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천도준은 미리 일을 끝냈다.저녁에 고청하와의 식사 약속이 있었다. 그에게 있어 이건 두 사람의 첫 데이트라 반드시 진지하게 임해야 했다.고청하도 그의 과거를 꺼려하지 않는데 그라고 고청하의 마음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살아있는 한 늘 새로운 시작을 경험해야 하는 법이었다.다치고 상처를 받은 다음 껍데기만 뒤집어쓴 채 움츠러들어 모든 것을 거절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첫 번째 데이트를 고청하도 몹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일찍이 모든 일을 끝낸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 매무새를 다듬었다.하지만 그녀는, 그녀가 사무실을 떠났을 때 장학명이 몰래 들어왔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심스럽게 등 뒤를 살핀 장학명은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낸 뒤 고청하의 잔을 열어 알약 두 개를 집어넣었다.이 약은 여러 바들과 클럽들을 다니며 우연히 알게 된 루트로 구매한 것이었다.이 약이 있은 뒤로 바에서 마음에 든 여자를 만났을 때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두 알 정도면 기력을 잃고 이튿날까지 의식이 희미해지기엔 충분한 양이었다.세심하게 컵을 몇 번 흔들어 약이 전부 흩어진 것을 확인한 장학명의 두 눈에 시린 한기가 번뜩였다.“고청하, 이건 날 탓할 수 없어.”말을 마친 그는 조용히 사무실을 나섰다.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고청하는 이상함을 알아채지 못했다.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조금 이르다는 생각에 컵을 들어 물을 마시며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점차 조금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너무 피곤했나?”고청하는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며 의아해했다.요 며칠간 일이 확실히 많긴 했다. 정태건설을 돕기 위해 그녀는 머리를 쥐어짜며 영일자재의모든 루트를 동원했다.하지만 조금 쉬고 나서도 그 어지러운 기분은 가시는 것이 아니라 되레 더 강렬해지기만 했다.이내 온몸이 나른해지며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청하는 휴대폰을 꺼내 천도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천도준, 나… 나 갑자기 너무 피곤해.]띠링!천도준
고청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똑똑한 편이었고 절대로 멍청한 재벌 2세가 아니었다.현재의 몸 상태는 절대로 과로로 인한 증상이 아니었다.누군가의 함정에 빠진 게 분명했다!장학명의 막무가내에 고청하는 두려움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휴대폰은 여전히 천도준과의 대화창에 머물러 있었다.그녀는 힘없이 천도준과의 영상통화 버튼을 눌럿다.천도준은 정태건설밖으로 나오고 있었다.고청하의 답장을 본 그는 조금 의아해졌다.“이 녀석이 영일자재에 있다고?”제대로 이해를 하기도 전에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통화를 연결하자 흐릿하고 흔들리는 화면이 펼쳐졌다.천도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그는 곧바로 소리를 내는 대신 미간을 찌푸린 채 맞은편의 상황을 지켜봤다.고청하는이동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이상한 자세로 말이다. 언뜻 누군가가 그녀를 부축한 채 밖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큰일이다!천도준은 머릿속이 쿵 하고 울렸다.그는 황급히 택시를 잡은 뒤 마이크를 끄고 포효하듯 기사에게 외쳤다.“어서요! 영일자재! 당장 영일자재로 가주세요!”택시 기사는 깜짝 놀라 황급히 시동을 걸었다.탁!천도준은 아예 주머니에서 20만 원 정도를 꺼내 앞 유리 쪽에 내려놓았다.“서둘러 주세요, 지금 사람 구하러 가야 한단 말이에요!”“미친!”택시 기사는 안색이 돌변하더니 악셀을 밟았고 택시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조수석에 앉은 천도준은 휴대폰을 움켜쥔 채 영상 통화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마이크를 끈 탓에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지만 상대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그는 양손이 다 덜덜 떨리며 호흡도 가빠지기 시작했다.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확실했다!그렇지 않고서야 고청하가 이런 영상통화를 걸었을 리가 없었다.그는 고청하가 왜 영일 자재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고 고청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 당장 급선무는 반드시 빠르게 고청하의 곁으로 달려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을 막아내는
