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윤은 살아생전 자기가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두 남자의 지켜보는 가운데 권하윤은 할 수 없이 뻣뻣한 자세로 정수기 옆으로 걸어갔다.하지만 허리를 숙이는 순간 그중 한 줄기 시선이 뜨거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물 흐르는 소리가 멎자 권하윤은 물을 받은 컵을 들고 조심스럽게 민도준의 앞으로 다가갔다.“물드세요.”하지만 민도준은 의자에 느긋하게 기댄 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권하윤은 할 수 없이 허리를 숙여 물을 그의 앞까지 대령했다.민승현의 시선은 권하윤에게 가려져 두 사람의 상황을 볼 수 없어 그저 초조해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머릿속에는 온통 권하윤이 넘어졌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하지만 권하윤은 그를 도울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때문에 컵을 받쳐 들고 물이 쏟아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그녀의 몸이 민도준 위에 엎드릴 정도로 숙여졌을 때에야 민도준은 손을 뻗었다. 하지만 물컵에 거의 닿으려던 순간 손을 다시 뒤로 뺐다.“아!”권하윤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놀라 몸을 흠칫 떨었고 그 바람에 컵이 기울더니 민도준 몸에 물이 쏟아졌다.남자의 가슴팍을 흥건히 적신 물자국을 보자 권하윤은 순간 얼어붙었다.엄연히 말하면 이 상황은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다. 만약 민도준이 갑자기 손을 뒤로 빼지만 않았다면 그녀가 놀라 물을 쏟는 일도 없었으니까.하지만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민승현은 기뻐서 하마터면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그는 다급히 앞으로 달려가 권하윤에게 화내는 듯 그녀를 꾸짖었다.“권하윤! 넌 어쩜 할 줄 아는 게 없어? 형 옷 다 젖었잖아. 얼른 화장실 가서 건조기로 말려 줘.”그는 마침 전에 미리 연습이라도 해놓은 듯 자연스럽게 대사를 쳤다.민도준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재밌는 듯 상황을 지켜봤다.그리고 권하윤이 속으로 민도준이 당연히 거절할 거라고 확신하던 그때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입을 열었다.“뭐, 그러면 부탁해 제수씨.”민도준의 승낙을 받자 민승현은 흥분을 주체할 수
온기가 느껴지는 민도준의 옷을 받아 든 권하윤은 상반신을 노출한 그를 보는 순간 분위기가 점차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었다.갑자기 분위기가 닳아 오르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민도준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내내 고개를 숙인 채 건조기로 그의 옷을 말렸다.“웅웅”거리는 바람 소리는 마침 그녀를 도와 어느 정도 민도준을 속일 수 있었다.현학적인 설이 있는데 사람은 제3의 눈이 있어 시각적으로 감지할 수 없는 자기장 같은 걸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미치 지금처럼. 권하윤은 분명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여전히 등 뒤의 남자가 자기한테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등 뒤에 전해지더니 천천히 그녀를 감싸안았다.권하윤은 살짝 버둥거리며 낮게 경고했다.“그만해요. 저 옷 말리고 있잖아요.”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은 더욱 힘 있어졌고 웅웅 거리는 건조기 소리를 뚫고 남자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정확히 그녀의 귀에 꽂혔다.“말릴 거 계속 말려. 나는 내가 할 거 할 테니까.”“…….”그 시각, 화장실 밖.민승현은 부들부들 떨며 금고의 문을 햔해 손을 뻗었다.전에 민도준이 금고를 열 때 훔쳐본 적 있어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너무 김장한 탓인지 여러 번 실패 후 겨우 정확한 숫자를 입력했다.민승현은 문을 열면서도 계속 화장실 방향을 주시했다.블랙썬의 화장실은 방음이 너무 잘되어 안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저 계속 들려오는 건조기 바람 소리로 두 사람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걸 판단했다.손을 뻗어 입찰서를 가지려는 순간 그의 손은 이미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입찰서가 더러워져 민도준이 나중에 발견하기라도 할까 봐 그는 바지에 손을 몇 번 문지른 후에야 서류에 손을 댔다.하지만 안에 놓인 입찰서는 고작 하나뿐이었다.그 사실이 민승현은 믿기지 않았다. 입찰을 한 번만 진행하는데 고작 입찰서가 한 장 장뿐이라니 말이 안 됐다.보통 소규모 프로젝트도 약 2, 3 차 심사
