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승아는 이미 한참이나 오래전부터 거의 세뇌하듯 외삼촌 자랑을 했었다.미남인 데다 키도 크고 집안도 좋으며 게다가 성격도 다정다감하다는 등 할 수 있는 칭찬은 전부 다 갖다 붙였다.“나은아, 너 알지. 내가 네 앞에서 우리 삼촌 자랑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그런데 정말 그만큼 사람이 좋아. 게다가 계속 솔로였고.”주승아는 전혀 동요가 없는 그녀를 보더니 다시 한번 어필했다.“비록 나한테 삼촌뻘이기는 한데. 나이는 아직 30세도 안 됐어. 정말 연애하면 후회 없을 그럴 남자라니까.”유나은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으니까.그녀는 아직 선을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주승아는 그녀의 난감한 기색을 알아채고 말했다.“나은아, 갑작스럽게 선을 보라고 해서 당황한 거 알아. 하지만 우리 삼촌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그리고 나도 평소에는 삼촌을 잘 못 봐. 그래서 이번이 어쩌면 기회라고 생각했어.”유나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너는 어제 나한테 이 얘기를 했었어야 했어.”그러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우왕좌왕하고 난감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주승아는 그녀의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나은아, 이번 한 번만 봐주라, 응? 딱 한 번만 맞선 보러 가자.”“이제 무를 수도 없는 거 아니야?”“그럼 오케이 한 거야?”주승아는 활짝 웃었다.유나은은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친구 사귄다고 생각하지 뭐. 그러다 마음이 맞으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거고 안 되면 그냥 친구로 남는 거고. 친구와 인맥은 많은 게 좋다고 네가 항상 그랬지 아마?”사실 그녀는 이연준의 태도에 마음이 계속 복잡한 상태였다.그녀를 놓아준 게 맞는 건지 아닌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으니까.3년간, 유나은은 그가 아닌 다른 남자는 만나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맞선 보는 것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지도 몰랐다.“역시 나은이 너밖에 없어!”주승아
유나은은 맞선을 볼 배짱은 있어도 이 사실을 이연준에게 들킬 배짱은 없는 듯했다. 지금 그녀가 얼마나 떨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연준 씨가 원래 오려고 했는데 급하게 중요한 회의가 잡히는 바람에 저 혼자 오게 된 거예요.”양수경은 친절하게 유나은의 손을 잡아당겼고 그녀는 유나은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이연준이 안 온다는 양수경 말에 그녀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안 와서 정말 다행이다. 밖에서 맞선을 보는 걸 그한테 들켰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한편, 양수경은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연준 씨가 내 능력을 믿는다고 하니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삼촌이 이런 중요한 일을 양수경 씨한테 맡긴 걸 보면 양수경 씨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뜻 아니겠어요?”“글쎄요.”양수경은 칭찬에 마음이 한껏 들떴다. 입술을 가리고 웃던 양수경은 그제야 옆에 또 다른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은 씨 친구분들이에요?”유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수경 씨, 말씀 많이 들었어요.”주승아가 거침없이 인사를 건넸다.“절 알아요?”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물론이죠.”농담이 아니라 정말 양수경이라는 이 여자를 알고 있었다. 이연준 옆에 있는 그 여자를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꽤 유명한 사람인데 이곳에 와서 유나은과 친한 척할 줄은 몰랐다. 양수경은 옆에 있는 유나은을 쳐다보았다.“나은 씨가 알려준 거예요?”주승아는 유나은을 한번 쳐다보고는 양수경을 향해 웃었다.이어 양수경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두 남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친구 모임이에요? 아니면...”주승아는 당당하게 사실대로 말했다.“맞선 자리예요.”양수경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유나은을 쳐다보았다.“나은 씨도...”“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저만 맞선을 보는 거고 나은이는 그저 저랑 같이 나온 것뿐이에요.”그러나 양수경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안에 계십니다.”진명수가 옆으로 몸을 돌리며 한 방향을 가리키는데 그곳은 식당의 별실이었다. 그녀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결국은 이리 일어날 줄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이연준이 왜 갑자기 식당에 왔는지 추측할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요? 삼촌도 왔구나...”그녀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친구들이랑 밥 먹고 있었어요.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진명수의 옆으로 지나갔다.“나은 씨, 잠깐만요.”그의 부름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도련님께서 오실 때 안색이 좋지 않으셨습니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 진 비서님께서 신경 많이 써주세요. 전 친구들이 기다려서 이만 가볼게요.”재빨리 도망치는 그녀를 진명수는 다시 부를 기회조차 없었다. 유나은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도련님의 노여움을 산다면 누구도 좋은 결과가 없을 텐데.”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진명수의 얼굴을 보니 망했다는 표정이었다. 그에게도 덩달아 화가 미치기 때문이다. 한편, 유나은은 황급히 테이블으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맞은편에 있던 손지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아가 쓸데없는 얘기를 했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주승아와 유나은의 사이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해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유나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신경 쓰지 않아요. 굳이 설명 안 하셔도 됩니다. 승아와는 친한 사이니까 정말 별거 아니에요.”“봤지? 삼촌이 괜한 걱정을 한 거라니까.”주승아가 헤벌쭉 웃었다. “언제 어디서든 입조심해.”“알았어. 나은이가 혼자 밖에서 지내는 게 안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랬던 거야. 삼촌은 잘 아는 사람이니까 나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고.”말을 마친 주승아가 유나은을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 그 모습에 유나은은 웃음을
