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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이연준과 이런 사이가 된 지 어언 3년, 그녀는 여자친구라는 타이틀도 받지 못했고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항상 이렇게 숨어서 만나야 했다.

사실 이런 떳떳하지 못한 관계는 진작에 끊어냈어야 했다.

하지만 함께하는 3년 동안 이연준은 그녀의 몸에 중독이라도 된 양 처음에는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만 부르다가 그 뒤로는 일주일에 세 번, 심지어는 보름 내내 그녀를 놓아주지 않기도 했다.

“애기야...”

남자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를 상념에서 끄집어냈다. 두 사람은 해암 별장에 도착한 뒤 바로 침실로 향했고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침대 위였다.

목에 아릿한 고통이 일어 그녀는 낮게 신음했다.

“살살, 제발 살살...”

“살살 못 해.”

침대 위에서의 그는 한 마리의 흉포한 짐승이 따로 없었다. 열에 일곱 번은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애걸복걸을 하고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세 번의 격렬한 사랑을 나눈 뒤 유나은은 침대에 완전히 쓰러져버렸다. 몸은 땀범벅이었고 두 눈은 뜰 힘조차 없었다.

그녀의 귓가에 또다시 뜨거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이에 그녀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그를 밀어냈다.

“안돼. 나 더 이상은 무리야.”

이연준은 그녀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있는 힘껏 자신의 것을 밀어 넣었다.

유나은은 침대 시트를 꽉 쥐고 또다시 그를 받아냈다.

“착하네.”

이연준은 땀으로 가득한 그녀의 쇄골과 목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열기로 인해 핑크빛으로 물든 피부가 무척이나 탐스러웠다.

“내 옆에 있는 게 싫어?”

유나은은 거의 실신한 상태로 은은한 불빛이 감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만약 이연준의 옆에 있는 게 좋으냐고 물어본다면 사실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그는 체력도 좋고 몸매도 좋으며 관계 뒤의 매너 또한 완벽했다. 잠자리 파트너로서는 가히 최고였다.

하지만 그는 이연준이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말하자면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와 같았다.

“다른 생각할 여유가 있나 봐?”

그는 그녀의 턱을 잡아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유나은은 그의 오뚝 솟은 큰 코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코가 클수록 밤일을 더 잘한다는 누군가의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우스갯소리로만 치부했었지만 지금 보니 꼭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정말 양수경 씨와 결혼할 거야?”

그녀는 빨개진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이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아 그대로 손바닥에 키스를 퍼부었다.

“내가 그 여자랑 결혼하는 게 싫어?”

유나은은 순간 목이 메어왔다.

“내가 싫다고 하면 안 할 거야?”

이연준은 그녀의 손을 풀어주고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은 다음 천천히 움직였다.

“내 아내 자리는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모르는 거고, 그렇다는 건 내 결혼 상대가 꼭 그 여자일 거라는 보장도 없는 거지.”

유나은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양수경 그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와는 절대 결혼 안 하겠다는 소리네.’

두 사람의 정사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이연준은 그대로 잠들어 버린 유나은을 안고 욕실로 가 몸을 씻겼다. 그러고는 옆 침실의 깨끗한 침대 위에 그녀를 눕히고 함께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깨어났을 때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유나은은 간단히 씻고 아래로 내려왔다.

해암 별장 도우미인 임수미는 그녀가 내려오는 타이밍에 딱 맞춰 아침을 차렸다.

“연준 씨는요?”

유나은은 그녀가 빼준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도련님은 출근하셨어요.”

임수미는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참, 진 비서님이 나은 씨가 깨어나시면 차고에 있는 차 중에서 아무거나 타고 가셔도 된다고 전해달라셨어요. 그리고 집 문제는 나중에 연락드리겠다고도 했고요.”

유나은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이연준은 돈 쓰는 것에 인색한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손이 너무 커서 문제였다.

3년간 그는 진명수를 통해 몇 번이나 그녀에게 억 단위의 돈을 송금했다.

물론 유나은은 그 돈을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 돈을 건드릴 만큼 돈이 없지는 않으니까.

액세서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다 비싸고 예쁜 것들이었지만 그걸 하고 갈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그 비싼 것들은 지금 그저 보관함 속에서 장식품의 역할 정도만 하고 있었다.

