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서희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청량하고 우아한 목소리에서 이 나이대 여성들 특유의 진중함이 묻어났다.송재이는 3년간 설도영을 가르치면서 매주 설씨 일가로 찾아가 진실된 오서희의 모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듣기 좋게 얘기해서 오서희는 보이는 것처럼 다정한 사람이 아니다.송재이는 살짝 긴장한 듯 입을 열었다.“네, 사모님. 무슨 일이세요?”오서희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재벌가 사모님들은 다들 사교 능력이 뛰어난 법이다. 일단 송재이에게 근황을 물으며 다정한 척을 했고 이에 송재이는 황송한 마음으로 일일이 회답했다.오서희는 돌연 화제를 바꾸고 본론에 들어갔다.“송 선생님 혹시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으세요? 저랑 우리 그이 결혼 30주년이거든요...”오서희가 초대를 보내오다니.마지막으로 오서희를 만났을 때 그녀는 사직 의사를 밝혔다.오서희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담담하게 머리를 끄덕일 뿐 딱히 그녀를 만류하진 않았다.송재이가 떠나려 할 때 그녀가 불쑥 등 뒤에서 이 한마디를 내던졌다.“그래도 제 분수는 아네요. 제 것이 아닌 물건은 노리지 말아요!”송재이는 몇 초간 넋 놓고 있다가 머리를 홱 돌렸다.오서희는 이미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방금 그런 말을 한 사람이라곤 전혀 상상이 안 갔다.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는 표정 변화에 송재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송 선생님? 시간 되시죠?”오서희가 직접 전화까지 한 이상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건 제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 무례한 행위이다.송재이는 귀한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입술을 꼭 깨물었다.“네, 꼭 갈게요.”...시간이 빨리 흘러 어느새 토요일이 되었다.송재이는 설씨 일가로 가기 전에 우선 백화점에 들렀다.지난번에는 설영준을 도와 선물을 고르러 갔지만 이번에는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다.누군가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러 가는 자리인데 빈손으로 갈 순 없지.송재이는 문득 설영준이 선물 사러 갈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50대 여자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1층 거실은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한창이었다.설씨 일가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거의 다 재벌 가문이었다.송재이는 오서희에게 끌려 이곳에 오니 좀처럼 어울리지 못했다.선물을 주고 목걸이도 설영준에게 돌려준 후 핑계를 둘러대고 떠나려던 참인데 이때 마침 설도영이 가까운 곳에서 달려오더니 그녀를 보며 활짝 웃었다.“오셨어요, 재이 쌤!”아이는 자연스럽게 송재이를 잡아당기며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쌤, 그날 내가 다툰 일 엄마한테 안 일렀죠?”송재이가 힐긋 째려보자 설도영은 가슴 찔리듯 겸연쩍게 웃었다.“쌤은 의리가 넘쳐서 절대 안...”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위층에서 주현아가 우아한 기품을 뽐내며 걸어 내려왔다.50대로 보이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내려왔는데 아마 그녀의 아빠일 듯싶었다.주현아는 송재이를 마주 보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송 선생님.”주현아가 거실 한가운데 놓인 피아노를 가리키며 말했다.“방금 2층에서 들었는데 영준 씨 어머님, 아버님께 직접 한 곡 연주해주시겠다고요? 제가 뭘 놓친 건 아니죠?”오서희가 눈썹을 들썩거렸다.“아니야, 마침 잘 왔어. 송 선생님은 평소에 흔히 연주하지 않아. 오늘처럼 특별한 날이니까 한 곡 연주하는 거야. 선생님, 꼭 해주실 거죠?”오서희는 홀가분하게 말을 내뱉었지만 정작 송재이를 거절하지 못하게 궁지로 몰아넣었다. 만약 여기서 거절하면 그녀만 오서희의 체면을 짓밟는 셈이 된다.송재이는 줄곧 한쪽 옆에 서 있었다.아까 문밖에서 누군가가 운을 뗄 때부터 기분이 불쾌했고 오서희가 그녀 대신 이 상황을 무마할 줄 알았는데 아예 잘못짚었다. 그녀의 생각을 완전히 빗나간 격이다!오서희와 주현아가 서로 맞장구를 치는 걸 보니 진작 이러려고 계획한 듯싶었다!송재이는 옆을 힐긋 바라봤다.설영준은 손에 찻잔을 들고 아무렇지 않게 옆 사람들과 담소를 나눴다. 마치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또 어쩌면 그는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을 수 있다.송