그녀는 믿지 않았다. 그저 진명수가 겁을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연준이 어떻게 직접 그녀를 찾으러 오겠는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 소식은 이내 이씨 가문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너무 큰 위험이었다. 갑자기 이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분 남았어.”그 순간 유나은의 몸은 엄청난 반응 속도를 보이며 정말 2분 만에 식당에서 나와 그의 차에 올라탔다.“이틀 동안 휴가를 냈다고 들었어.”그는 그녀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손을 뻗어 셔츠 깃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아직도 양수경이 어디 갔는지 궁금했던 그녀는 남자의 물음에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급성 위염 때문에 어제 병원에 이틀 휴가를 냈어. 삼촌은 알고 있었던 거 아니야?”“아프다고 휴가까지 냈으면 왜 집에서 쉬지 않고?”남자는 편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단추를 푼 뒤 손을 내려 한쪽에 걸쳤다.나른하고 느슨한 모습에 압박감이 조금 덜하였지만 여전히 귀티가 났다. 그녀는 남자의 옆모습을 주시하며 대답했다.“승아네 집에서 승아한테 맞선을 보라고 해서. 마침 시간 돼서 같이 온 거야.”“그리고 또?”이연준은 고개를 기울인 채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그게 다야.”당황스러웠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한 척했다. 약간의 허점이라도 보인다면 이연준이 바로 알아차릴 테니까.다행히 이연준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진명수한테 차를 출발시키라고 했다.“잠깐만요.”마음이 급한 나머지 이연준의 팔을 덥석 잡았다.“승아가 기다리고 있어. 이대로는 갈 수 없다고. 이건 너무 양심에 찔려.”그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그녀의 가는 손에 시선을 옮겼다. “양심?”유나은은 바로 손을 뗐다. 그녀가 잡고 있던 셔츠 끝자락을 살짝 털었다. 구김이 잘 가지 옷감이라 다행이었다.“너한테도 양심이 있었어?”그녀는 한동안 멍해졌다.나한테도 양심이 있었냐니?내가 왜 양심이 없어?“전화 받아.”그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제야 그녀는 핸드폰이 울리는 걸 알아차렸
“애기야. 긴장 풀어.”“자기 집에서 왜 이렇게 떨어? 응?”남자의 낮고 고혹적인 목소리가 그녀의 이성을 점차 무너뜨렸다. 머리 위로 갇힌 두 손 때문에 그녀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남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이연준 씨,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굴욕적인 마음이 들었던 그녀는 이 남자를 발로 걷어차 분풀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한쪽 다리는 남자에 의해 올려졌고 다른 한쪽 다리까지 들어 올린다면 틀림없이 보기 흉하게 넘어질 것이다. “왜 이러냐고?”남자는 나지막이 웃으며 뜨겁게 그녀를 바라보았다.“넌 어떻게 생각하는데?”미친 듯이 몰아붙이는 남자 때문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다.남자는 포악한 짐승처럼 한 번 또 한 번 그녀를 집어삼겼다. 풀리지 않은 그의 분노가 그녀의 몸을 부서지게 만들었다. 현관의 불은 계속 꺼져있는 상태였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다.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눈꼬리에 뽀뽀를 하고는 문을 잠근 다음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침대에 등이 닿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을 뒤척이며 도망치려고 하는데 남자가 그녀의 하얀 발목을 붙잡았고 너무 쉽게 그녀를 잡아당겨 자신의 몸 아래로 가두었다. “매일 밤 널 안아야만 얌전히 있을 거야?”코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이연준 당신 개자식이야.”욕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도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손을 뻗어 눈물과 엉킨 그녀의 머리카락을 떼주었다. “얌전히 굴어. 나 화나게 하지 마. 그럼 아까처럼 울어도 진짜 소용없을 테니까.”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약속을 안 지킨 건 당신이잖아.”허우적대는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난 늘 말하는 대로 했어.”“하지만 그날 당신이 나한테 약속한 거 아니었어?”“네 말대로 그건 그날이고. 오늘이랑 무슨 상관이야?”눈물이 고인 두 눈을 부릅뜨고
김준희의 촉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몰랐다. 침실에 확실히 남자가 숨어 있었으니까. 다행히 그녀도 김준희가 다시 물어볼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상하고 몸을 돌려 김준희에게 길을 비켜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엄마,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요. 내가 무슨 집에 남자를 숨겨요?”“분명히 들었단 말이야.”“뭘 들었는데요? 길을 비켜드렸으니 의심되면 확인해 보세요. 옷장이랑 화장실 다 샅샅이 뒤져보세요. 안 그러면 저 억울해서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요.”그녀는 몸을 돌려 눈물을 닦았다. 눈물은 당연히 짜낸 것이었고 보기에는 무척 슬퍼 보였다.김준희는 자신이 쓸데없는 의심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의 사생활이 어떤지는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늘 딸아이를 감시해 왔기 때문에 남자 친구를 사귀는지도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남자를 숨겼다는 말은 딸한테 하지 말았어야 했다.