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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유나은은 그날 밤을 영원히 기억한다.

김준희는 원래 그녀를 이원우의 방에 들여놓고 두 사람이 관계를 맺은 후 공개적으로 이원우를 협박해 유나은과 결혼시킬 예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딸아이를 다른 방으로 잘못 보냈다. 이원우의 방에 들어가야 할 유나은은 이연준의 방으로 보내지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깼을 때 이연준이 자신을 쳐다보던 그 싸늘한 눈빛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연준은 그녀에게 의도가 뭐냐고 물었고 착잡해진 유나은은 거짓말을 둘러대고 말았다. 이원우을 좋아하는데 방을 잘못 들어왔으니 이연준더러 한 번만 너그럽게 봐달라고 했다.

이연준은 야유 섞인 말투로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모녀가 쌍으로 난리네. 한 명은 신분 상승하려고 정신질환자에게 시집오질 않나, 또 한 명은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스스로 천하게 굴지를 않나.”

유나은은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제발 너그럽게 봐줘요 삼촌...”

이연준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빈말로 어떻게 너그럽게 봐주겠어? 성의를 보여야지.”

유나은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이연준은 옷을 챙기고 자리를 떠났다.

“앞으로 내가 부르면 바로 달려와. 내가 질린다고 할 때까지. 안 오면 뒷감당은 혼자 하도록.”

유나은은 확실히 어떤 결과가 차려질지 잘 안다.

그녀는 반항할 여력이 없었고 그렇게 3년 동안 이연준과 불분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한편 이원우는 다음날 출국했다고 들었는데 김준희가 사람을 붙잡지 못하니 소란을 피울 수가 없어 모든 게 일단락됐다.

웃기는 건 김준희가 아직도 그날 밤 유나은과 잔 사람이 이원우라고 착각하고 있다...

이연준은 지금 이 시각 유나은의 앞에 보란 듯이 서 있었다. 그의 정장 바지는 구김 하나 없이 깔끔하고 정갈했다.

그는 귀한 몸을 움츠리고 앉아 유나은의 턱을 잡고서 자세히 훑어봤다.

“꽤 신경 썼나 봐.”

유나은의 눈시울이 빨개졌다. 이연준이 그녀의 턱을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 고통이 밀려왔다.

“속내가 너무 드러나면 오히려 상대의 흥미를 잃게 하지.”

유나은의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이연준이 손을 놓았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질문을 건넸다.

“그러는 넌 질렸어?”

이연준은 동문서답으로 대답했다.

“귀국하자마자 안달인 거야? 3년 동안 꽤 잘 참네 유나은?”

똑똑...

이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유나은은 움찔 놀라더니 재빨리 숄을 주웠다.

“혼자 일어서.”

이연준이 말했다.

유나은은 이미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꿋꿋이 이 악물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이연준의 방에 있는 걸 행여나 남들이 볼까 봐, 그렇게 되면 괜히 설명하기 힘들어지니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연준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아서 제 옆으로 당겨왔다.

“가서 문 열어.”

유나은이 고개를 내저었다.

“안돼...”

이연준은 기어코 그녀의 뜻을 거부하며 손목을 꽉 잡고 문을 열러 갔다.

다행히 문밖의 사람은 이연준의 비서 진명수였다. 이를 본 유나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명수는 손에 과일 그릇을 들고 있었는데 얼핏 보니 방금 유나은이 들고 온 그릇과 너무 비슷했다.

그녀는 이연준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에 이연준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과일 주러 가야지.”

그녀는 입을 삐죽거렸다.

“싫어, 나 안 가.”

이토록 남루한 몰골로 어떻게 이원우에게 과일 주러 갈까?

“오늘 밤에 일부러 원우 보러 온 거 아니었어?”

이연준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째려보더니 대뜸 제 앞으로 잡아당겨 왔다.

유나은은 자신이 언제 또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몰라서 용기 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밤에 대체 왜 이렇게 화내는 거야?”

방금 그녀를 괴롭힐 때도 몹시 화났다는 걸 느꼈다. 스완 시티에서 돌아온 그 날 밤처럼 화를 내고 있었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건지 그녀는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이연준이 되물었다.

“모르겠어?”

유나은은 흠칫 놀라더니 굴욕을 자초하며 떠보듯이 물었다.

“지금 질투하는 거야?”

이연준은 쓴웃음을 지었는데 유난히 냉정하고 야박해 보였다.

“네가 뭔데?”

유나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연준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본인이 뭐라도 된 줄 아나 봐?”

유나은은 이왕 엎질러진 김에 갈 데까지 가볼 기세였다.

