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의 부인?’윤선미는 약간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성혜인이 당연히 반승제의 결혼 소식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이는 업계 사람도 잘 모르는 일이었고, 안다고 해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게 태반이었다.SY그룹은 작디작은 기업에 불과했고 BH그룹과 혼인 관계를 운운할 자격이 없었다.“부인이라면 설마 그 투명 인간을 말하는 거예요?”윤선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 인간은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춘 적 없어요. 반씨 집안에서도 인정 안 하는 사람을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부인이라고 불러요?”반승제의 부인이 못생긴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공식 석상에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이니 오죽 심각했겠는가.윤선미의 말 중에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성혜인은 반씨 집안에서 하루살이보다 못한 존재였고 반태승 앞에서만 그나마 손주며느리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윤선미의 말을 듣고서도 덤덤하게 대답했다.“공식 석상에 나온 적 있든 없든, 두 분이 결혼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아요.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로 인정받는 한, 바람을 피우는 것은 도덕적 및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하죠. 안 그래요?”윤선미의 말발은 성혜인을 이기지 못했다. 계속 변명하다가는 유부남을 넘본 불륜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얼굴이 예쁘장하면 우리 형부를 꼬실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우리 형부는 제 사촌 언니를 10년 동안이나 좋아했다고요.”“반 대표님이 그 정도로 일편단심인 분은 아닌 것 같던데요.”성혜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 앞에서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럼 내가 어떤 사람 같은데?”‘뭐야? 이 사람 회의하러 간 거 아니었어?’성혜인은 약간 멈칫한 모습이었다.반승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윤선미가 들어오며 문을 닫지 않은 관계로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듣고 말았다.이 점을 인식한 성혜인은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고, 윤선미는 꼴 좋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며 반승제의 곁으로 갔다.
성혜인은 레스토랑 앞에서 완전히 얼어버렸다. 임경헌은 그녀의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창가에 앉아있는 여자분이 제 어머니예요. 진짜 무서운 분이라, 만약 제가 오늘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다 페니 씨 덕분인 거예요.”성혜인은 어쩔 줄은 몰라 일단 머리부터 숙였다. 하지만 반희월은 이미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임경헌은 몸을 흠칫 떨며 말했다.“그럼 실례할게요.”임경헌은 성혜인의 허리에 손을 올리더니 반희월을 향해 걸어갔다.반희월은 예리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훑어봤다. 임경헌은 시종일관 젠틀한 미소를 유지하며 성혜인을 챙겨줬다.“어머니, 이쪽은 제 여자친구 페니 씨에요. 직업은 실내 디자이너예요.”머릿속이 하얘진 성혜인은 한참 진정한 후에야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반희월은 그녀를 모르는 눈치였기에 한시름 놓고 임경헌을 돕기 위해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처음 뵙겠습니다, 아주머니.”성혜인은 또렷한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 덕분에 차갑고 도도한 인상을 줬다. 한눈에 봐도 임경헌이 좋아하던 오만한 아가씨와 달랐기에 반희월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가 또 아무 여자나 데리고 와서 나를 골병 얻게 할 줄 알았더니 드디어 철이 든 모양이구나.”사실 임경헌은 아무 여자나 데리고 와서 한고비를 넘기기 위해 전 전 여자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선물을 사며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뺨을 맞고 방금 전의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 그렇게 심하게 때린 건 아니었기에 지금은 아무런 자국도 보이지 않았다.“어머니, 페니 씨는 엄청 유능한 디자이너예요. 사촌 형의 네이처 빌리지도 페니 씨가 직접 디자인을 맡았다니까요. 그러니까 이젠 그만 걱정해요. 저 진짜 새사람 됐어요.”반승제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능력이 100% 보장되었기에 반희월은 보면 볼수록 성혜인이 마음에 들었다.“이건 첫 만남 선물이야.”반희월은 자신이 손목에서 팔찌 하나를 빼더니 성혜인에게 건네줬다.성혜인은 연신 손사래를 쳤다.“아니에요. 저는 따로 준비한
