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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윤혜인은 환하게 웃는 한구운을 보며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일들이 떠올라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가 한구운이 병실을 나가려고 하자 윤혜인이 다급하게 그를 불러 머뭇거리며 말했다.

“구운 선배! 혹시 제 뱃속 아이는 비밀로 해줄 수 있을까요?”

소원이 뱃속에 있는 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바로 칼을 들고 이준혁에게 찾아갈 것이다. 윤혜인은 더 이상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한구운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병실 문을 닫던 순간, 침대에 누워있는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았고 그녀의 맑고 온화한 눈빛에는 왠지 모를 복잡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병실 밖에 서있던 한구운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돌아서서 떠났다.

한편, 병실 안에서.

침대 옆 서랍 위에는 조금 전에 찍은 엑스레이 보고서가 놓여 있었고 윤혜인은 그 작고 까만 점을 보며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사실 그녀는 이 아이를 지울까 생각도 해봤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환영 받지 못하는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지고 이 아이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나고 마음이 아팠다.

아이는 아무 죄가 없다!

그녀는 뱃속의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더군다나 이 아이가 이렇게 씩씩한데 그녀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갈 권리는 없기에 윤혜인은 이 아이를 낳아서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우기로 결심했다.

한참 뒤, 소원이 병원에 도착했고 이런저런 정밀 검사를 진행한 결과, 작은 찰과상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다 정상으로 나왔기에 집에 가서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원은 돌아가는 차에서 윤혜인이 병원에 실려갔는데 이준혁 그놈은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하면서 역시 남자들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청월 아파트에 도착한 윤혜인은 집 앞 음식점에서 삼계탕을 포장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집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고 요즘 도둑놈이 많다는 동네 아줌마들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는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윤혜인이 돌아서서 도망가려던 그때, 까만 그림자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갔고 화들짝 놀란 윤혜인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삼계탕을 냅다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상대방이 윤혜인의 손목을 덥석 잡았고 그녀를 꼼짝도 못하게 제압했다.

탁!

거실 불이 켜졌고 눈앞에는 잘생긴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소원이 짐승만도 못하다고 욕하던 그 남자였다.

이준혁은 윤혜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남편을 암살이라도 하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농담을 던졌지만 윤혜인은 그 말이 귀에 거슬렸고 심지어 그녀를 농락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준혁은 그녀의 손목을 놓아준 뒤, 그녀 손에 들고 있던 삼계탕을 빼앗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런 포장 음식 먹지 마. 내가 요리를 시켰어. 곧 도착할 거야.”

윤혜인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삼계탕을 보며 배도 고프고 말할 힘도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어느 한순간, 그녀는 자신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포장 음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준혁에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이런 쓰레기와 똑같을 것이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저 피곤해요. 대표님 이만 가주세요.”

쌀쌀하게 말을 하던 윤혜인은 이준혁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안방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서던 순간, 이준혁이 그녀의 팔을 덥석 잡고 살짝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조금 전 상황이 너무 긴박했어. 내가 일부러 너를 밀친 건 아니야.”

이준혁은 윤혜인을 지긋이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윤혜인의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그녀는 이 모든것이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준혁의 목소리는 늘 차갑고 다정했다. 그녀가 그 다정한 목소리에 빠져들게 한 뒤, 다시 칼로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윤혜인은 이준혁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고 그 은은한 향기속에 다른 여자의 낯선 향기도 섞여 있었다.

조금 전, 임세희의 몸에서 맡았던 향기와 같은 향기였다.

윤혜인의 머릿속에는 엉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상상되었고 순간 속이 울렁거려서 이준혁을 뿌리친 채 화장실로 달려가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속이 좀 편해진 윤혜인은 얼굴을 씻은 뒤, 화장실을 나서려고 했지만 이준혁이 화장실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는 윤혜인의 손을 잡고 살짝 실눈을 뜨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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