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이 아닐 리가: Chapter 21 - Chapter 30
35 Chapters
제21화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빠르게 지나간다. 한 것도 없는데 또 개강할 때가 되었다.난 엄마와 아줌마의 요구에 못 이겨 결국 유신우와 같은 날 떠나는 항공권을 샀다.공항에 도착하자 김현주가 길가에 서서 유신우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유신우는 부모님의 시선을 피해서 기쁜 얼굴로 김현주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김현주의 손을 잡은 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연애 중인 그들은 하루라도 얼굴을 못 보면 서로를 그리워했다.난 질투 때문에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지 않으려고 했고, 혼자 캐리어를 끌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공항은 아주 컸고 많은 사람들이 각자 바쁘게 움직였다. 이건 그들의 운명이었다.앞으로 우리의 삶 또한 이렇게 될 것이다.난 눈물을 머금고 속으로 묵묵히 그와 작별 인사를 했다.이번 학기는 저번 학기보다 학업량이 많았다. 나는 잡념을 없애고 공부에만 열중했다.그러다 문득 나는 내 마음이 점점 고요해짐을 발견했다.난 우리 과에서 주최한 시합에 참여했는데 성적이 아주 좋아서 과에 소문이 났다.초빙교수는 내 그림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내게 내가 이해한 행복을 꽃으로 그려보라고 했다. 잘 그린다면 내 그림을 전시회에 전시할 것이며 날 자신의 지도학생으로 받아줄 거라고 했다.그 교수님은 한국화 업계에서 지위가 아주 높았기에 그의 지도를 받는 건 모든 한국화 전공 학생이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다.난 교수가 원한 학생이었기에 다른 학생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고 동시에 작화 수준도 그만큼 높아야 했다.나는 한 달간 공을 들여 그림을 완성한 뒤 긴장되는 마음으로 교수님에게 그림을 보여줬다. 그때 교수님은 누군가와 영상으로 회의하고 있었다.내가 나가려는데 교수님이 날 향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내 그림을 영상 속 상대방에게 보여주면서 평가를 부탁했다.회의가 끝난 뒤에야 난 상대가 교수님이 지도하는 학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교수님은 온라인으로 학생들의 과제물을 봐주고 있었다.그리고 내 그림은 다시 한번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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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취미가 비슷하다 보니 유신혁과는 말이 잘 통했고, 같이 있을 때도 아주 편했다.가끔은 짬을 내 그의 SNS를 보면서 내 멘탈을 단련하기도 했다.유신우는 예전의 냉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거의 매일 같이 자신의 행복한 일상을 게시했다. 둘이 술을 마시러 갈 때도 있었고,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할 때도 있었다. 둘이 달콤하게 연애하는 모습을 보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난 유신혁이 사주는 떡갈비로 내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고 했으나 유신혁의 복귀는 차일피일 미뤄졌고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룸메이트와 떡갈비를 두 번이나 먹었다.그해 여름 방학, 유신우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나도 유신우를 방해하지 않고 홀로 다시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돌아갔다.난 그가 없는 일상에 익숙해졌고, 홀로 천천히 성장하는 법을 배웠다.밤 비행이라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여섯 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미처 아빠, 엄마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대충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잠을 보충했다.내가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점심 때였다. 엄마는 갓 만든 음식들을 식탁 위로 옮기고 있었다. 내가 깬 걸 본 엄마는 내게 밥을 먹으라고 했다.“엄마, 저 비빔면 먹고 싶어요.”“저녁에 아줌마가 밥 사준대. 비빔면은 다음에 먹자.”저녁 식사는 길모퉁이에 있는 가게에서 하기로 했다. 늦게 도착한 내가 룸 안으로 들어갔을 때 빈자리는 하나뿐이었다.“수진아, 왜 이렇게 늦었어? 다들 너만 기다렸어.”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유신우가 입을 열었다.눈을 비비면서 그의 말에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내 눈에 날카로운 칼을 찔러넣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져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못 본 사이에 유신우는 더욱 성숙해진 듯했고, 그의 눈빛에서는 다정함이 보였다.김현주는 쑥스러운 듯 웃어 보이면서 유신우의 팔에 기대어 있었고, 유신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끼어들 틈이 없을 만큼 다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눈도 아팠고 마음도 아팠다.유신우는 김현주를 부모님에게 소개했다. 