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심장이 아팠다. 달았던 수박이 순간 맛없어졌다.난 유신우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수박 껍질을 그릇 위에 놓은 뒤 지저분해진 내 몸을 닦았다.‘유신우, 그거 별 뜻 없이 한 말이야?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거야? 널 좋아했던 나는 얼마나 노력해야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까?’난 어쩌면 평생 묵묵히 내 어린 시절의 감정을 안고 외롭게 홀로 지내야 할지도 몰랐다.유신우는 진짜 너무 지독했다.날 좋아하지 않는 걸로도 부족해 이젠 나 혼자 편안하게 살려는 것마저 방해하려고 했다.‘제발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 줘, 제발!’두 가족은 설날을 함께 보냈다.우리 세 식구는 아저씨의 초대를 받았다. 엄마와 아줌마는 설날 메뉴를 고민했고 아빠와 아저씨는 TV를 보면서 수다를 떨었다.TV에서 설날 특집으로 나오는 각종 예능과 드라마 때문에 명절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난 할 일이 없어서 몇 번이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아줌마가 날 잡으며 유신우의 방에 가서 놀라고 했다.난 거절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에 찾아가지도 않았다. 난 소파 구석 자리에 앉아서 휴대전화를 보았다.예전에 있었던 일이 좌우명처럼 항상 내 머리 위에 떠 있어 잊을 수가 없었다. 유신우는 그 일로 내게 사과를 했지만 난 여전히 그가 껄끄러웠다.난 내가 너무 속 좁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 됐든 내 마음에 남은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고, 어쩌면 영원히 아물 수 없을지도 몰랐다.난 그를 좋아하면서도 그와 가까워지는 걸 피하려고 했다. 난 왜 이러는 걸까?“왜 혼자 여기 이러고 있어? 버림받은 강아지처럼.”갑자기 휴대전화를 빼앗긴 나는 깜짝 놀랐다.유신우는 키도 컸고 팔도 길었다. 그는 한 손으로 소파 손잡이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었다.난 너무 심심해서 예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그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는 그 드라마가 재밌어서가 아니라 아주 길어서 시간을 때우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드라마 보고 있는데 왜 뺏어
유신우는 내게 휴대전화를 던져주었고 나는 황급히 받았다. 곁눈질로 본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난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떻게 그와 지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가까이 있으면 싫어했고 너무 멀어져도 싫어했다.내가 어떻게 하든 유신우는 항상 트집을 잡았다.휴대전화를 받은 나는 드라마를 볼 생각이 사라졌다. 나는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을 끊임없이 곱씹었다.여자들은 너무 생각이 많다니.여자들이라는 건 나와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 유신우는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특이해서 여자애들과 지내는 걸 싫어했고 난 그의 곁에 있는 유일한 여자애였다. 유신우가 가리킨 다른 상대가 김현주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유신우는 단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줬던 애정은 오롯이 내 일이었다.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뒤 휴대전화 갤러리를 클릭한 나는 오랫동안 소장해 왔던 사진들을 하나둘 삭제하기 시작했다.그건 내게 살갗을 벗기는 것만큼 고통스럽고 아쉬운 일인 동시에 또 아주 평온한 일이었다.전부 삭제하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9시쯤, 유신혁에게서 영상 통화가 걸려 왔고 다들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수진아, 이리 와. 신혁이가 너한테 할 얘기가 있대.”난 얌전히 아줌마 곁에 앉았다. 휴대전화 속 유신혁은 웃음기 띤 눈빛으로 조용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수진아, 교수님이랑 이곳저곳 다니느라 널 마중 나가지 못했네. 어때? 학교는 괜찮아?”“응.”1년 못 본 사이에 신혁 오빠는 더욱 성숙해진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유신우도 잘생겼는데 유신혁은 유신우보다 더욱 준수했다. 특히 눈가의 점 때문에 아주 매혹적인 느낌을 주었다.“먹는 건 괜찮아?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어?”“안 빠졌는데? 음식은 입맛에 잘 맞는 것 같아. 특히 떡갈비가 맛있어.”나의 식탐 많은 모습에 유신혁은 활짝 웃으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그래, 나 3, 4월쯤 돌아갈 건데 그때 떡갈비 사줄게.”유신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빠르게 지나간다. 