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희가 살며시 눈을 깜빡였다.혹여나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박연희가 다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조은혁, 다시 한번 말해 봐.”“이걸로 진시아 목숨 바꾸면 안 돼?”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연희가 온몸의 힘을 다하여 조은혁의 뺨을 내려쳤다. 손바닥이 얼얼해지고 귀가 윙윙거리며 울릴 정도였다.사방은 고요해진 듯 서로의 숨소리만 들렸다.박연희는 하마터면 실성할 뻔했다.한참 후에야 목소리를 되찾은 박연희가 다시 천천히 말을 꺼냈다.“조은혁, 조진범은 당신 아들이야! 진시아는 하마터면 당신의 아들을 죽일 뻔했는데 지금 이걸로 진시아의 목숨을 바꾸겠다고? 물어볼게. 진시아의 목숨이 너무 가치 있는 거야 아니면 내 오빠의 목숨이 너무 가치 없는 거야?”이 세상 어느 어머니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일 것이다.떠날 때, 조은혁은 기필코 그녀에게 결과를 가져오겠다고 말했다.그러나 다시 돌아와 내놓은 것이 이런 결과라니.박연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아주 가볍게 말했다.“조은혁 씨, 저는 당신 같은 사람, 그리고 우리의 이 결혼에 대한 가망이 없어요. 밖에서 여자와 놀든, 얼마나 많은 여자를 곁에 두든 저는 상관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왜 그런 여자가 진범에게 상처를 입히도록 하고, 왜 이런 살인범을 두둔하려고 하는 거예요?”박연희의 마음은 이미 갈기갈기 찢겼고 다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조은혁은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지만 박연희는 끊임없이 뒤로 물러나며 중얼중얼 입을 열었다.“나 만지지 말아요. 조은혁 씨, 제발 나 건드리지 마.”그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한참이 지나 조은혁은 손을 놓고는 소파에 털썩 앉더니 다시금 그 서류를 집어 들고 차가운 말투로 박연희를 몰아붙였다.“당신은 나한테 그것만 알려주면 돼. 할 수 있어, 없어?”“이 짐승 같은 놈!”박연희의 목소리가 하염없이 떨렸다. 정말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조은혁을 칼로 찔러 죽이고 다시 진시아를 찔러 죽이고 싶을 지경이었다.이 순간, 그 단순한 박
박연희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 미소는 우는 것보다 더 보기 흉했다.그의 마음속에 그녀가 있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평생 들었던 말 중 가장 어이없는 우스갯소리였다.그렇게 박연희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조은혁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 ...오후에 조은서가 진범이를 보러 왔다.조은혁은 임시로 회사에 갔기 때문에 병실에는 박연희와 장씨 아주머니 둘만이 진범이를 돌보고 있었다.병이 난 진범이는 거의 모든 시간을 잠에 쏟아붓고 있었다.그리고 박연희는 얼굴이 창백하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사실 조은서는 진범이보다 박연희가 더 마음에 걸렸다.하여 조은서는 몰래 기회를 찾아 장씨 아주머니에게 조용히 물었다.장씨 아주머니는 사정을 알고서 사실대로 조은서에게 말했다.“원래 대표님은 부인에게 그 진씨 성을 가진 여자를 국에 넘겨서 십여 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번 다녀간 뒤 갑자기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아마 대표님께서 중요한 문서로 진씨 성을 가진 여자의 목숨을 바꾼 것 같아요. 결국, 그 일로 사모님은 대표님과 매우 심하게 다퉜고요.” 말을 이어가며 장씨 아주머니는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어제부터 사모님께서는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드시기 싫은 게 아니라 못 드시는 거겠죠.”조은서는 마음속으로 매우 슬펐다.그때 박연희가 작은 부엌문 앞에 나타났다.그러자 장씨 아주머니는 얼른 눈물을 닦고 자리를 비켜주었다.“전 그럼 진범 도련님을 뵈러 갈게요.”“연희 씨, 얘기 좀 해요.”박연희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10분 뒤 이들은 병원 아래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박연희의 모습은 본 조은서는 그녀가 너무 말랐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혹시 건강검진 받아보셨나요? 진범이도 중요하지만 연희 씨 자신도 자신을 잘 돌봐야죠... 내일 선우 씨더러 연희 씨가 건강검진을 받도록 준비해 달라고 말해볼게요.”그러나 박연희는 조은서의 호의