아까는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엄마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 이제 그만 화 풀어.”미안한 마음에 그녀가 유나은의 손을 잡았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저 상관 안 해요. 하지만 엄마가 이러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들어요.”“엄마 잘못이야. 사과할게.”김준희는 유나은의 눈치를 살피며 웃었다. “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유나은도 한발 물러서는 척하면서 돌아서서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내 김준희의 발밑에 놓아두었다. “속이 좀 안 좋아서 늦게 문을 열었어요.”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그녀가 배를 부드럽게 문지르고 있었다.“지금은 어때? 좀 나아졌어?”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 아플 때도 있고 괜찮을 때도 있고.”“검사 받아봤어? 큰 병 같은 건 아니겠지?”김준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알아서 해요.”“커피 드실래요? 아니면 차 드실래요?”유나은은 돌아서서 주방으로 향했다. “신경 쓸 거 없어. 잠깐 앉아 있다가 갈 거야. 이리 와서 좀 앉아.”김준희는 슬리퍼도 갈아신지 않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넌 의사라는 애가 잘 챙겨 먹을
“복이라는 게 이원우랑 결혼하는 거예요?”정확한 대답이었다. 이내 김준희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새빨간 네일을 한 손으로 그녀가 입술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원우가 얼마나 좋은 남자니? 앞으로 내 인생은 너한테 달렸어.”“엄마, 제가 몇 번을 말해요. 저랑 이원우는 가능성 없어요. 이씨 가문에서 절대 우리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유나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3년 전 그 일은 할아버지께 말씀드린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예요. 기껏해야 제가 배현시에서 쫓겨나게 되겠죠. 그때가 되면...”“그만해. 그렇게 심각하게 말하지 마.”김준희가 무거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제가 심각하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런 거예요. 엄마만 아직도 잘 모르고 계시는 거라고요.”“입 닥쳐.”이제 막 가라앉은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왜 자꾸 이렇게 재수 없는 얘기만 골라서 해?”유나은은 갑자기 웃음이 났다. 끝없이 그녀를 몰아세우는 사람은 김준희였고 여태껏 그녀는 단 한 번 누구를 강요해 본 적이 없다. 잠시 후, 김준희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걱정하지 마. 엄마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아픈데 다 나으면 할아버지께 사과드리러 왔다 가.”그런 김준희의 모습에 무감각해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벙어리야? 왜 말이 없어?”김준희는 나무토막 같은 그녀의 태도가 불만이었다. “알았어요.”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준희를 문까지 배웅하려 했다. 그 모습에 김준희가 손사래를 치며 배웅하지 말라고 했다.“푹 쉬어. 그리고 평소에 네가 먼저 이원우한테 연락도 좀 하고 그래.”대답을 하려고 하려는 그때, 그녀의 침실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타악. 거실에는 유나은과 김준희 두 사람뿐이었고 말소리 외에는 잡음이 없었기 때문에 김준희가 잘못 들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바로 유나은을 향해 따져 물었다.“방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엄마.”유나은이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의 모습에 김준희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이렇게 긴장해?”“저기... 조심하세요. 제 물건 망가뜨리지 마시고요.”“내가 무슨 네 물건을 망가뜨린다고 그래? 근데 이렇게 긴장하는 걸 보니 뭔가 수상한데? 너 혹시 나한테 숨기는 일이라도 있니?”김준희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뭔가 말을 하려는 찰나 김준희는 그녀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침실로 들어갔다.“이 안에 뭐가 있는지 어디 한번...”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핸드백 안의 핸드폰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고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가 전화를 한 거야?”지금 걸려 온 전화가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그녀의 말투에 짜증이 가득 배어있었다. 근데 발신자 번호를 본 순간 그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하였고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을 때 수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준희의 모습을 유나은도 눈치챘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김준희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전화를 마친 그녀가 급히 침실을 나왔다.“급한 일 있어서 먼저 갈게. 푹 쉬어. 어르신께 사과드리는 거 잊지 말고.”몇 마디 당부한 뒤, 김준희는 급히 자리를 떴고 방금 침실에서 들린 소리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듯했다. 유나은은 문 앞까지 쫓아와 물었다.“아저씨 어디 편찮으세요?”“그 사람 아니야. 다른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황급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김준희는 몇 걸음만 더 가면 침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근데 공교롭게도 그 순간에 전화가 걸려 왔다. 도대체 누구한테서 걸려 온 전화이길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침실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를 보니 문뜩 생각이 떠올랐다.“당신이야?”“내가 뭐?”이연준이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따져 묻는 말투로 그한테 묻지 말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