송재이는 주위 사람들을 쭉 훑어보다가 결국 주현아에게 시선이 멈췄다.그녀는 입가에 번진 미소를 미처 수습하지 못했다.어쩌면 오늘은 주현아가 오서희에게 뭐라고 꼬드겨서 오서희가 친히 송재이를 초대한 듯싶다. 뭇사람들 앞에서 따끔하게 혼낼 예정이지!송재이가 연주를 거절하면 오서희도 절대 그녀를 놓아줄 리가 없다.문예슬과 설도영이 송재이를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자마자 오서희의 싸늘한 눈빛에 식겁하여 뒤로 물러섰다.문예슬은 난감한 표정으로 송재이를 쳐다봤고 설도영도 입 모양으로 그녀에게 못 도와주겠다며 말하고 있었다.송재이는 시선을 거두고 오서희와 팽팽한 신경전을 펼쳤다.분위기가 살얼음판에 도달했고 송재이는 더는 설영준이 나서서 도와주길 바라지도 않았다.하지만 기대가 없음에도 상처받은 심장은 너덜너덜해져서 한없이 가라앉았다.“송 선생님만 연주하면 뭐가 재밌겠어요?”이때 문득 감미로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려 보니 인파들 속에서 박윤찬이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그는 송재이의 옆에 서서 큰 키로 그녀의 시선을 거의 다 가렸다. 송재이는 앞이 안 보여 어떤 남자가 지금 미간을 구기고 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박윤찬은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인 후 오서희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실례가 안 된다면 저랑 재이 씨가 함께 연주해도 될까요?”흥을 돋우려면 한 사람보단 당연히 둘이 더 떠들썩한 법이다.오서희는 입을 벌렸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박윤찬이 이미 몸을 돌려 송재이를 향해 눈썹을 들썩거리며 눈빛으로 그녀의 뜻을 물었다.그가 지금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걸 송재이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오늘 만약 오서희의 체면을 짓밟았다면 송재이는 앞으로 더는 경주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나름 좋은 방법이다.그녀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뭇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박윤찬과 나란히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피아노
송재이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기회를 봐가며 그에게 목걸이를 돌려준 후 자리를 떠나려 했다.이때 설영준이 전화를 받았는데 업무상의 내용인 듯싶었다.그는 차분하게 통화를 마치고 컵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맞은편에 있는 설동훈에게 말했다.“저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요.”말을 마친 후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송재이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따라갔다.잠시 후 설영준이 손을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송재이는 복도에 서서 머리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그녀도 인기척 소리에 고개 들어 설영준을 쳐다봤다.설영준의 눈빛은 한없이 차분했다. 둘은 눈을 마주쳤지만 그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곧게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송재이가 황급히 쫓아갔다.“영준 씨, 나 줄 거 있어.”설영준은 지금 새 여친이 생겨서 송재이에게 시큰둥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그녀는 매정하게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설영준이 단번에 허락했다.“발코니로 따라와.”“뭐?”송재이가 넋 놓고 있자 설영준이 고개 돌려 거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줄 거 있다면서!”말을 마친 후 복도 끝의 발코니로 걸어갔다.송재이는 눈을 깜빡이다가 얼른 그를 따라갔다.밤바람이 조금은 차갑게 몸에 스며들었다.가을이 되니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했다.송재이는 얇게 입었던지라 무심코 제 몸을 감싸 안았다.설영준은 난간 앞에 서서 몸을 돌리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왠지 모르게 그의 눈빛에는 항상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어떠한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한편 송재이는 이런 걸 고민할 여지 없이 가방에서 목걸이를 꺼내 그에게 돌려줬다.“전에 택배로 보내준 거 돌려줄게.”“왜? 마음에 안 들어?”설영준은 힐긋 쳐다볼 뿐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돌려받을 기미가 없었다.송재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너무 비싸. 이런 걸 받을 이유가 없어...”“왜 없어?”그의 물음에 송재이는 가슴이 움찔거렸다. 곧이어 설영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너랑 3년이나