유선우가 가볍게 응했다.“알겠어. 지금 바로 안배할게.”파란불이 켜지고 차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자 유선우가 운전대를 잡고 담담하게 말했다.“돌아가서 네 오빠한테도 전해. 조은혁도 신경 좀 쓰라고 말이야. 종일 바깥에서만 돌아다니지 말고. 아무리 박연희가 박연준의 동생이라도 이미 결혼했고 진범이까지 낳았는데... 이건 영원히 끊을 수 없는 혈연이야.”남자는 남자를 가장 잘 안다.조은혁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박연희뿐이라는 것을 유선우는 잘 알고 있다.그렇지 않으면 진범이는 아마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조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죽시트에 몸을 기대어 약간 기분이 가라앉은 듯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유선우는 따뜻한 손으로 조은서의 손을 살짝 잡았지만 그의 옆모습은 여전히 진지하고 매우 신중했다... ...그날 밤, 유선우는 곧바로 박연희에게 건강검진을 받도록 안배를 해두었다.한밤중에 간호사가 와서 전표를 보냈는데 물론 조은혁도 그 자리에 있었다.“사모님의 건강검진표입니다. 우리 유선우 대표님께서 직접 준비하신 건데 모두 병원에서 최고의 의사이자 최고의 기구들이에요... 내일 아침 8시, 꼭 공복에 오시는 것을 잊지 마세요.”조은혁은 검진표를 받고는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것을 표시했다.간호사가 자리를 뜨고 그는 고개를 숙여 두툼한 건강검진표를 들여다보며 박연희를 놀리려고 애썼다.“보니까 피만 엄청 많이 뽑아야 하는데 너 주사 무서워하잖아... 내가 같이 있어 줄게.”그러나 박연희는 건강검진을 받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그녀에게도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이제 조은혁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상관없었다.하여 박연희는 거절하지 않았다.조은혁은 박연희의 모습을 바라보며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드디어 생각 정리를 마쳤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드러워진 조은혁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연희야, 우리 앞으로 잘 지내자.”그 순간, 박연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혹여나
조은혁이 호텔로 달려갔다.진시아는 항생제와 와인을 복용하는 바람에 이미 반 쇼크를 일으키고 있었고 조은혁은 즉시 그녀를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데려갔다. 의사는 그녀에게 위세척과 관장을 해주며 한밤중까지 고생한 끝에 마침내 사람을 구해냈다.날이 밝아오자 진시아는 병실에서 의식을 회복했다.주위를 둘러보니 하얀 벽이 눈에 들어왔고 옅은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리고 조은혁이 등을 돌리고 창가에 서 있었다.하룻밤이 지나 검은 머리가 단정하지 않고 약간 헝클어졌지만 오히려 야성적인 남성미를 뽐냈다.진시아의 코끝이 찡했다.“은혁 씨!”그러나 조은혁은 여전히 돌아서지 않고 바깥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다시는 자신을 괴롭히지 마. 다음에는 정말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수도 있어.”“당신은 여전히 나에게 관심이 있군요.”그때, 조은혁이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의 표정은 매우 복잡했다.진시아는 방금 의식을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불을 젖히고 달려와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아련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조은혁을 불렀다.“은혁 씨, 당신은 나에게 관심이 있다니까요. 제가 안쓰럽죠? 그 과거, 우리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앞으로 제가 당신을 잘 사랑하도록 해줘요... 명분도 바라지 않을 것이고 연희 씨를 귀찮게 하지도 않고 진범이는 더더욱 해치지 않을게요. 약속할게요. 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해줄게요.”“은혁 씨, 저에게도 기회를 줘요.”“전 은혁 씨를 사랑해요. 다른 사람을 사랑한 적도 없어요.”...“이러지 마.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어.”“아니요. 전 안 믿어요.”진시아는 그를 다시 한번 꼭 껴안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당신이 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겠어요…. 그분이 화낼 걸 알면서”그분은 박연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조은혁은 갑자기 넋을 잃더니 갑자기 박연희와 함께 건강검진을 받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떠올렸다.막 진시아를 밀어내려고 하