나와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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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수진아, 현주가 간도 작고 낯가림도 심해. 그러니까 현주랑 잘 지내야 해. 나 실망하게 하지 마.”난 그를 실망하게 할 만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우는 확실히 날 실망하게 했다.19년을 알고 지냈으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유신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날 못된 사람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태연한 얼굴로 내게 경고까지 했다.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유신우에게 실망스러웠다.“그래.”아저씨와 아줌마는 김현주 집안일을 알고 있는 건지 아주 불쾌해 보였다. 식사가 시작된 뒤 아저씨와 아줌마는 내게 계속 음식을 집어줬고 김현주는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김현주는 안절부절못했고 유신우는 끊임없이 그녀를 달랬다.우리 엄마와 아빠는 남의 가족 일에 말을 얹지 않았다. 나는 식사가 시작된 뒤로부터는 그저 밥만 열심히 퍼먹었다.그건 가장 재미없는 식사 자리였다.배가 부를 때쯤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밖에 있는 테라스로 나가서 바람을 쐬었다.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테라스는 아주 작았고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나는 그곳에 들키지 않게 숨었다.잠시 뒤, 시끄러운 발소리가 테라스 바깥쪽에 멈췄다. 난 들키고 싶지 않아서 소리 없이 안쪽으로 몸을 움직였다.“신우야, 너 어디 아프니? 그 현주라는 애가 뭐가 그리 좋아서 거기에 목매달려는 거야? 너 대학교 졸업한 뒤에 공기업에 취업하려면 심사를 거처야 해. 걔 집안 때문에 너 떨어질 수도 있어. 걔는 집안 조건도, 능력도 수진이보다 뒤처져. 그런데 왜 굳이 걔여야 하는 거야?”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줌마와 유신우였다.난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들 가족 일을 외부인인 내가 많이 아는 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게다가 이건 대놓고 훔쳐 듣는 것과 다름없었다. 비록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들킨다면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하지만 테라스는 사방이 꽉 막혀 있었다. 내가 뛰어내리거나 그들이 떠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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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유신우의 목소리에서 분노와 깊은 괴로움이 느껴졌다.쿵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무언가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그로 인해 나는 피를 흘렸고 큰 고통을 느꼈다.무언가 끊임없이 밖으로 흘러나왔고 코가 시큰거렸다. 나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면서 고통스러워했다.난 지난 19년을 부정당했다.안타깝게도 나의 애정과 그를 그리워하면서 죽어가던 심장이,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던 지나간 내 청춘이 결국엔 나 혼자만의 일이 되었다. 정말 애석한 일이었다.나는 무척 슬펐다.유신우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같이 자란 정이 있지, 어떻게 저렇게 날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내 모든 걸 내어주면서 그를 좋아했던 걸 봐서라도 저렇게 심한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나는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유신우가 또 무슨 말로 내 마음을 죽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자기 뜻을 확실하게 전했다. 나와 그는 어차피 이번 생에는 부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유신우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게 그를 도와주는 것은 별거 아니었다.내가 한 걸음 물러난다면 두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었다.한 걸음 물러남으로써 감당해야 할 고통은 나 혼자 견디면 되었다.김현주는 마침내 눈물을 터뜨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애처롭게 울었다.유신우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한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부드럽게 달랬다. 그건 내가 지난 19년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자의 차이였다.아줌마는 화가 나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줌마가 쫓아가려 하자 난 테라스에서 나와 아줌마의 팔을 잡았다.내가 테라스에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들 곧바로 내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음을 깨달았다.