요.”이신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어 매우 수려했다. 웨이터한테 손가락을 튕겨 펜과 종이를 달라고 했다. 종이 위에 숫자를 끄적대고 신유리에게 줬다. “요즘 괜찮은 전시회가 있는데 가봐요.”이신의 글은 생긴것 처럼 날카롭지만 더없이 깔끔했다.신유리는 종이에 쓰인 숫자를 보고 물었다. “당신 전화번호에요?”“평소 카톡을 잘 보지 않아서요.” 말을 마친 이신은 일어나서 시간을 확인하더니 담담하게 물었다. “시한에는 며칠 있어요?”“저도 잘 몰라요.”“그럼 전시회 보고 연락 줘요.” 이신은 다음 일정이 있어 일어났고 신유리도 덩달아 일어났다.일어날 때 테이블 모서리에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지려는데 그가 팔을 잡아 부축해 줬다. 그의 몸에서 깨끗하고 상쾌한 페인트 섞인 냄새가 났다. 신유리는 덕분에 똑바로 설수 있었다.멋쩍음을 감추려 태연하게 바라보지만 말투에서는 어색함이 묻어났다. “고마워요.”“이곳 가구들이 민족 특색이 있어서 발에 걸려 넘어지기 쉬워요.” 이신은 무표정으로 신유리 어깨에서 손을 뗐다.신유리가 말하려는 순간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서준혁이 걸어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 서준혁은 자료를 챙겨서 고객 미팅 하러 간다고 말했다.자기 말만 하고 끊어 신유리는 반응할 시간조차 없었다.이신이 아직 자리를 뜨지 않아 미안하게 말을 건넸다. “다음번엔 제가 사죠. 번거로운 걸음 해 줘서 고마워요.”이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오늘 신유리를 보러 온 것도 까다로운 고객을 피하려고 온 것이다.이신이 나가자 신유리도 뒤따라 나갔다.서준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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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이신은 전시회를 보는 사람이 신유리일 거라고 예상 못 했다. “아트 디렉에 이렇게 관심 있는 줄 몰랐네요.”신유리는 웃으며 말한다. “우연히 와 봤어요.”“마침 내가 책임진 전시회에 오다니.” 이신은 신유리 등귀에 걸려있는 작품을 가리키며 말한다. “오늘 오픈 1일차인데 첫 번째 관객이시네요. 이 그림 위치를 바꾸려고 폐관해요.”신유리는 이신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지만 딱히 문제가 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여기서 뭘 더 바꾸죠?”“빛이요, 다양한 빛이 작품에 주는 감정들이 다 다르거든요.”“사물에도 감정이 있어요?” 신유리는 이 말만 계속 중얼거렸다. 이신의 관점이 매우 흥미로웠지만 작업을 방해하기 싫어 나가려는데 그가 불러 세웠다.“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 난 여기만 바꾸면 되니까.”신유리는 전시회를 한 번 더 돌아봤다. 이신이 위치를 바꾼 작품을 보고 아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굉장히 미묘했다.전시회에서 나갈 때즘 이미 7시가 넘었다. 시간이 늦어 날이 어둑어둑해졌다.핸드폰을 봤지만 서준혁은 연락이 없었다. 아마 어디 갔는지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신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속눈썹을 부르르 떨고 핸드폰을 가방에 넣으면서 감정을 추슬렀다.“어디서 지내요? 데려다줄게요.” 딴 생각을 할 때 이신의 목소리가 들렸다.신유리는 이신에게 폐가 될까 봐 택시 타고 가면 된다고 말했다.“이곳은 택시 잡기 힘들어요.”이신은 기어코 신유리를 호텔까지 데려다줬다. 신유리는 밥 한번 먹자고 했지만 이신이 다음 일정이 있어 나중으로 미뤘다.차에서 내리자 주현이 다른 차에서 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물론 서준혁이 주현의 뒤를 따랐다.주현은 여기서 신유리를 마주칠지 몰랐다. “신 비서님 간도 크시지, 대표님 앞에서 땡땡이도 치고.”서준혁이 신유리의 곁을 지날 때 차갑게 스쳐보고 그대로 지나갔다.신유리는 차 옆에서 오래도록 서있었다. 이신이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미안하다고 했다.이신은 운전대를 잡고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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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입안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통증과 더불어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겼다. 신유리는 자신의 입가가 찢어진 것을 느꼈다.서준혁이 손에서 힘을 빼자 신유리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고개를 돌릴 때 몸에 걸친 잠옷이 헐렁해져 쇄골과 하얀 피부가 그대로 드러났다.서준혁은 고개를 숙여 신유리를 바라보다 비아냥거리듯 입꼬리를 올리고 아까와 같은 느긋한 말투로 물었다. “왜, 너한테 제대로 된 신분을 주지 않아서 그래?”신유리의 대답을 듣기 전에 서준혁은 손에 힘을 풀었다. 소파에 앉아 무표정으로 물어본다. “내가 언제 네가 내 여자친구라고 했어? 신유리 넌 자신을 너무 높게 보는 거 같아.”서준혁의 말은 신유리가 느낀 모든 일들이 자신만의 망상이고 그래서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업자득이라고 느껴진다.기계적인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자 서준혁은 핸드폰을 보고 전화를 받았다.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신유리는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송지음의 애교 섞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서준혁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대답했다. 신유리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 서준혁이 송지음에게 말하는 말투는 아까 냉기가 가득했던 말투와 전혀 달랐다.신유리는 그제야 알았다. 송지음이든 주현이든 서준혁은 모두 따뜻하고 젠틀하게 대할 수 있었지만 신유리만 예외였다.그녀는 멍하니 서있다가 서준혁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그를 보았다.마침 서준혁도 이쪽을 보면서 말한다. “걔 없어, 몰라.”신유리는 서준혁이 송지음과 통화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방에서 통화하는 서준혁을 방해할 수 없어 발코니 문을 열고 나갔다.