“송 선생님이 선물을 대신 전해주라고 해서요.”설영준이 불쑥 말을 꺼내며 방금 송재이가 건넨 보석함을 오서희에게 전했다.“자, 받으세요.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대요 송 선생님이.”오서희와 송재이 모두 흠칫 놀랐다.오서희는 방금 다른 손님들과 얘기를 나눌 때 일부러 흘리듯 투덜댔었다.송재이처럼 하찮은 집안의 여자들은 역시 룰을 잘 모른다고, 빈손으로 초대에 응하는 게 무슨 경우냐고 잔뜩 불만을 토로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경우지?진짜 가난해서 아무것도 살 능력이 안 돼 공짜로 한 끼 얻어먹으려고 온 줄 알았더니 인제 와서 선물을 덥석 건넬 줄이야!설영준이 산 목걸이로 지금 송재이에게 체면을 한껏 살려주고 있다.그녀는 괴롭고 난처할 따름이었다.설영준이 대체 왜 이렇게 나오는 걸까? 그녀는 이 남자를 힐긋 쳐다봤다.방금 사모님이 그토록 난감하게 굴 땐 선뜻 나서지도 않더니 지금 왜 도와주고 있지?변덕스러운 이 남자의 마음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송재이는 별수 없이 일단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었다.재벌가 사모님들은 발코니 입구에 서서 오서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보석함을 여는 걸 지켜보았다.눈썰미가 좋은 누군가는 이 목걸이가 가격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그리고 또 더 눈치 빠른 누군가가 거침없이 쏘아붙였다.“어머? 이상하네. 이 목걸이는 오늘 영준이가 선물한 것과 똑같잖아요. 그 세트랑 정말 똑같아요!”송재이는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방금 말을 꺼낸 사람은 평소에 오서희와 친하게 지내는 서보경 사모님이다.다들 함께 어울려서 화투도 종종 치곤 한다.겉보기엔 친한 것 같아도 실은 암묵적으로 서로 헐뜯으며 복잡한 질투의 심리가 얽혀 있다.서보경은 금세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더 오버하며 외쳤다.“어머나, 세상에. 내가 뭐랬어요! 이거 완전 똑같은 거잖아요!”그녀는 웃으며 송재이와 설영준을 번갈아 보았다.“우리 영준이랑 도영의 피아노 선생님 안목이 이렇게나 똑같을 줄이야. 무슨 목걸이도 똑
설영준이 음침한 눈빛으로 얼굴을 들었다.송재이는 이미 인파를 가르고 자리를 떠났다.설씨 일가의 대문을 나선 후에야 눈물을 쓱 닦았다.방금 머리가 백지장이 되어 그런 말을 내뱉었다.조금 충동적이긴 하지만 단언컨대 그녀의 진심이다.너무 급하게 뛰쳐나오느라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그제야 외투를 놓고 나온 게 생각났다.다만 지금 이 상황에 다시 돌아가서 외투를 챙길 수도 없었다.그녀는 저 자신을 꼭 감싸 안으며 시린 마음을 추슬렀다.이때 갑자기 어깨에 외투가 하나 걸쳐졌는데 고개 들어 보니 박윤찬이 옆에 와 있었다.“재이 씨, 택시 잡아드릴까요?”오늘 밤에 박윤찬은 그녀를 두 번이나 도와줬다.송재이는 너무 감격스러웠다.방금 대문 앞에 서서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 바람에 아직도 얼굴에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이를 본 박윤찬이 옷 주머니에서 티슈를 꺼내더니 그녀에게 건넸다.“고마워요.”송재이가 티슈를 받고 이제 막 머리를 돌렸는데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을 발견했다.그는 바로 지민건이었다!대문 앞의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비치자 그 남자의 초췌한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덥수룩한 수염과 초라한 몰골, 바람에 흩날리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왠지 더 안쓰러워 보였다.“지민건?”송재이가 물었고 박윤찬은 그녀의 시선 따라 머리를 돌렸다.“지민건 씨가 대표님을 일주일이나 찾아다녔는데 종일 안 만나주셨거든요.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네요.”“지민건이 왜요?”설영준이 전에 그의 프로적트를 하나 취소한 건 송재이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고작 프로젝트 하나 손해 봤다고 이 지경으로 몰락한다는 말인가?“요즘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나 맡았는데 상대측에서 지민건 씨를 고소했대요. 원래 계약하기로 한 건축회사도 설한 그룹 계열사였다고 하네요. 우연인지는 몰라도 지민건 씨는 지금 두 번이나 피해를 보았는데 두 번 다 대표님과 연관이 있지 뭐에요.”현재 그 건축회사에서 지민건에게 법원 소환장을 보낸 상태이다. 상대가 고소를 취하하지