다급하게 택시에서 내린 천도준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멀지 않은 곳의 주차장에 흰색의 포르쉐 911이 주차되어 있었다.고청하의 차였다!설마 늦은 건가?다른 것은 아랑곳할 겨를도 없이, 마치 한 마리의 맹수처럼 그는 시뻘게진 두 눈으로 리빙턴 호텔로 달려 들어갔다.로비에 들어서자 익숙한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청하야!”천도준이 크게 외쳤지만 엘리베이터 문은 이미 닫혀버렸고 되레 로비 내의 사람들이 그를 향해 이상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프런트로 달려간 그는 버럭 화를 냈다.“방금 저 남자랑 여자 어느 방으로 갔어요?”프론트의 여자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고객의 개인정보를 지키는 건 호텔의 의무였다.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퍽!천도준은 주먹을 들어 프런트를 쾅 하고 내리치며 이를 악물었다.“제 여자 친구가 약물에 당했어요. 만약 제 여자 친구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이 호텔, 문 닫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지금의 그는 분노에 잠식되어 다른 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게다가 이수용의 수완을 생각했을 때 리빙턴 호텔을 파산시키는 건 안 될 것도 없었다!프런트 직원은 천도준의 말에 깜짝 놀라 황급히 대답했다.“18층, 999호실 스위트 룸이요.”천도준은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갔다.다행히 프런트에서 지체한 시간이 길지 않아 그가 18층에 도착했을 때 장학명은 고청하를 부축한 채 한 방문 앞에 서 있었다.“청하를 내려놔!”천도준은 성큼성큼 달려갔다.막 문을 두드리려던 장학명은 화들짝 놀랐다. 고청하를 데리고 등을 돌린 그는 천도준을 보자 안색이 돌변했다.“천… 도준….”고청하는 이미 완전히 기력이 빠진 상태인 데다 의식마저 흐릿했다.눈 깜짝할 사이, 천도준은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주먹을 들어 장학명의 얼굴을 내리쳤다.장학명은 피하고 싶었지만, 최근 존의 지옥 훈련을 받은 천도준의 피지컬과 전투 스킬은 일반인이 저항할 수
그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지하 격투장에서 울프에게 사력을 다하지 않은 것은 전투 경험을 쌓으러 간 것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전력을 다했다.고청하는 그의 여자 친구였고, 그의 사람이었다.더욱이 그의 역린이었다!건드리면, 죽는 것이었다!천도준은 등을 돌려 굳게 닫힌 방문을 쳐다봤다. 두 눈에 담긴 분노가 점점 더 거세졌다.꽉 쥔 주먹에서는 까드득 소리가 울렸다.이건… 누군가에게 조공하려는 건가?그의 여자 친구가 장학명의 약에 당해 이 방으로 보내져 방 안에 있는 사람의 환심을 사려한다니.정말 우습기 짝이 없었다!퍽!힘을 가득 실은 발길질에 호텔 방문이 쾅 하고 열렸다.방 안에는 웅장한 곡조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커튼이 꼼꼼히 닫혀 있어 방안은 조금 어두웠다.그리고 거실 의자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양손은 숙인 채 두 손은 모아 턱을 괴고 있었다.“천태영?”빛이 부족한 상황에서 천도준은 천태영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 부분만 보고도 알아봤다.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재가 되어도 잊을 수가 없었다.“흐흐흐….”음산한 냉소가 울리며 천태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늘한 눈빛으로 천도준을 쳐다봤다.“사생아 주제에, 내 먹잇감을 빼앗으려 들어?”그 말투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향한 조롱이 담겨 있었다.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빳빳한 정장을 정리한 그는 천천히 입구로 걸어왔다.미간을 찌푸린 천도준은 방 안에 있는 사람이 천태영이라는 것에 조금 놀랐다.하지만 이 일은 고청하와 연관이 있었다.천도준은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난 고청하를 데려갈 거야.”“네가 무슨 자격으로?”천태영은 우습다는 듯 냉소를 흘렸다.“존과 며칠 전투 스킬을 훈련했다고? 웃기지 마. 사생아는 사생아일 뿐이야. 내가 널 쓰레기라고 하면 넌 쓰레기인 거야. 넌 절대로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천재를 이길 수 없어.”휙!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태영은 천도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푹!한줄기의 피가 뿌려졌다.미간을 팍 찌푸린 천도준의 두 눈에 날카로움이 가득했다.