그러자 감정이 격해진 진시아가 곧바로 뛰어내리겠다며 난동을 부렸다.성격이 좋지 않았던 조은혁은 막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의 머리를 창가에 대고 누르며 엄한 목소리로 위협했다.“뛰어, 어디 한번 정말 뛰어봐. 그러면 외국에 갈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힐 필요도 없잖아.”진시아가 입술을 바들바들 떨더니 갑자기 조은혁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안 뛸 거예요. 안 뛴다고요. 다 당신 말 들을게요. 은혁 씨가 외국에 가라고 하면 외국에 가고 거기서 잘 살게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그냥 지금만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퇴원하면 집에 돌아가서 연희 씨와 함께하게 해줄게요.”곧이어 그녀는 그의 품속에서 심하게 울음을 터뜨렸다.“하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세상 어떤 여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사람의 품에 안기게 해줘요? 조은혁 씨, 당신은 나에게 너무 잔인해요.너무 잔인하다고요!”한 줄기 아침 햇살이 조은혁의 쓸쓸한 얼굴을 비추었다.만약 박연희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토록 위태로운 진시아를 마주하고 병든 그녀를 위해 정말 그녀와 결혼했을 것이다.사랑과는 무관하게, 단지 하나의 책임일 뿐이다.조은혁은 여러 번 거듭 생각을 마치고 진시아가 입원해있는 동안 그녀와 함께 있기로 동의했다.건강이 좋아지면 즉시 그녀를 해외로 보낼 것이다.날이 밝아오자 조은혁은 박연희의 번호를 눌렀고 6초가량 울리더니 통화가 연결되고 조금 잠긴듯한 박연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혹시 감기에 걸린 거 아니야?”조은혁의 물음에도 박연희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이번 주에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너랑 진범이 옆에 있어 줄 수 없을 것 같아... 맞다. 오전에 건강검진 꼭 잊지 말고 받아. 집안 고용인더러 함께 가달라고 하고. 응?”아무래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조은혁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졌다.박연희는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지금 진시아와 함께 있는 거죠. 이번 주 내내 그녀와 함께할 건가 봐요
장씨 아주머니가 계속하여 캐물었지만 의사는 보호자를 기다려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하여 장씨 아주머니는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 조은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연결음만이 울려대자 마음이 급해진 장씨 아주머니가 중얼거렸다.“받아라. 제발 전화 받아라.”휴대폰 벨 소리는 들었지만 마침 진시아의 치료를 돕고 있었던 터라 조금 귀찮아진 조은혁은 곧바로 전화를 받고는 장씨 아주머니에게 간단하게 한마디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지금은 일이 있으면 돌아가서 다시 얘기해요.”장씨 아주머니는 초조한 마음에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박연희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몇 개 월전, 전 이미 간암에 걸렸어요. 하와이에서 알게 된 건데 저는 치료를 받지 않았어요... 그리고 지금도 저는 치료하고 싶지 않습니다. 의사 선생님, 저한테 이제 시간이 얼마 없죠? 숨길 필요 없어요. 저는 진작에 모든 걸 각오했으니까요.”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박연희가 다시 말을 이었다.“전 그저 진범이가 걱정될 뿐이에요.”장씨 아주머니는 넋을 잃고 말았다.그 후, 그녀는 다시금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사모님, 왜 그런 바보스러운 생각을 하세요? 이런 일을 왜 대표님께 말하지 않고 저에게 말하지 않는 겁니까... 어쨌든 치료 방법을 생각해야죠. 희망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그 말에 박연희가 참담하게 웃었다.조은혁에게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은 이미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 버렸는데.진범이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그는 끝까지 그 여자의 곁을 지키고 있다.박연희가 낮은 목소리로 의사에게 부탁했다.“의사 선생님,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세요. 치료를 포기하고 존엄하게 세상을 떠나기로 했는데... 전는 온전히 가고 싶어요. 전 누군가의 참회와 허위적인 애틋한 말을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의사의 얼굴이 숙연하게 가라앉았다. 박연희의 말에 그의 마음은 오랫동안 평정할 수 없었다...나중에 조은서가 묻자 박연희는 모든 것이 괜찮다고만