반승제는 서류를 보다 말고 동작을 멈추고 머리를 들었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반희월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설마 너도 몰랐던 거야?”임경헌은 사촌 형인 반승제를 무서워했기에 연애 소식을 알리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얘가 요즘 너무 바빴는지 데이트할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 네가 디자인까지 맡긴 아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참 괜찮은 것 같아. 얼굴도 예쁘장하니 인상이 참 좋아.”“혹시 페니를 말하는 거예요?”반승제는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는 페니가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반희월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래, 경헌이 데리고 온 여자 중에 이렇게 마음에 드는 아이는 처음이야. 그러니 너도 페니 양을 함부로 대하지 마. 미래에 한 가족이 될지 또 누가 알아?”반승제의 표정은 점점 식어갔다.“걱정하지 마세요.”반희월은 할 말을 끝내고 몸을 일으켰고, 반승제는 그녀를 전용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줬다.이때 반희월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발걸음을 멈췄다.“경헌이도 좋은 사람을 만났는데 너도 이제 서둘러야지. 성씨 집안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장님이 좋아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 한 번 제대로 만나보지 그래?”“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고모.”반승제의 단호한 모습에 반희월은 별말 없이 선글라스를 꼈다.“몸조심해. 위도 안 좋은 놈이 자꾸 식사를 거르지 말고.”반승제는 순순히 대답했다.“알겠어요.”반희월을 보내고 난 반승제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마침 커피를 들고 들어오던 심인우가 그의 어두운 안색을 보고 물었다.“경헌 도련님이 또 사고 쳤어요?”반승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사고까지는 아니고... 그냥 유부녀한테 빠진 모양이야.”심인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멈칫했다. 여자친구를 옷보다 자주 바꾸던 사람이 갑자기 취향이 변했으니 말이다.‘아무리 임경헌이 철없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하면 안 되지. 자기 남편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절절하게 말할 때는 언제고...’반승제는 언짢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응.”성혜인이 주저 없이 답했다. 남과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걸 꺼렸던 그녀는 말투가 아주 차가웠다. 하지만 성혜원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성씨 저택 안으로 들어온 성혜인은 성혜원만 바래다주고 바로 돌아가려 했는데 꽃에 물 주고 있던 성휘와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성한도 그와 함께 있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고, 성혜원은 이미 차에서 내려 쪼르르 달려갔다.“아빠! 오빠!”성한과 회사 얘기를 주고받던 성휘는 성혜인의 차를 보고 동작을 멈췄다. 성혜인은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와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성휘는 물 주는 일을 도우미에게 맡기고 바로 마중했다.“그래그래, 왔으면 됐다. 네 이모가 오늘 저녁 식사에 엄청 신경 썼어. 들어와서 밥이나 먹고 가라. 나도 마침 할 말이 있고.”성혜인은 아직 반승제를 만나러 가야 했기에 집 안에 들어가 앉을 시간이 없었다.“아빠, 저 아직 할 일 있어요. 저녁에 다시 얘기해요.”성휘가 흐뭇한 표정으로 성한의 어깨를 토닥이는 것을 보고 성혜인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성휘는 성혜인의 말을 듣는 체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한이가 제대로 된 직장이 없어서 네 이모가 인턴이라도 하라고 우리 회사에 보냈다. 보고하는 모습을 보니 신경 쓴 티가 나네. 참 잘 됐지?”성휘의 질문에 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윤이 자신의 아들을 회사로 보낸 의도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혜인아, 너도 오래간만에 돌아왔는데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한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어른 같이 말했다. 그리고 시선은 처음부터 성혜인의 몸매에 고정되었다.성한과 성혜인은 성휘의 곁에 서서 다정하게 얘기를 주고받았다. 분명 세 사람 다 코 앞에 서 있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졌다.성혜인은 말 못 할 공허함에 휩싸여 또다시 말했다.“아빠, 저 진짜 할 일이 있어요.”이 말을 들은 성휘는 표정이 점점 굳어