그의 왼손 팔뚝에 길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그나마 재빨리 피해서 다행이었다. 직격으로 베었다면 죽지는 않아도 한쪽 팔은 더는 쓸 수 없을 게 분명했다.천태영에게 있어 사람 목숨은 정말 별 보잘것없었다.“쯧, 난 또 얼마나 대단하다고. 여전히 쓰레기였군.”천태영은 천천히 등을 돌려 문 앞에 서서 천도준의 앞을 가로막으며 조롱했다.“후우….”천도준은 심호흡을 하며 굳은 얼굴로 천태영을 노려봤다.천태영은 별안간 다리를 들어 문턱에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사실 너에게도 선택지는 있어. 내 다리 사이를 기어가기만 하면 살려는 줄게. 하지만 저 여자는 남겨둬야 할 거야.”“그럼 끝내 누가 남게 될지 두고 보자고!”천도준의 두 눈에 안광이 번뜩이더니 별안간 의자를 들어 천태영을 향해 달려들었다.어두운 방 안에서 두 사람은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이따금씩 나이프가 의자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한 번의 실전을 경험한 뒤로 천도준은 질적인 변화가 생겼다.하지만 천태영에 비하면 그래도 차이가 있었다.이내 그는 밀리기 시작했다.몇 번이나 한기 서린 나이프가 그의 몸을 스쳤고 빠르게 반응하여 아슬아슬하게 피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피투성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푹!끝내 나이프가 천도준의 오른팔을 휙 그었다.미간을 찌푸린 그는 고통에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왼팔의 상처는 뼈가 보일 정도로 깊었고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잠깐 멈춰선 천태영은 마치 광대를 보듯 천도준을 주시했다.천도준의 변화는 확실히 큰 놀라움을 주었다.하지만 그저 놀라움뿐이었다.그는 천도준에게 자신과 맞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사생아는 사생아일 뿐이지. 아무리 대단해졌다고 해도 사생아일 뿐이야.”천태영은 음산하게 웃으며 나이프를 휘둘러 나이프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가고 싶지 않다면 여기 남겨줄게. 완전히 단념할 수 있게 말이야.”천도준은 한기 서린 얼굴로
비록 웃고는 있었지만, 말투 속에 담긴 냉기에 천태영은 주변의 온도가 한껏 낮아진 것만 같았다.천태영은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이 순간 미소를 짓고 있는 천도준을 마주하자 천태영은 드물게 강렬한 두려움이 느껴져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천태영은 확실히 천도준을 죽일 수 있었다.하지만 그는 천도준이 감히 그의 칼에 맞으면서 그에게 반격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이건 목숨으로 목숨을 바꾸는 싸움 기술이었다!“죽어, 지금 당장 죽어!”천태영은 별안간 미친 것처럼 오른손으로 나이프를 잡고 비틀기 시작했다.찌지직….소름 돋는 소리가 천도준의 가슴팍에서 울렸다.그것은 나이프에 살이 찢기는 소리였다.하지만 천도준은 전혀 손을 놓지 않았다. 왼손이 나이프에 베어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도 절대로 손을 놓지 않았다.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살기 가득한 눈으로 천태영을 노려보고 있었다.가슴속에서 피가 빠르게 흘러나오는 것을 느낀 그는 오른손도 들어 나이프를 잡은 채 가슴팍에 꽉 눌렀다.이렇게 해야만 최대한 시간을 끌 수 있었다.그래야만 고청하를 구할 수 있었다.“미친 새끼, 넌 정말 미친 새끼야! 죽어! 죽으라고!”천태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초점이 나간 채 분노에 차 포효했다.천도준의 반응에 그는 진짜로 겁을 먹었다.나이프를 천도준의 가슴팍에서 빼내고 싶었지만 천도준의 양손은 나이프를 단단히 누르고 있었다.이 미친 새끼는…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건가?이건 전혀 사생아답지 않았다!“도련님!”바로 그때, 우레와 같은 소리가 울렸다.천도준의 안색이 갑자기 풀어지더니 한시름을 놓았다는 듯 웃었다.“존… 왔어요??”그가 목숨을 내건 채 싸웠던 것은은 정말로 천태영을 이기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방금 전의 대결로 그는 강하게 대적하기만 해서는 절대로 천태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깯라았다.그리하여 나이프를 가슴에 꽂은 채 시간을 버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왜냐하면 리빙턴 호텔로 오는 길에 존에