아줌마의 안색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아줌마의 눈에서 보이는 미안함은 마치 바다처럼 날 익사시킬 듯했다.유신우는 고개를 돌려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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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난 웃는 얼굴로 아줌마의 어깨에 기대면서 예전처럼 그녀에게 애교를 부렸다.“아줌마, 앞으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제 남자 친구가 안다면 싫어할 거예요.”그날 밤 난 침대에 누워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이를 악문 채로 견뎌야 했다.새벽쯤 유신우가 나한테 카톡을 보냈다.“진짜 남자 친구 생긴 거야? 누군데?”난 눈이 시큰거릴 때까지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누구든 어차피 그가 아닌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난 답장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무음 상태로 설정해 놓은 뒤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았다.내게 남자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내 남자 친구가 누구인지, 그건 내 일이지 그와는 상관없었다. 내가 그에게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난 다크써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채로 고등학교 동창들과 등산하러 갔다.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난 유신우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집이 너무 가까운 탓에 우연히 마주치는 것마저 너무 일상이라 그를 만나지 않으려면 외출해야 했다. 그래서 등산하려고 한 것이다.나는 운동 신경이 좋아서 등산이나 수영 같은 걸 무척 좋아했다.유신우가 나와 선을 긋고 난 뒤 난 갑자기 변했다. 나는 격렬한 스포츠를 더는 좋아하지 않았고, 사람이 많은 것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혼자 조용히 있기만을 원했다. 나는 다른 이들과 같이 등산하는 것보다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거나 멍때리는 걸 좋아했다. 사람들을 피하고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다.내가 외출할 때쯤 유신우는 문을 연 채로 김현주와 함께 신발을 신고 있었다.“신우야, 올케.”또 마주치다니 정말 재수가 없었다. 나는 간단히 인사만 건넬 생각이었다.“어, 잘됐네. 같이 가자. 내가 택시 불렀어.”난 당황했다.“너희도 가려고?”“왜? 너 혼자 가게?”유신우는 날 곁눈질로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짙은 장난기가 보였다.난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등산하는 데까지 따라오다니, 나 혼자 조용히 내버려두면 어디 덧나는 걸까?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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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전부 사실이었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쓴웃음만 지었다.“유신우, 애들한테 네 여자 친구 소개해 줘.”김현주는 유신우의 품에 기댄 채로 쑥스럽게 웃었다. 사랑을 잔뜩 받은 모습이었다.“어머, 언제 여자 친구를 또 사귀었대?”장겨울은 직설적인 성격이라 내 눈짓을 무시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유신우의 사이가 어떤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사람들 앞에서 유신우에게 큰 수모를 당한 일도 다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동안 유신우를 욕했었다.장겨울은 날 무척이나 아꼈다. 아마도 내 편을 들어줄 생각이었을 것이다.난 못 말린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다니, 장겨울 때문에 나 또한 난처해졌다.“김현주도 솔로고 나도 솔로인데 사귀는 게 뭐가 문제가 돼?”유신우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너희 둘... 읍...”장겨울과 가장 가까이 있던 이세영은 내가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는지 긴 팔로 장겨울의 입을 틀어막고 그녀를 한쪽으로 끌고 갔다.“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야? 소개는 무슨, 얼른 등산하자.”등산은 강한 체력이 있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그들처럼 어릴 때부터 공부만 한 애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산허리까지 왔는데 다들 힘들어했다. 그들은 나무 그늘에 숨어서 휴식했다.그들은 할 말 있는 얼굴로 날 에워쌌다. 그러나 혹시라도 내가 상처를 받을까 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오늘 그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신우 때문에 또 엄청 상처를 받았을 테니 말이다.“나 딱 한 번만 말할게. 앞으로 아무도 묻지 마. 어렸을 때 부모님들끼리 애들 결혼시키자고 한 건 그냥 장난이었을 뿐이고 유신우는 날 그저 여동생으로 여겼어. 나 혼자 착각한 거야. 유신우와는 아무 상관 없어. 유신우가 좋아하는 여자는 김현주야. 이미 부모님께도 소개했고. 앞으로 둘이 결혼할 거야.”“그러면 수진이 너는? 네가 유신우를 좋아한 건 가짜가 아니잖아.”