권하윤의 눈동자는 심하게 움츠러들더니 민도준을 마치 미친놈 보듯 바라봤다.역시나 말이 너무 지나쳤는지 민승현도 이상한 낌새를 차렸다.그는 권하윤과 민도준을 번갈아 보면서 의심을 키웠고 그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권하윤은 바로 눈치챘다.하지만 이런 상황을 뭐라 설명할 수도 없었다. 설명할수록 오히려 사실이 되어 버리니까.권하윤은 오히려 담담한 태도로 여상스럽게 말했다.“고마워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그리고 자연스럽게 민승현의 팔짱을 꼈다.민승현도 그제야 지금 떠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녀와 함께 민도준에게 작별을 고했다.하지만 블랙썬을 나오는 순간 그는 권하윤의 손을 뿌리쳤다.“씨발, 너 아까 형이랑 화장실에서 뭐 했어?”“네가 계획한 일이잖아. 그런데 그걸 나한테 물어?”권하윤은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되물었다.그 말에 순간 말문이 막힌 민승현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난 너더러 형 시선을 딴 데로 돌리게 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그 안에서 형이랑 무슨 짓을 했는지 누가 알아! 그런 적 없다고 하지 마! 그런 짓 안 했으면 형이 왜 그런 말 했겠어!”“응?”권하윤의 맑은 두 눈은 서늘함을 띠고 있었다.“네 말은 지금 내가 너를 도와 도둑질을 도운 것도 모자라 네 형 꼬시기까지 했다는 거야? 내가 뭐 죽고 싶어 환장한 줄 알아?”“어…….”민승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어불성설이었다.민도준의 눈에 뵈는 게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를 꼬시려고 한다면 절벽에서 줄타기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민승현의 화는 곧바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 권하윤에게 따져 물었다.“정말 아니야?”“네 형한테 물 쏟고 일부러 시간 끄느라 나 이미 충분히 힘들어. 더 이상 성명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네 마음대로 생각해.”권하윤은 민승현에게 의심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는 속으로 안도
순간 차 안은 조용해졌다.놀라서 말문이 막힌 민상철과 마찬가지로 옆에서 듣고 있던 권하윤도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공씨 가문…… 민도준이 공씨 가문과 손잡으려 한다니.’이렇게 큰 사업건을 추진하려면 반드시 실권을 가진 자들끼리 서로 얘기를 나워야 했다. 그렇다는 건 그 사람이 경성에 올 거라는 뜻이었다.권하윤은 목구멍에서 전해지는 떫음을 간신히 삼키고 숨을 죽인 채 민상철의 답을 기다렸다.처음에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한참을 소리 없던 전화기에서 갑자기 낮은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이 못된 놈!”만약 경성에서 입찰 상대를 찾는다면 그가 되돌릴 여지가 있지만 상대는 하필 공씨 가문이었다.공씨 가문의 본거지는 해원이 있기에 그의 영향력으로는 해원까지 닿기 역부족이었다.게다가 공씨 가문이 해원에서의 지위는 민씨 가문이 경성에서의 지위와 맞먹기에 가장 어려운 상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민도준이 공씨 가문을 선택한 순간 그에게는 되돌릴 기회조차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이 은혜도 모르는 자식! 가족도 나 몰라라 하다니!’민승현은 할아버지의 욕지거리가 들릴 때부터 겁을 먹고 전전긍긍하다가 겨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저 다음에 뭘 할까요?”“네가? 네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네?”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민승현의 물음에 민상철은 차갑게 웃었다.“네가 정말 네 둘째 형을 속였다고 생각해?”“그런데 형이 아무 말도 안 했어요.”“그 자식은 무서울 게 없는데 당연히 아무 말도 안 하지!”민승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리고 여기까지 들은 권하윤은 그제야 민도준이 아까 전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왜 민승현이 민상철의 명령으로 입찰 소식을 캐고 다닌다는 걸 듣고도 그가 신경 쓰지 않았는지 말이다.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알든 말든 그한테는 상관없는 일이니까.공씨 가문과 파트너 관계를 맺는다는 걸 민상철이 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어쩌면 그는 일부러 이 소식
마 전만 하더라도 내가 돈 빌려달라고 할 때 두말 없이 빌려줬잖아. 그거 네가 한 일 맞잖아.”민승현은 팔짱을 끼더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권하윤을 바라봤다.하지만 권하윤의 웃음기는 이내 얼굴에서 사라졌다.그때 그녀가 돈을 쉽게 내어준 원인은 얼마를 주든 결국 그 돈이 다시 자기 주머니로 돌아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권하윤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득의양양해하는 민승현의 표정을 볼 수밖에 없었다.그러자 그는 곧이어 또 말을 이었다.“그리고 오늘도 그래. 둘째 형 건드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면서 형한테 물을 끼얹었잖아. 그거 나 때문 아니야?”‘분명 민도준 때문에 실수로 쏟은 건데 이건 또 왜 내가 위험을 무릎 쓰고 너 도와준 게 되는데?’이번에도 권하윤은 침묵을 유지했다.