천도준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해 그는 조금 멍해졌다.“안 죽은 건가?”옆에서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존은 드디어 한시름 놓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도련님, 나이프는 모든 급소를 피했어요. 당시엔 그저 과다출혈로 기절한 것뿐이에요. 다행히 제때에 구조되었고요.”천도준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기분 좋게 웃었다.당시에 그는 고청하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설령 천태영의 나이프에 찔려 죽게 된다고 해도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그저 시간만 끌 수 있다면, 존이 고청하를 구해줄 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했다.나이프가 모든 급소를 피한 건 정말 천운이었다.방안을 살핀 천도준의 안색이 별안간 굳었다.“여긴 어느 병원이에요?”자신이 다친 것을 어머니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큰 충격을 버틸 수 없었다.“걱정마세요, 도련님.”존이 다급히 위로했다.“어르신께서 떠나시면서 당부하셨던 터라 다른 병원으로 데려왔어요.”천도준은 크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청하는 어떻게 됐어?”당시 기절하기 전, 존이 천태영의 다리 한쪽을 부러트리는 것을 직접 봤으니 고청하가 안전해진 것은 확실했다.하지만 장학명의 약에 당했던 건 어떻게 된 건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무사합니다.”존이 말했다.“이 꼬박 하루 밤낮 동안 고청하 씨가 계속 돌보고 있었어요.”하루 밤낮?천도준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그 녀석도 참, 아무 일도 없는데 옆에서 돌보기까지 하다니. 그런 고생을 해본 적이나 있었겠어?”그는 비록 고청하의 집안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고청하는 집안이 부유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대학을 다닐 때부터 고청하는 그에게 재벌 2세라는 느낌을 주었다.그런 부잣집 아가씨에게 있어 밤낮없는 병간호라니,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것이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끼익하며 병실 문이 열렸다.고청하는 잔뜩 피곤한 얼굴로 보온병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하루 밤낮동안의 간호로 고청하는 몹시 지쳐있었다.
“그럼 넌 바보가 맞아.”고청하가 불만을 터트렸다.천도준을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고청하의 등을 토닥였다.고청하는 깜짝 놀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울어서 감정을 터트릴 수 있다면 고청하에게도 좋았다.점차 고청하의 울음소리가 멈췄다.꼬박 하루 밤낮 동안 쉬지 않았던 터라 피곤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게다가 지금 지금 큰 소리로 울고 나니 졸음이 몰려왔다.천도준은 품에 안긴 채 잠이든 고청하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작게 중얼거렸다.“바보, 평생을 나한테 걸었는데 내가 어떻게 지게 할 수 있겠어? 널 지키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은행 창구 앞, 임설아는 넋을 놓고 있었다.어젯밤에 정성 들여 꾸미고 잔뜩 기쁜 얼굴로 해선정에 도착했을 때 천도준을 만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되레 오남미와 마주치게 될 줄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두 사람이 우연이 마주쳤던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난처해졌다.약혼식이 무산된 이후로 그녀는 오남준과 만나지도 않았고 오씨 가문 사람과는 연락이 끊겼었다.오히려 남들이 보기에 당시에 벌어졌던 일은 오씨 가문 사람들의 잘못으로 보였다.그리고 그녀가 오씨 가문과 연락을 하지 않는 건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는 것이었다.하지만 오남미를 마주하자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오남미의 두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하지만 오남준 때문에 두 사람은 완전히 척을 지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앉아 어색하게 대화를 나눴었다.아무리 기다려도 천도준이 오지도 않고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를 앉아 그제서야 임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날 가지고 논 건가?”임설아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었다. 해선정에서 오남미를 만났던 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천도준만이 모든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임설아는 짜증이 극에 달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그는 오남준에게 갈아탈 생각은 했었지만 그렇다고 천도준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