난 쓴웃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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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이세영은 내 곁에서 작게 투덜거렸다. 그녀는 유신우가 양심도 없고 보는 눈도 없는 놈이라 앞으로 분명 후회할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현주가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김현주가 내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아주 얄미운 타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처럼 바보 같은 애는 절대 김현주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거라고 했다.난 이세영이 씩씩대면서 말하는 걸 지켜보았다. 이세영이 분풀이를 끝낸 뒤 나는 그녀에게 유신우는 내게 이미 지나간 과거니 다시는 그의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했다.이세영은 이를 악물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그 모습은 내 결혼으로 걱정이 가득한 엄마처럼 보이기도 했다.난 날 생각하는 이세영의 마음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난 이미 유신우를 멀리하려고 마음먹었으니 그런 얘기를 해봤자 소용없었다.그를 좋아하는 건 내 일이고 그와는 상관없었다.그리고 김현주를 좋아하는 건 유신우의 일이니 나와는 상관없었다.각자 자기 일을 책임지면 그만이었다.이세영은 날 안타까워했다. 남자들은 순진한 척하는 여우 같은 여자들만 좋아해서, 나처럼 착한 여자는 틀림없이 지게 돼 있다고 했다.난 이세영과 말싸움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녀의 말을 들어주면서 그녀가 목을 축일 수 있게 생수를 건넸다.장겨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들이 있는 쪽 벼랑에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복숭아가 가득 달려 있으니 얼른 보러 오라고 했다.복숭아나무는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벼랑에 자란 복숭아나무는 드물었기에 나와 이세영은 서둘러 그걸 보러 갔다.우리가 도착했을 때 애들은 난간에 엎드려서 재잘대고 있었다. 그들은 복숭아나무가 이 척박한 바위틈에서 어떻게 양분을 얻었는지, 어떻게 이렇게 과일이 주렁주렁 달릴 수 있는지 얘기하고 있었다.동쪽 양지바른 언덕에는 확실히 아주 커다란 복숭아나무가 비스듬하게 자라나고 있었다.크고 작은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려있어 그 무게 때문에 나뭇가지는 심하게 휘어져 있었다. 복숭아들은 이미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난 이세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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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등산한 것뿐인데 이렇게 죽을 위기를 겪다니, 내 인생은 참 험했다.장겨울 등은 위에서 초조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난 귓가가 윙윙거려서 잘 듣지 못했다. 난 모든 신경을 줄기에 집중했다. 부디 그 줄기가 충분히 질기기를, 절대 나와 같이 추락하지 않기를 바랐다.너무 무서웠다. 이렇게 죽는다면 엄마, 아빠가 충격을 받고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혀서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몰랐다.이곳은 관광지라서 근처에 구급대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곧 도착했다.내가 두 남자에게 구해졌을 때, 유신우는 김현주의 손을 잡고 나에게로 달려왔다.“수진아,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괜찮아? 다치진 않았어?”어이가 없었다. 벼랑에서 떨어졌는데 어떻게 다치지 않을 수가 있을까?나는 등산을 위해 편한 티셔츠에 짧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밖으로 드러나 팔과 두 다리에 모두 상처가 남았다. 온몸에서 피가 흘러서 나조차도 섬뜩할 정도였다.상처는 무척 아렸고 완전히 두려움에 빠진 난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김현주는 나와 그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서 날 향해 뻗어진 그의 팔을 잡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신우야, 걱정하지 마. 수진이는 분명 괜찮을 거야.”이제 막 죽을 뻔한 위험에서 벗어난 나는 여전히 큰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너무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난 그들이 내 앞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는 모습을 보기가 싫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친구들은 내가 덜덜 떨자 안색이 달라져서는 이것저것 물었다.구급대원들이 날 산 아래로 옮겼을 때 구급차는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친구들은 나와 함께 차에 구급차에 타서 병원으로 향했다.하산하고부터 구급차에 오를 때까지 유신우는 김현주를 지키면서 우리 뒤를 따라왔다.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 내 친구들뿐이었다.그 순간 내 마음은 완전히 차게 식었다.