성혜인은 무거운 마음으로 차에 올라탔다. 반씨 저택에 도착하고 나자, 시간은 어느덧 20분이나 흘렀다.문을 열러 온 도우미는 성혜인을 보자마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성혜인 씨, 왜 또 왔어요? 사모님 오늘 안 계세요.”집 안에는 청소하고 있는 도우미 외에 아무도 없었다. 반승제가 집에 있는지 물으려고 하자 도우미는 이미 몸을 돌려 떠나버렸다. 백연서가 성혜인을 대하던 태도를 따라 배운 도우미는 그녀가 조만간 버림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누구 왔어요?”정원 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새로온 도우미예요? 이렇게 젊은 분일 줄은 몰랐네요.”소녀는 악의 없이 단순하게 물었다. 도우미는 피식 비웃으며 얕보는 눈빛을 보내왔다. 하지만 성혜인은 화내기는커녕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요. 만약 도우미라면 직업복을 입었겠죠. 저는 반 대표님을 만나러 왔어요.”성혜인의 당당한 태도에 소녀는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닫고 바로 사과했다.“죄송해요. 제 사촌 오빠를 만나러 왔다고요? 근데 오빠는 반 시간 전에 나갔는데...”‘사촌 오빠?’성혜인은 반승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알려줘서 고마워요.”성혜인은 진짜 볼 일이 있는 모양이었고, 더구나 자신이 오해한 게 미안했던 반승혜는 한 마디 더 보탰다.“아마 회사로 가서 회의하고 있을 거예요. 아까는 겨우 시간을 내서 돌아온 모양이던데요?”반승혜는 또 도우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대접해야지 왜 가만히 서 있어요?”도우미가 입술을 깨물며 반박하려 할 때, 성혜인이 말했다.“괜찮아요.”성혜인이 자신을 탓하지 않는 것을 보며 도우미는 한시름 놓으며 말했다.“보세요, 괜찮다고 하잖아요.”“뭐요?”반승혜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당신 해고예요.”도우미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반씨 저택의 월급이 아주 높았기에 그녀는 해고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성혜인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반승혜의 천진난만함은 주변 사람도 기분 좋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평소 억지 부리기 고수만 만나왔던 성혜인은 오래간만에 마음 편히 타인을 마주했다.성혜인이 자신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을 보고 반승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녀는 별로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이때 성혜인은 붓을 들고 그림에 쓱쓱 몇 번 칠했다. 칙칙하던 그림에 순간 생기가 돌자 반승혜는 믿기 어려운 듯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지금 그냥 색채만 바꾼 거죠? 그림이 완전히 확 살아났어요. 혹시 순수 미술을 매운 적 있어요?”반승혜는 전문가의 손길을 바로 알아차렸고, 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붓을 내려놓았다.“승혜 씨는 기초가 아주 좋아요. 이제 색감만 조금 신경 쓰면 될 것 같아요.”반승혜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덕분에 자신감이 확 생겼어요. 사실 저 이 그림으로 공모전에 나가려고 했거든요. 지도 교수님이 무언가 부족하다고 해서 오빠한테 물어보려고 했더니... 얼굴도 모르는 형수 때문에 다 망쳤어요.”반승혜는 투덜거리다가 반짝이는 눈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정말 고마워요. 이름이 페니 씨죠? 페니 씨는 어디 살아요? 저 이제 놀러 가도 돼요?”성혜인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도 반승혜가 좋기는 했지만 반씨 집안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았다.“죄송하지만 제 집은 좀...”단순한 반승혜는 성혜인의 말에 담긴 거절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껏 살아오며 단 한 번도 거절당한 적 없기 때문이다.“그럼 우리 라인 추가할까요?”성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일할 때 쓰는 라인 계정으로 반승혜와 친구 추가를 했다. 반승혜는 신이 나서 물감을 만지기 시작했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줄래요? 덕분에 영감이 떠올라서 까먹기 전에 그림을 만져놔야겠어요.”성혜인은 그녀의 말대로 곁에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쉴 새 없이 주절거렸다.“이 화실은 원래 오빠 거였어요. 예전에 이곳에서 책 읽기를