“삼촌이 3년 동안 안 질렸다는데 자신감 좀 가지면 안 돼?”

이연준은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녀는 대꾸한 저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니 거둬들일 수도 없었다.

이연준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꺼져.”

유나은은 감히 더는 머무르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문밖에서 진명수가 냉큼 그녀에게 길을 내주었다.

유나은이 떠난 후 진명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연준은 문 옆의 벽에 기대 옷소매를 거두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한 대 물었다. 잘생긴 얼굴에 담배 연기가 자욱해져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한참 후 그는 문밖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진명수는 바로 눈치채고 황급히 쫓아갔다.

집 밖에서.

장맛비가 여전히 쏟아져 내렸고 찬바람이 유나은의 얼굴을 스쳤다. 홍조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그녀였다.

유나은이 이제 막 떠나려 할 때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나은 씨.”

고개를 돌려 보니 집사가 우산을 들고 계단에 서 있었다.

“나은 씨, 밖에 비 와요.”

집사가 말하며 수중의 우산을 그녀에게 건넸다.

우산을 본 그녀는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저 엄마 보러 왔어요.”

“어르신은 알고 계십니다.”

집사는 우산을 기울인 손을 꿈쩍하지 않았다.

“마침 어르신도 나은 씨한테 하실 말씀 있으시답니다.”

“지금요?”

유나은의 물음에 집사가 대답했다.

“내일 아침에요.”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알겠어요.”

유나은은 이동건을 썩 만나고 싶지 않지만 지금 형세로 보아 그녀의 뜻대로 되긴 글렀다.

대학원에 입학한 이후로 유나은은 도곡 별장에서 나왔다. 가족 모임이거나 중요한 명절을 제외하곤 거의 오지 않았으며 자고 간 적은 더더욱 적었다.

이전에 그녀가 떠날 때 이동건은 딱히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왜 이러는 건지 그녀는 얼추 짐작이 갔다.

복도 모퉁이에서.

진명수가 시선을 거두고 3층으로 다시 돌아갔다.

테라스에 늘씬한 그림자가 비치고 밤바람이 이따금 불어오며 뒤에 있는 커튼이 살짝 흩날렸다.

진명수가 가까이 다가와 보고했다.

“도련님 예상대로 어르신께서 유나은 씨를 하룻밤 묵게 하셨어요.”

이연준은 이미 다 지켜보았다. 집사가 우산을 쓰고 나타나기 전, 그녀가 비를 무릅쓰고 떠나려던 그 모습까지 모조리 눈에 담았다.

제 몸을 전혀 아끼는 법이 없는 여자였다.

“원우는 아직도 안 돌아왔나요?”

이연준이 몸을 돌리고 찬바람보다 더 서늘한 말투로 물었다.

진명수는 곧장 대답했다.

“3년 만에 뵙는 거라 어르신도 원우 도련님이 엄청 그리우셨을 겁니다. 하실 말씀 많을 테니 아마 좀 더 있지 않을까요?”

이연준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역시 너무 빨리 돌아왔네요.”

진명수는 온몸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

...

다음날 이른 아침.

유나은은 전화벨 소리에 놀라서 깨났다.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전화를 받았다.

“승아야.”

“나은, 왜 집에 없어?”

전화기 너머로 주승아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나은은 이불을 걷고 비몽사몽 한 채 되물었다.

“어젯밤에 도곡 별장으로 왔어. 너 우리 집이야?”

주승아는 유나은이 배현시에서 알고 지내는 절친이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때 만나서 여태껏 친하게 지내왔다. 너무 친한 나머지 서로의 집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다.

주승아가 유나은에게 왜 집에 없냐고 묻는 건 아마도 본인이 지금 그녀의 집에 있는 모양이다.

“금방 왔어. 오늘 나랑 함께 소개팅 나가주기로 했잖아.”

주승아는 요즘 생리 중이라 가방에서 생리대를 꺼내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도곡 별장에 간 건데?”

유나은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졌고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할아버지께서 내가 이미 다른 지역 병원에 이력서를 넣은 걸 아신 것 같아.”

전화기 너머로 주승아가 혀를 끌끌 찼다.

“역시 배현에서 너희 할아버지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일은 없다니까.”

이 말은 유나은의 허를 찔렀다.

그녀는 속절없는 표정으로 주승아에게 당장 돌아갈 것 같지 못하다고 말하려 했는데 불쑥 전화기 너머로 비명이 들려왔다.

“헐, 뭐야 이거?”

유나은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그래 승아야?”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주승아의 질문이 쏟아졌다.

“나은아, 너희 집 화장실에 왜 임테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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