시한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커 저녁의 쌀쌀함을 느낄수 있었다.갑자기 요양원 원장님의 전화가 왔다. 신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원장님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신유리 씨, 혹시 시간 되면 내일 요양원으로 와 줬으면 좋겠네요.”신유리는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외할아버지한테 무슨 일 있어요?”“이선생님이 요즘 이상해요. 담당 간호사가 이선생님이 요즘 은행에 자주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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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십분이 지나도 서준혁은 답장이 없었다.신유리는 데스크에 인사를 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가기 전에 멀리서 왕부장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는데 신유리를 보고 멈칫했다. “신 비서,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요?”왕부장은 못 챙긴 물건이 있어 다시 물건 가지러 돌아온 것이다. 신유리는 떠나기 애매했다. “대표님은 어디 계세요?”“화양에 있어요.” 왕부장은 신유리가 서준혁의 업무지시로 남아있는 줄 알았다. “다시 가봐야 해서 신 비서도 같이 갈래요?”왕부장과 마주쳤는데도 가지 않으면 보기 좋지 않아 왕부장과 함께 화양으로 떠났다.화양은 거리가 멀지 않아 20분 만에 도착했다. 왕부장은 가는 길 내내 신유리와 지사에 관련된 일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유리한테서 서준혁의 의도를 알아채려는 모양이다.“대표님이 시한에 계시니 지사의 일은 잘 처리될 거예요. 부장님이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본디 차가웠지만 무표정일 때 더 거리감이 느껴졌다. 왕부장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목적지에 도착하자 책임자가 마중 나와 공손하게 왕 부장과 말했다. “문 대표님이 도착하셔서 서 대표님께서 안에서 모시고 계십니다.”문대표는 문선경이었다. 오늘 여기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왕부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신유리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려는 듯 말한다. “사실 문 대표님과 내가 오랜 벗이에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게실 문이 열렸다. 주현은 문선경의 손을 잡고 안에서 나왔고 서준혁은 그 뒤를 따랐다.왕부장은 마른 손을 비비며 다가가 문선경에게 인사를 했다. 문선경은 한번 쓱 보고 예의상 인사를 받아줬다.신유리는 왕부장 뒤에 있어 문선경이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다.문선경은 시선을 거두고 주현을 보면서 당부한다. “내가 요 며칠 목포로 내려가는데 서 대표 번거롭게 하면 안 돼.”그리고 서준혁을 보면서 웃으면서 말한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며칠 더 신세 질게요. 재계약 건은 와서 빨리 답장하죠.”서준혁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낮게 대답한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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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서준혁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곁에 오래 있은 신유리는 서준혁의 기분이 나쁘다고 느꼈다. 기분 나쁜 이유를 몰라 대꾸를 하지 않았다.하지만 서준혁은 이런 반응을 원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냉랭하게 물었다. “신 비서, 출근시간에 플러팅 하는 게 맞는 일이야?”신유리는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뚫어지게 봤다. 그가 감추지 못한 혐오를 똑똑히 보았다.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해명했다. “마침 친구를 만난 것뿐이야.”“친구도 참 많아, 벌써 몇 명째야?”서준혁이 말한 친구와 신유리의 친구는 다른 의미였다. 신유리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자신만 욕 보이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이신까지 끌어들여 욕 보이는 건 참을 수 없었다.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신유리가 서준혁한테 싸늘하게 말한다. “왜 그렇게밖에 생각 못 해? 난 친구도 있으면 안 되는 거야?”서준혁은 얼굴을 굳히면서 싸늘하게 서유리를 바라본다.평소에도 위압감을 풍겼는데 얼굴이 어두워지자 그 기세가 더 강렬했다.신유리는 그의 시선 때문에 손이 떨리고 뭐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주현이 문서를 들고 오는 것을 발견해 가만히 있었다.“대표님, 지사에서 미팅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왜 아직 여기 계세요?”신유리는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보지만 그는 시선을 거두고 걸어갔다.주현은 문서를 챙기고 뒤따라 간다. 두 걸음 걸은 후 고개를 돌려 신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대표님 따르기 싫으면 그만 따라요.”신유리는 주현의 말속에 뼈가 있다고 느꼈지만 주현은 할 말만 하고 떠났다.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순간 피곤이 몰려왔다.방금 서준혁은 신유리와 같이 미팅하러 간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서준혁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그 사람이 당신 상사에요?” 이신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이신도 아무 이유 없이 서준혁에게 비웃음을 당한 일이 떠올랐다.“미안해요, 나 때문에 그쪽도 욕보이게 됐네요.”서준혁의 말이 지나쳐 이신이 화를 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이신은 신유리를 지그시 바라본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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