한 것도 없는데 또 개강할 때가 되었다.난 엄마와 아줌마의 요구에 못 이겨 결국 유신우와 같은 날 떠나는 항공권을 샀다.공항에 도착하자 김현주가 길가에 서서 유신우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유신우는 부모님의 시선을 피해서 기쁜 얼굴로 김현주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김현주의 손을 잡은 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연애 중인 그들은 하루라도 얼굴을 못 보면 서로를 그리워했다.난 질투 때문에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지 않으려고 했고, 혼자 캐리어를 끌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공항은 아주 컸고 많은 사람들이 각자 바쁘게 움직였다. 이건 그들의 운명이었다.앞으로 우리의 삶 또한 이렇게 될 것이다.난 눈물을 머금고 속으로 묵묵히 그와 작별 인사를 했다.이번 학기는 저번 학기보다 학업량이 많았다. 나는 잡념을 없애고 공부에만 열중했다.그러다 문득 나는 내 마음이 점점 고요해짐을 발견했다.난 우리 과에서 주최한 시합에 참여했는데 성적이 아주 좋아서 과에 소문이 났다.초빙교수는 내 그림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내게 내가 이해한 행복을 꽃으로 그려보라고 했다. 잘 그린다면 내 그림을 전시회에 전시할 것이며 날 자신의 지도학생으로 받아줄 거라고 했다.그 교수님은 한국화 업계에서 지위가 아주 높았기에 그의 지도를 받는 건 모든 한국화 전공 학생이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다.난 교수가 원한 학생이었기에 다른 학생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고 동시에 작화 수준도 그만큼 높아야 했다.나는 한 달간 공을 들여 그림을 완성한 뒤 긴장되는 마음으로 교수님에게 그림을 보여줬다. 그때 교수님은 누군가와 영상으로 회의하고 있었다.내가 나가려는데 교수님이 날 향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내 그림을 영상 속 상대방에게 보여주면서 평가를 부탁했다.회의가 끝난 뒤에야 난 상대가 교수님이 지도하는 학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교수님은 온라인으로 학생들의 과제물을 봐주고 있었다.그리고 내 그림은 다시 한번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교
취미가 비슷하다 보니 유신혁과는 말이 잘 통했고, 같이 있을 때도 아주 편했다.가끔은 짬을 내 그의 SNS를 보면서 내 멘탈을 단련하기도 했다.유신우는 예전의 냉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거의 매일 같이 자신의 행복한 일상을 게시했다. 둘이 술을 마시러 갈 때도 있었고,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할 때도 있었다. 둘이 달콤하게 연애하는 모습을 보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난 유신혁이 사주는 떡갈비로 내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고 했으나 유신혁의 복귀는 차일피일 미뤄졌고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룸메이트와 떡갈비를 두 번이나 먹었다.그해 여름 방학, 유신우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나도 유신우를 방해하지 않고 홀로 다시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돌아갔다.난 그가 없는 일상에 익숙해졌고, 홀로 천천히 성장하는 법을 배웠다.밤 비행이라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여섯 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미처 아빠, 엄마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대충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잠을 보충했다.내가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점심 때였다. 엄마는 갓 만든 음식들을 식탁 위로 옮기고 있었다. 내가 깬 걸 본 엄마는 내게 밥을 먹으라고 했다.“엄마, 저 비빔면 먹고 싶어요.”“저녁에 아줌마가 밥 사준대. 비빔면은 다음에 먹자.”저녁 식사는 길모퉁이에 있는 가게에서 하기로 했다. 늦게 도착한 내가 룸 안으로 들어갔을 때 빈자리는 하나뿐이었다.“수진아, 왜 이렇게 늦었어? 다들 너만 기다렸어.”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유신우가 입을 열었다.눈을 비비면서 그의 말에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내 눈에 날카로운 칼을 찔러넣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져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못 본 사이에 유신우는 더욱 성숙해진 듯했고, 그의 눈빛에서는 다정함이 보였다.김현주는 쑥스러운 듯 웃어 보이면서 유신우의 팔에 기대어 있었고, 유신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끼어들 틈이 없을 만큼 다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눈도 아팠고 마음도 아팠다.유신우는 김현주를 부모님에게 소개했다. 나와 유