유신우가 날 좋아하지 않는 것도, 날 여동생으로 여기는 것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함께 한 19년의 세월이 있는데, 내가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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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유신우는 내가 다친 걸 알면서도 단 한 번도 날 보러 오지 않았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난 언젠가 내가 눈을 떴을 때, 유신우가 조용히 내 침대 옆에 앉아서 사과를 깎아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때 따뜻한 햇빛이 그의 위로 드리워지면 난 그를 신처럼 여겼을 것이다.입원한 셋째 날 점심, 낮잠을 자고 깨어났을 때 문밖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유신우와 김현주였는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그들의 대화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유신우가 병문안하러 왔는데 김현주가 그걸 동의하지 않아서 싸우는 듯했다.내일이면 퇴원하니 날 보러 올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그가 날 보러온 것 때문에 김현주가 괜한 생각을 한다면, 그래서 내게 성가신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안 오는 편이 훨씬 나았다.내 마음은 그가 오기를 바랐지만 내 이성은 그걸 바라지 않았다.난 그 소리를 듣고 있다가 또 잠이 들었다.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야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이번 일로 난 매우 놀랐다. 의사는 내게 계속 수면제를 투여했고 그로 인해 난 아주 오래 잠을 잤다.병실은 예전과 다름없었고 유신우는 결국 날 보러 오지 않았다.엄마가 내게 왜 표정이 좋지 않냐고 물었을 때, 난 웃으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다.저녁때쯤, 병실 안으로 들어온 자줏빛 노을이 내 얼굴 위로 드리워져 눈이 조금 시렸다.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팔이 곧 축축해졌다.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난 겨우 19살 소녀였다. 난 아직 내 마음을 감쪽같이 숨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엄마는 내가 운 걸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가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난 묵묵히 생각했다. 내게 실망하지 말라고,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분명 좋아질 거라고.퇴원할 때 두 집안 사람들 모두 병실에 있었다.아줌마와 아저씨는 짐 정리를 도와줬고 우리 엄마는 옷 입는 걸 도와줬으면 아빠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신발 끈을 묶어 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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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난 엄마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벌떡 일어났다. 나는 흥분에 겨워 집 안에서 몇 바퀴 달렸다.십여 일 넘게 누워있었더니 더 움직이지 않으면 다리가 퇴화할 것 같았다.재밌게 놀고 있는데 유신우에게서 연락이 왔다.나는 냉정을 되찾고 미간을 찌푸린 채 받을지 말지 고민했다.유신우가 내 생사에 크게 관심이 없는 걸 확인한 뒤로 나는 그에게 더 실망했다.내가 다쳤던 날, 나한테는 냉담했으면서 김현주는 살뜰히 챙기는 걸 보니 아주 괴로웠다.내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 날 여동생으로 여긴다고 했으니 오빠가 여동생을 챙기듯 날 조금만 걱정해 주어도 좋았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김현주는 그의 여자 친구였고 난 그저 이웃집 여동생이었다. 여자 친구에게 잘해주는 건 너무 당연했다. 내가 슬퍼하는 것도 결국은 일종의 질투였다.난 며칠간 집에서 쉬었고 유신우는 몇 번이나 음식을 가져왔다. 아줌마가 몸보신하라고 만들어준 음식들이었다. 엄마는 그걸 다 받았지만 난 거의 먹지 않았다.유신우는 몇 번이나 내 방으로 들어와 날 보려고 했지만 엄마는 내가 자고 있다면서 그를 말렸다.유신우는 엄마에게 들어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한 번만 보겠다고 했다. 어렸을 때 같이 잔 적도 있고 정말 나를 여동생처럼 아낀다고 말하면서 말이다.우리 엄마는 시선조차 들지 않고 말했다. 둘 다 어릴 때라 철이 없어서 괜찮았지만 이젠 둘 다 컸고, 그에게는 여자 친구도 있으니 그러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말이다.난 집으로 돌아온 날 엄마에게 얘기했다. 유신우가 날 보러 병원에 온 것 때문에 김현주가 불쾌해했고, 유신우가 내 방에 들어와 날 본 걸 김현주가 안다면 둘 사이에 또 갈등이 생길 거라고 말이다. 난 나 때문에 둘 사이가 틀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사실 난 그저 그들을 멀리하고 싶었다.그 사건이 있은 뒤로 엄마와 아줌마의 사이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몇 번이고 유신우를 향한 마음을 접으라고 내게 암시했다. 엄마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네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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