설영준은 지민건과 통화를 마친 후 유유자적하게 몸을 돌렸다.이때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주현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송재이도 울었었다.그가 ‘술집 아가씨’라고 욕할 때 눈물을 훔쳤었다.그런 말은 어떤 여자든 굴욕으로밖에 받아들일 수가 없다.심지어 송재이는 창녀가 아닌데...서러움과 괴로운 감정이 점점 더 북받쳤겠지.설영준은 뒤에 있는 난간을 잡고 차가운 시선으로 주현아를 쳐다봤다.“무슨 일이야?”주현아는 마치 서러움을 당한 초등학생처럼 한 마디 관심해주니 감정이 격해졌다.꾹 참았던 눈물이 한순간 울컥 쏟아지고 슬픔에 빠져버렸다.그녀는 설영준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영준 씨, 나 약혼반지 잃어버렸어.”설영준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3초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어쩌다가?”“그게 그러니까... 화장실 갈 때 반지 빼서 세면대 옆에 놓아두고 안에서 볼일 보고 다시 나왔더니 반지가 사라졌어...”주현아는 진심으로 속상했다. 그 반지는 설영준이 선물한 반지였으니까.이제 곧 약혼식도 치러야 하고 약혼식 때 그 반지를 껴야 하는데 지금 잃어버리면 어떡하라는 거지?주현아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왠지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설영준은 아무 말이 없었고 주현아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살짝 격앙된 듯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영준 씨가 찾아봐 줘. 손님들 아직 다 안 갔으니 CCTV 돌려봐 봐. 분명 누군가 훔쳐 갔을 거야! 흑흑...”설영준은 결국 그녀의 뜻대로 집사를 불러와 반지를 보았는지 물었다.집안에서 물건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자 집사들은 전부 자신이 의심을 당할까 봐 그에게 반지를 본 적이 없다고 해명하기 바빴다.집안의 모든 CCTV도 점검했는데 거실이며 복도 전부 정상 작동이었다.유독 1층 복도의 화장실과 가까운 곳에 달린 CCTV가 공교롭게도 고장이 나버렸다!주현아는 카메라를 돌려보면 누가 반지를 가져갔는지
그날 지민건과의 짧은 만남이 마지막일 거라고 송재이는 생각했다.하지만 며칠 뒤의 한 오후.지민건은 사람들로 가득한 연습실에 나타났다.송재이는 피아노 앞에 앉아 음정을 고르고 있었다.그때 서유리가 송재이의 귓가에 속삭였다.“재이 씨, 어떤 남자가 재이 씨 찾는데.”송재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민건이 보였다.그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었다.이를 본 오케스트라 단장도 화들짝 놀라 얼른 그쪽으로 뛰어갔다.“재이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송재이도 영문을 몰랐다.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당황해하며 지민건을 일으켜 세웠다.“뭐 하는 거야? 얼른 일어나, 일어나서 얘기해.”“재이야, 내가 인터넷에 네 사진 올리고 그런 음란한 유언비어를 퍼트린 건 네가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일부러 복수하려고 그런 거야. 네가 유부남한테 꼬리치지 않은 것도 알고, 그날 차에서 찍은 그 애정행각 사진은 다 내가 포토샵 한 거야. 이 일로 인한 명예 훼손은 내가 다 배상할게. 내가 잘못했어. 나 바라는 거 없어. 그냥 너에게 용서를 빌 뿐이야.”지민건은 하루 만에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정말 중간이라는 게 없이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그는 송재이가 휘말렸던 유언비어를 전부 씻어주고 그 구정물을 자기가 다 뒤집어쓰고 있었다.지민건은 생김새로 보면 점잖고 얌전한 스타일이었다.만약 지민건이 뒤에 그런 비열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송재이도 그를 인간쓰레기와 전혀 연관 짓지 못했을 것이다.남자가 돼서 자존심도 없이 이렇게 그녀 앞에 꿇어 있다. 통곡하며 애원하는 지민건을 보며 송재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울며 애원하자 뒤에서 송재이를 왈가왈부했던 사람들은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하여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지민건이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걸로 봐서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설마 정말 송재이를 오해한 걸까?연지수는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이 난리판을 구경하고 있었다.그녀는 오히려 이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