“수진아, 현주가 간도 작고 낯가림도 심해. 그러니까 현주랑 잘 지내야 해. 나 실망하게 하지 마.”난 그를 실망하게 할 만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우는 확실히 날 실망하게 했다.19년을 알고 지냈으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유신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날 못된 사람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태연한 얼굴로 내게 경고까지 했다.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유신우에게 실망스러웠다.“그래.”아저씨와 아줌마는 김현주 집안일을 알고 있는 건지 아주 불쾌해 보였다. 식사가 시작된 뒤 아저씨와 아줌마는 내게 계속 음식을 집어줬고 김현주는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김현주는 안절부절못했고 유신우는 끊임없이 그녀를 달랬다.우리 엄마와 아빠는 남의 가족 일에 말을 얹지 않았다. 나는 식사가 시작된 뒤로부터는 그저 밥만 열심히 퍼먹었다.그건 가장 재미없는 식사 자리였다.배가 부를 때쯤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밖에 있는 테라스로 나가서 바람을 쐬었다.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테라스는 아주 작았고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나는 그곳에 들키지 않게 숨었다.잠시 뒤, 시끄러운 발소리가 테라스 바깥쪽에 멈췄다. 난 들키고 싶지 않아서 소리 없이 안쪽으로 몸을 움직였다.“신우야, 너 어디 아프니? 그 현주라는 애가 뭐가 그리 좋아서 거기에 목매달려는 거야? 너 대학교 졸업한 뒤에 공기업에 취업하려면 심사를 거처야 해. 걔 집안 때문에 너 떨어질 수도 있어. 걔는 집안 조건도, 능력도 수진이보다 뒤처져. 그런데 왜 굳이 걔여야 하는 거야?”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줌마와 유신우였다.난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들 가족 일을 외부인인 내가 많이 아는 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게다가 이건 대놓고 훔쳐 듣는 것과 다름없었다. 비록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들킨다면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하지만 테라스는 사방이 꽉 막혀 있었다. 내가 뛰어내리거나 그들이 떠나지 않는다면
유신우의 목소리에서 분노와 깊은 괴로움이 느껴졌다.쿵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무언가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그로 인해 나는 피를 흘렸고 큰 고통을 느꼈다.무언가 끊임없이 밖으로 흘러나왔고 코가 시큰거렸다. 나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면서 고통스러워했다.난 지난 19년을 부정당했다.안타깝게도 나의 애정과 그를 그리워하면서 죽어가던 심장이,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던 지나간 내 청춘이 결국엔 나 혼자만의 일이 되었다. 정말 애석한 일이었다.나는 무척 슬펐다.유신우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같이 자란 정이 있지, 어떻게 저렇게 날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내 모든 걸 내어주면서 그를 좋아했던 걸 봐서라도 저렇게 심한 말을 해서는 안 되었다.나는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유신우가 또 무슨 말로 내 마음을 죽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자기 뜻을 확실하게 전했다. 나와 그는 어차피 이번 생에는 부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유신우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게 그를 도와주는 것은 별거 아니었다.내가 한 걸음 물러난다면 두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었다.한 걸음 물러남으로써 감당해야 할 고통은 나 혼자 견디면 되었다.김현주는 마침내 눈물을 터뜨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애처롭게 울었다.유신우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 한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부드럽게 달랬다. 그건 내가 지난 19년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자의 차이였다.아줌마는 화가 나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줌마가 쫓아가려 하자 난 테라스에서 나와 아줌마의 팔을 잡았다.내가 테라스에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들 곧바로 내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음을 깨달았다.아줌마의 안색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아줌마의 눈에서 보이는 미안함은 마치 바다처럼 날 익사시킬 듯했다.유신우는 고개를 돌려 나를
