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6화

이동건은 모처럼 화를 내지 않았고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 어느 집 영식이지?”

유나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답했다.

“아직 만나고 있는 단계는 아니에요.”

“집은 배현시에 있고? 직업은?”

이동건은 계속해서 물었다.

“네, 배현시 사람이에요. 그리고 직업은... 교수예요.”

교수라는 건 어쩌다 떠오른 직업이었다.

그리고 사실 다른 직업이라도 상관은 없었다. 인생 중대사를 이동건의 손에 쥐여 주어 그의 이익에 휘둘리고 싶지 않을 뿐이니까.

“의사와 교수라... 잘 어울리긴 하네.”

잘 어울린다고 얘기했지만 말투로 볼 때 인정하는 건지 아닌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도우미가 다가와 비워진 찻잔에 차를 부었다. 곧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동건의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려 유나은 쪽에서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도우미는 찻잔을 쥔 이동건의 손에 힘줄이 튀어나와 있는걸 발견했다. 그리고 마침 시선을 위로 올리는 그와 눈이 마주치더니 하마터면 손에 든 도자기 찻주전자를 떨어트릴 뻔했다.

“쯧, 칠칠치 못하긴.”

이동건이 언짢은 얼굴로 질책하자 도우미는 서둘러 뒤로 물러서며 손을 벌벌 떨었다.

이에 이연준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버지도 나이가 드시긴 드셨나 보네요. 이런 작은 일에도 성질을 다 내시고.”

이동건은 혀를 한번 차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나가봐. 너도 나가고.”

마지막 말은 유나은에게 한 것이다.

유나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이연준의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문이 닫힌 뒤 이동건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너는 나은이 쟤를 자주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저거 내가 오늘처럼 기를 눌러놓지 않으면 조만간 우리 집안에 악재를 불러올 거다.”

이연준은 뜨거운 차를 후후 불며 말했다.

“간이 콩알만 해 보이는 애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러세요.”

“그거야 모를 일이지.”

...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유나은은 메슥거림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참으려고 했지만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순간마다 울렁거려 결국 급히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부여잡고 위액을 토했다.

그렇게 시원하게 토해버리고 나서 정신을 조금 차린 뒤 몸을 일으키려는데 누군가가 티슈를 건네왔다.

“괜찮아?”

남자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유나은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빠.”

방금 토하고 난 뒤여서 그런지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오랜만이야, 나은아.”

이원우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에 유나은도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었다.

이원우는 늘 그렇듯 그녀에게 항상 웃어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는 이 집안에서 그녀를 박하게 대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이거로 닦아.”

이원우는 티슈를 그녀의 손 근처에 가져갔다.

유나은은 고맙다는 말을 전한 뒤 티슈를 건네받아 입 주위를 깨끗이 닦았다.

“그보다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보니까 많이 토하는 것 같던데.”

가뭄에 단비 같은 걱정에 유나은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위장이 안 좋아서 그래,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식습관 바꾸는 게 좋겠다. 물론 네가 의사니까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응, 그럴게.”

3년 만에 보는 거였지만 그는 외관상 큰 변화는 없어 보였다. 다만 행동거지나 말투가 3년 전보다 조금 여유가 생기고 듬직해졌다.

“너 지금 혼자 산다며?”

이원우는 나머지 티슈를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물었다.

“응, 병원 근처에 있는 집으로 구했어.”

“서정 병원이었지?”

유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정 병원은 DK 그룹 산하의 병원으로 유나은은 지금 그곳에 갇힌 거나 다름없었다.

이원우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는 서정 병원이 아닌 더 좋은 곳으로, 더 멀리 갔어야 했어. 이곳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유나은은 시선을 내리며 답했다.

“지금도 괜찮은데 뭘.”

“내 앞에서는 솔직해도 돼. 내가 너를 몰라?”

이원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편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원우, 할아버지가 너 종일 기다리고 계시는데 여기서 뭐 해?”

유나은은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렸다.

이원우는 고개를 돌려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더니 다급하게 해명했다.

“가려다가 나은이 만나서 잠깐 얘기하고 있었어요.”

유나은은 뻣뻣하게 굳은 몸을 천천히 돌렸다.

“삼촌.”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연준은 그들 쪽으로 다가오더니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방금 할아버지한테 훈계 좀 들었다고 얘한테 위로 받고 있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유나은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이연준은 다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이씨 집안에 나약한 놈은 필요 없어. 위로받으려고 하기 전에 반성부터 해.”

매정한 말에 유나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옆에 있던 이원우는 그녀가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자신 때문인 걸 알고 있어 바로 해명하려 들었다.

“삼촌, 지금 이건 삼촌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이원우.”

이연준은 싸늘한 얼굴로 그의 말을 끊었다.

“언제부터 네가 내 말에 토를 달기 시작했지?”

이에 이원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꾹 닫았다.

“언제까지 계속 할아버지 기다리시게 할 거야.”

“아, 지금 바로 갈게요.”

이원우는 이연준의 말에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가기 전 유나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은아, 괜찮으니까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내가 지금은 막 귀국해서 바쁘고 며칠 뒤에 시간 괜찮으면 나랑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이건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오빠의 마음을 담은 말이었다.

하지만 유나은은 그 말이 지금은 무척이나 불편하게 들렸고 고개도 끄덕이지 못한 채 그저 작은 소리로 ‘응.’이라고만 대답했다.

이원우가 가버린 뒤, 그녀는 옆에 있는 이연준을 바라보았다.

매번 그의 옆에 설 때면 안정감이 드는 동시에 압박감도 들었다.

“삼촌은 이 집안에서 할아버지 다음으로 발언권 있는 어른이잖아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연준은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이에 유나은이 잠깐 흠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데... 삼촌 눈에도 내가 그렇게 최악으로 보여요?”

이연준은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 정도 판단은 너 스스로 해.”

“...알겠어요.”

유나은은 그 대답을 끝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이연준이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그때 진명수가 옆으로 다가왔다.

“유나은 씨는 오늘 도련님께서 난감한 상황을 해결해주신 걸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에 이연준이 차가운 시선을 보내자 진명수는 금세 다시 입을 꾹 닫았다.

...

김준휘가 집에 하루만 더 묵고 가라고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유나은은 오늘도 서화 아파트로 돌아가지 못했다.

다만 그녀를 싫어하는 이수현이 김준휘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떼를 쓴 덕에 김준휘는 아들을 달래느라 유나은에게는 별다른 쓰지 못했다.

자기 전, 주승아는 그녀에게 맞선 날짜가 바뀌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이에 유나은은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고는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잠들었다.

다음날.

유나은은 제시간에 출근해 오전 내내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하러 가려는데 수간호사인 최미연이 다급하게 달려와 그녀를 불렀다.

“유 선생님, 지금 중환자실에 있는 양진수 씨가 집으로 돌아가시겠답니다.”

의사 가운을 벗던 손이 뚝 하고 멈췄다.

“양진수 씨라면 오늘 아침에 막 중환자실에 들어가신 분 아니에요?”

최미연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네, 맞아요. 오늘 아침 입실하셨는데 지금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시겠다고 심전도 모니터링도 다 중단해 달라고 하시네요.”

유나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병원 규정에 어긋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밖에서 하이힐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의사 선생님 계신가요?”

“양진수 환자 보호자세요.”

최미연의 말에 유나은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여자를 보더니 서서히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이 여자는...’

관련 챕터

최신 챕터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