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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육체만 개입된 사이

임신한 연유 때문일까, 요즘 들어 송재이는 쉽게 지치고 피곤해진다.

비행시간이 고작 3시간인데 그녀는 비행기에 타자마자 잠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 몸에 담요가 덮여 있었다.

그녀는 비몽사몽 한 채로 눈을 뜨고 활짝 웃는 서유리와 눈이 마주쳤다.

송재이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 곧게 앉았다.

담요는 아무래도 서유리가 덮어준 듯싶다. 그녀는 고마운 뜻으로 서유리에게 웃어 보였다.

“방금 꿈꿨어요. 잠꼬대도 했고요.”

서유리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송재이는 흠칫 놀라서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뭐랬는데요?”

“너 미워, 망할 놈... 이랬어요.”

서유리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

송재이는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

서유리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니 차마 입밖에 내뱉지 못할 더한 말도 한 듯싶다.

“재이 씨 연애하죠?”

서유리가 가까이 다가오며 오지랖 넓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늘 온화하고 진중한 타입이라 누군가의 사생활에 이토록 관심을 가진 적이 거의 없다. 적어도 송재이는 서유리를 이렇게 생각한다.

“아니요.”

송재이는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치만 사랑하지도 않는데 미워한다는 게 말이 돼요? 재이 씨 꿈속의 그 남자 대체 누구예요?”

지금은 설영준과 헤어져서 그렇다고 쳐도 한때 함께했을 때도 그녀는 절대 설영준의 이름을 내뱉을 리가 없다.

둘은 떳떳한 사이가 아니니까. 송재이는 이 룰을 잘 지켜야 한다. 그녀는 오직 설영준이 한때 침대에서 욕구를 푸는 여자에 불과했다.

둘은 서로의 육체에 개입할 순 있어도 삶에 개입할 순 없다.

지금 다시 그 시절을 돌이켜보니 송재이의 마음이 복잡해질 따름이었다.

후회되지는 않아도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서유리는 그녀를 놀리려던 생각이었는데 이토록 우울하고 쓸쓸해 하는 모습을 보자 문득 얼마 전에 어떤 남자의 차에서 키스했던 사진이 게시판을 뜨겁게 달궜던 게 떠올랐다.

사진 속 송재이는 키스를 당할 때 설레하면서도 가슴이 찢어질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유리는 아직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지만 똑같이 이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송재이의 사생활이니 서유리도 눈치껏 더 캐묻지 않았다.

...

3일 후 송재이가 부성에서 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녀는 너무 지친 나머지 집에 돌아와 씻지도 않고 바로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깼을 때 창밖에 어느덧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송재이는 휴대폰을 켜고 입금된 공연비를 확인했는데 적지만은 않은 비용이었다.

은행카드에 찍힌 잔액은 그녀가 한 땀 한 땀 모아서 쌓아 올린 안정감이다.

다음날 오전 송재이는 아침을 먹고 병원에 다녀왔다.

딴사람들의 이목을 피하느라 그녀는 일부러 사립 산부인과를 택했고 보안 시스템이 꽤 잘되어 있었다.

임산부 서류도 작성했고 인생 첫 산전검사를 받아봤다.

송재이는 예전에 생활패턴이 매우 불규칙적이고 음식도 엄청 가려서 생리 날짜도 정확하지 않았다. 이번 검사로 문제가 수두룩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의사가 말하길 모든 수치가 정상이라고 했다.

현재 임신 2개월 차고 상태가 매우 안정적이라 엽산을 보충하는 것 외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는 송재이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로또에 당첨된 듯한 심정으로 의약품 명세서를 챙겨서 사무실을 나섰다.

이때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는데 발신자 번호 표시를 본 순간 미소가 그대로 굳었다.

[오서희 사모님.]

‘아니 대체 왜? 사모님이 무슨 일로 전화를 다 하셨지?’

송재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한참이 지나도 휴대폰은 계속 울려댔다.

그녀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

“송 선생님, 잘 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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