난 웃는 얼굴로 아줌마의 어깨에 기대면서 예전처럼 그녀에게 애교를 부렸다.“아줌마, 앞으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제 남자 친구가 안다면 싫어할 거예요.”그날 밤 난 침대에 누워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이를 악문 채로 견뎌야 했다.새벽쯤 유신우가 나한테 카톡을 보냈다.“진짜 남자 친구 생긴 거야? 누군데?”난 눈이 시큰거릴 때까지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누구든 어차피 그가 아닌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난 답장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무음 상태로 설정해 놓은 뒤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았다.내게 남자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내 남자 친구가 누구인지, 그건 내 일이지 그와는 상관없었다. 내가 그에게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난 다크써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채로 고등학교 동창들과 등산하러 갔다.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난 유신우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집이 너무 가까운 탓에 우연히 마주치는 것마저 너무 일상이라 그를 만나지 않으려면 외출해야 했다. 그래서 등산하려고 한 것이다.나는 운동 신경이 좋아서 등산이나 수영 같은 걸 무척 좋아했다.유신우가 나와 선을 긋고 난 뒤 난 갑자기 변했다. 나는 격렬한 스포츠를 더는 좋아하지 않았고, 사람이 많은 것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혼자 조용히 있기만을 원했다. 나는 다른 이들과 같이 등산하는 것보다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거나 멍때리는 걸 좋아했다. 사람들을 피하고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다.내가 외출할 때쯤 유신우는 문을 연 채로 김현주와 함께 신발을 신고 있었다.“신우야, 올케.”또 마주치다니 정말 재수가 없었다. 나는 간단히 인사만 건넬 생각이었다.“어, 잘됐네. 같이 가자. 내가 택시 불렀어.”난 당황했다.“너희도 가려고?”“왜? 너 혼자 가게?”유신우는 날 곁눈질로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짙은 장난기가 보였다.난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등산하는 데까지 따라오다니, 나 혼자 조용히 내버려두면 어디 덧나는 걸까?그렇다고
전부 사실이었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쓴웃음만 지었다.“유신우, 애들한테 네 여자 친구 소개해 줘.”김현주는 유신우의 품에 기댄 채로 쑥스럽게 웃었다. 사랑을 잔뜩 받은 모습이었다.“어머, 언제 여자 친구를 또 사귀었대?”장겨울은 직설적인 성격이라 내 눈짓을 무시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유신우의 사이가 어떤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사람들 앞에서 유신우에게 큰 수모를 당한 일도 다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동안 유신우를 욕했었다.장겨울은 날 무척이나 아꼈다. 아마도 내 편을 들어줄 생각이었을 것이다.난 못 말린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다니, 장겨울 때문에 나 또한 난처해졌다.“김현주도 솔로고 나도 솔로인데 사귀는 게 뭐가 문제가 돼?”유신우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너희 둘... 읍...”장겨울과 가장 가까이 있던 이세영은 내가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는지 긴 팔로 장겨울의 입을 틀어막고 그녀를 한쪽으로 끌고 갔다.“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야? 소개는 무슨, 얼른 등산하자.”등산은 강한 체력이 있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그들처럼 어릴 때부터 공부만 한 애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산허리까지 왔는데 다들 힘들어했다. 그들은 나무 그늘에 숨어서 휴식했다.그들은 할 말 있는 얼굴로 날 에워쌌다. 그러나 혹시라도 내가 상처를 받을까 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오늘 그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신우 때문에 또 엄청 상처를 받았을 테니 말이다.“나 딱 한 번만 말할게. 앞으로 아무도 묻지 마. 어렸을 때 부모님들끼리 애들 결혼시키자고 한 건 그냥 장난이었을 뿐이고 유신우는 날 그저 여동생으로 여겼어. 나 혼자 착각한 거야. 유신우와는 아무 상관 없어. 유신우가 좋아하는 여자는 김현주야. 이미 부모님께도 소개했고. 앞으로 둘이 결혼할 거야.”“그러면 수진이 너는? 네가 유신우를 좋아한 건 가짜가 아니잖아.”난 쓴웃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