성혜인은 한지은이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와서 앉았다.한지은은 여전히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만약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졌다면 지금 주목받는 사람은 성혜인이 아닌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반승제도 동창인 양한겸을 봐서 계약한 것이지 성혜인과는 상관없기도 하고 말이다.한지은은 성혜인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하필이면 회사에서 성혜인의 당당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나자 그녀는 열불이 터질 것만 같았다.“반승제 씨랑 계약 하나 했다고 기고만장한 것 같은데 반승제 씨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 제원을 떠들썩하게 한 소식을 설마 아직도 모르는 건 아니죠? 네이처 빌리지는 두 사람의 신혼집이라고요.”실내 디자인을 하다 보면 상류사회를 접할 기회가 아주 많은데 디자인을 핑계 삼아 부잣집 부부 사이에 개입해 불륜을 저지르는 일도 아주 많았다.용모가 출중한 한지은은 비슷한 루트로 빠르게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양한겸이 바로 첫 번째 목표였다. 비록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기는 했지만...아무튼 한지은은 오래전부터 반승제의 네이처 빌리지를 노리고 있었다. 그녀는 양한겸에게 여러 차례 사정했고, 심지어 생일날 밥을 사주기도 했다. 하지만 양한겸은 시종일관 반승제와 잘 아는 사이가 아니니, 실력으로 쟁취하라고만 했다.만약 진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성혜인은 또 어떻게 기회를 얻었겠는가. 양한겸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반승제까지 잃은 한지은은 더러운 짓을 하고도 깨끗한 척하는 성혜인의 모습이 너무 구역질 났다.이런 얘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던 성혜인은 머리를 들며 물었다.“지은 씨, 지금 저한테 말하는 거예요?”한지은이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흥, 반승제 씨랑 계약한 사람이 혜인 씨 말고 누가 있겠어요?”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기는 하죠.”성혜인의 시큰둥한 대답에 한지은은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지금 자랑
한지은은 약간 겁나기 시작했다. 비록 그녀의 아우성으로 나온 제안이기는 하지만 그녀 자신도 받아들이기 꺼려졌다. 그녀는 사무실의 다른 직원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은 전부 눈을 피하기에 바빴다. 아무도 그녀가 실수로 만든 판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난감한 상황에 한지은은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평소 성혜인의 뒷담화를 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모르는 척 머리를 숙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혜인을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바보같이 총대를 멘 자신 때문도 있었다.한지은은 손톱이 살에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이건 불공평해요. 반승제 씨랑 그만큼 만났으면 좋아하는 스타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우리가 무슨 수로 혜인 씨를 이기겠어요?”한지은은 완벽한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어쩔 수 없이 도박을 받아들였다가 진다고 해도 이 핑계를 사용할 수 있었다. 떳떳하지 못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성혜인이지 그녀가 아니었다.성혜인은 천천히 머리를 들며 말했다.“도전할 용기가 없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핑곗거리를 찾는다고 해서 이미 사라진 체면이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요?”성혜인의 말투는 아주 덤덤했고 날카로운 목소리의 한지은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말문이 막힌 한지은은 가만히 서서 속으로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이 년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저격하는데! 반승제도 눈이 잘못된 거 아니야? 디자인을 배운 적도 없는 사람한테 무슨 생각으로 별장을 맡겨!’한지은도 속으로 생각할 뿐이지 입 밖으로 낼 용기는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지금 이대로 꼬리를 내린다면 그녀는 출근할 면목도 없었다.한지은은 만약 반승제가 자신의 외모와 몸매를 보게 된다면 분명 생각을 바꿀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희망을 품고 도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누가 안 한대요? 하지만 도전하기 전에 저도 반승제 씨를 만나야겠어요.”성혜인은 이해가 안 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한지은이 이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