그는 박연희를 안아 들고 급하게 구급차에 올라탔다.유선우는 의학을 전공했기에 박연희의 증상이 안정될 때까지 간단한 응급처치를 한 후, YS 병원의 기록실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지금 당장 박연희 환자의 병명을 알려 줘.”2분 뒤... 기록을 찾던 사람이 잠깐 멈칫하더니 곧바로 병명을 알려주었다.“대표님, 은혁 대표님 사모님께서는 간암 말기입니다.”휴대폰이 유선우의 손에서 흘러 떨어졌다.잠시 후 그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진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가벼웠다.“박연준의 행방을 알아봐 줘.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고 설령 그곳이 하늘 끝이라도 데려와... 늦지 않으면 박연희에게 간을 이식하고 이미 늦었다면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게 해줘.”유선우의 말에 진 비서는 깜짝 놀랐고 곧이어 박연희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아챘다.유선우는 박연희를 데리고 YS 병원으로 향했다.그곳에는 조은서가 먼저 와있었고 그녀는 의료진을 따라 달리면서 장씨 아주머니에게 물었다.“오빠는 연락돼요?”장씨 아주머니는 끊임없이 눈물을 훔쳤다.“아니요. 대표님 전화기는 꺼져 있습니다.”조은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박연희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데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참담하고 누렇게 변해 있었다... 마치 마지막 한 줄기의 생명조차 남지 않은 듯 말이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마주 앉아 함께 커피를 마셨다.박연희는 그녀에게 진범이를 유선우의 아들로 거두어 달라며, 유선우의 성으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게다가 유진범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며 얘기했었는데 당시에는 그녀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불치병에 걸린 것이었다.바로 그때, 박연희가 천천히 눈을 떴다.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인 조은서의 목소리가 하염없이 떨려났다.“왜 숨겼어요? 저에게 알려주셨다면 선우 씨가 어떻게든 방법을 댔을 것이고 우리가 방법을 찾았을 거예요. 연희 씨가 자유를 원한다면 저도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연희 씨, 약속해요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조은혁은 온몸이 오싹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한 달 전 간호사가 검사표를 보내온 그 날이 떠올랐다. 그날, 그는 박연희에게 말했었다.“넌 주사를 두려워하니 내가 같이 있어 줄게.”“앞으로 잘 지내자.”...하지만 그 뒤, 진시아의 심장에 약간의 문제가 생기고 그는 진시아의 곁을 지키다가 박연희에게 전화를 걸어 집안의 고용인과 함께 있으라고 통보했다.빌어먹을!다시 차에 올라타 병원으로 달려가는 그 순간, 조은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박연희는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박연희는 죽기만을 기다렸고 자신이 죽는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린 것 아닐까?길목의 빨간 신호등이 번쩍이며 급정거하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사방 여기저기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운전할 줄 몰라?”“진짜 죽어볼래?”“거지 같은 놈!”...그러나 조은혁은 듣지도 못한 듯 계속하여 가속 페달을 밟아 신호등을 무시하고 지나갔다.30분 후, YS 병원.1004병동 입구, 조은혁은 손잡이를 잡고도 차마 문을 열 수가 없었다.요 몇 년 동안 줄곧 악랄하게 일해왔던 그에게 이렇게 결정하기 어려운 순간은 정말 드물었다. 그런데 이 순간, 막상 부서진 박연희를 마주하게 되자 그는 주저앉고 말았다.두려움, 공포, 그리고 분노!병실 안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말소리는 매우 익숙한데... 아마 조은서인 것 같았다.그런데 그때, 병실 문이 그의 눈앞에서 열렸다.아니나 다를까 병실 안에 있던 사람은 조은서와 유선우였다. 그들은 마침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았고 조은혁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약간 놀라더니 이내 울먹이며 말했다.“돌아왔네.”조은혁의 시선이 곧 병상에 떨어졌다.박연희는 마치 종잇장처럼 말랐고 얇은 이불에는 거의 기복이 없었다.“그래. 돌아왔어.”박연희가 쉬고 있기에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다.조은서는 애써 자제하고 또 자제해서야 비로소 잔뜩 흥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