임수미는 우유 컵을 치우고 이번에는 따뜻한 죽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음식에서 풍기는 은은한 해산물 냄새에 유나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무슨 죽이에요?”

“전복죽이에요.”

유나은은 잠깐 멈칫하더니 숟가락을 들어 죽을 휘저었다. 그러자 해산물 냄새가 점점 더 세게 풍겨왔다.

임수미는 그녀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보고 물었다.

“오늘은 전복죽이 입맛에 안 맞아요?”

“아니에요.”

유나은은 메슥거림을 애써 누르고 한입 먹었다.

하지만 삼키기도 전에 속이 울렁거려 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갔다.

토하는 소리가 문밖에까지 들렸다.

임수미의 얼굴은 걱정에서 점점 심각해지더니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나은 씨,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 불러올까요?”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뒤에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유나은이 조금은 괜찮아진 얼굴로 나왔다.

“괜찮아요. 의사가 여기 있는데 누굴 불러요.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이건 그냥 위장 고질병이 또 도진 것뿐이에요.”

“몸 망가지지 않게 조심해요.”

임수미는 아직 걱정된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에 유나은은 정말 괜찮다며 미소까지 지었다.

하지만 평온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심장은 지금 미친 듯이 뛰었다.

임수미는 성실한 사람이라 유나은에 관한 일이라면 사소한 것이라도 이연준에게 보고를 올리곤 했다. 그러니 방금 토한 것도 당연히 이연준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는 그녀를 데리고 당장 병원에 데려가 정밀검사를 진행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임신이라면 그는 아마 지우라고 할 것이다.

지금은 임신이 아니길, 그저 스트레스 때문에 위가 말썽을 부리는 것이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다.

유나은은 테이블로 돌아간 뒤 따뜻한 물을 한잔 마시고 죽은 먹지 않았다.

그녀는 나갈 준비를 마친 다음 차고에서 제일 저가로 보이는 승용차를 골라 타고 병원으로 출근했다.

오늘부로 이연준과의 사이는 정리가 됐지만 그와의 추억들을 다 잊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어쩌면 쓸데없는 생각을 할 수 없게 열심히 일하면 빨리 떨쳐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 그녀는 일하는 내내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은 동료 의사인 서민호와 당직까지 서야 했다. 자정 전까지는 그녀의 몫이었고 자정 이후부터는 서민호가 맡기로 했다.

그렇게 12시까지 간신히 버틴 그녀는 서민호와 교대한 후 바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그러기를 몇 분, 곧바로 간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컨디션이 안 좋은 데에 더해 벨 소리까지 들리자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몇 번이나 울려대는 전화에 그녀는 결국 받고야 말았다.

“유 선생님, 109호 환자분이 갑작스럽게 두통을 호소하고 있어요.”

유나은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서 선생한테 얘기하세요. 저 지금 휴식이에요.”

“유 선생님이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고집스러운 간호사의 말에 그녀는 몇 초간 고민하다가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갈게요.”

병실로 가는 길, 마침 다른 병실에 있던 서민호와 눈이 마주쳤다. 콜을 듣고 간다는 그녀의 말에 그는 자신이 가 보겠다며 쉬라고 했다.

이에 유나은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한 뒤 빠르게 환자의 상황을 해결했다.

이번에야말로 편히 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침대에 눕자마자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유 선생님, 중환자실로 와주세요. 환자 상태가 심상치 않아요.”

“유 선생님, 유 선생님...”

간호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유나은의 심장 고동은 거세져 갔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서 선생 찾으라고. 내 말이 안 들려요?”

“유 선생님 그래도 한번 와보세요.”

간호사는 그녀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건지 계속해서 그녀를 불렀다.

유나은은 심장 쪽을 꽉 쥔 채 한숨을 길게 내쉬며 물었다.

“대체 왜 자꾸 부릅니까?”

그녀의 호소에 마음이 약해진 간호사가 작은 목소리로 얘기해 주었다.

“저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지시받은 거라서 어쩔 수 없어요...”

그 말에 휴대폰을 잡고 있던 유나은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이제야 알았다.

이런 지시를 내릴 사람은 이동건밖에 없다.

그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고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압박을 가해 더는 그런 생각조차 못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유나은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다섯 걸음도 채 걸지 못하고 그녀는 깜깜해지는 시야를 마지막으로 그렇게 기절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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