하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자 민승현은 더욱 자신만만해서 콧방귀를 뀌었다.“네가 민정 때문에 나한테 삐진 거 알아. 그런데 내가 말했잖아. 민정은 그냥 가족이야, 그러니 네가 받아들여야 해.”그리고 마치 은혜를 베풀기라도 하는 듯 입을 열었다.“네가 말 잘 듣고 민정이 괴롭히지 않으면 내가 잘해줄게.”권하윤은 어안이 버벙하여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게다가 민승현이 이렇게 정상적인 말투로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인다는 게 그녀로써는 이해되지 않았다.하지만 더 이상 그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다 말했지? 그럼 나 갈게.”“거기 서!”실랑이를 벌이던 중 가뜩이나 짜증이 난 권하윤은 참지 못하고 버럭 화냈다.“너 그만 좀 해! 병 있으면 병원 가고 발정 났으면 강민정 찾아가. 내 앞에서 얼쩡대지 말고!”점차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지거리가 나왔지만 민승현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하기라도 한 듯 대꾸하지도 않더니 그녀 목덜미에 나 있는 붉은 자국을 가리키며 버럭 소리쳤다.“이건 뭐야!”‘헉, 이걸 까먹고 있었다니.’아뿔싸라는 생각이 들자 권하윤의 몸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가슴이 차가워지자 권하윤은 2초간 멍하니 있다가 자신의 앞자락을 확 잡아당겼다.“민승현, 정도껏 해.”하지만 민승현은 마치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붉게 충혈된 눈으로 권하윤을 노려봤다.그도 그럴 것이 풀어헤쳐진 앞자락 때문에 핑크색 속옷 주위에 나있는 빨간 손자국이 고스란이 공기 속에 드러났기 때문이었다.순간 민승현의 이성은 불에 활활 타버렸다.손자국의 색깔만 보더라도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격렬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심지어 민승현의 눈앞에는 권하윤이 다른 남자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환영이 나타났다.이 모든 건 남자의 존엄과 자존심에 대한 도전이었다.버금 거리는 권하윤의 입술이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민승현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탐스러운 입술을 보는 순간 민승현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오늘 반드시 이 주제도 모르는 년을 제대로 혼내줘야겠다는 생각.그는 거의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권하윤에게 달려들었고 그녀가 버둥대며 거절하는 데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그녀를 자기 아래에 눌렀다.“내가 오늘 너 꼭 죽여버릴 거야!”“민승현! 이거 놔!”차 앞줄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어 발로 걷어차지 않으면 몸으로 부딛힐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몇 번 거치고 나니 민승현도 경계심이 생겼는지 쉽게 당하지 않았다. 민승현이 자신의 옷을 찢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된 권하윤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점차 나타났다.민승현이 물론 명목상으로는 그녀의 약혼남이긴 하지만 그가 강민정과 바람을 피운 뒤로 그녀는 민승현과 스킨십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남녀 사이의 힘의 차이 때문에 권하윤의 몸부림은 점점 무기력해졌다.그리고 그녀가 오늘은 도망칠 수 없나라고 생각할 때 마침 차창 밖에서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다.“똑똑-”“승현아, 안에 있어?”차창밖에는 민지훈이 미소를 지은 채 서있었다. 그의 표정에 약간의 어색함이 섞여 있다는 것도 쉽게 알 수 있었
차에서 내린 권하윤은 고개를 숙인 채 되도록이면 민도준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때.“도준 형.”민승현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텅 빈 주차장에서 더욱 잔잔하게 들렸다.민도준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낀 채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민승현을 바라봤다.“승현아, 제수씨 데려다주고 다시 일하러 온다고 하지 않았어? 왜 게으름 피우고 그래?”역시나 아직 너무 어린 탓인지 민승현은 땡땡이를 걸리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그, 그게 권하윤이 글쎄 배가 고프다며 나더러 밥 먹으러 같이 가자고 하는 바람에.”민도준의 시선은 당연하다는 듯 권하윤에게로 돌려졌다.“그래? 제수씨?”권하윤은 뭐라 말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권하윤을 바라보는 민도준의 눈에 의심이 가득 담겨있다는 걸 민승현도 눈치챘다. 심지어 자기를 바라볼 때보다도 더욱 의심하고 있다는 것마저.하지만 세 사람의 분위기가 점차 이상해지자 민지운은 할 수없이 그 사이에 끼어들며 분위기를 풀었다.“주차장 공기가 탁한 것 같은데 우리 올라가서 얘기해.”그렇게 서로 다른 꿍꿍이를 품은 네 명은 차례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그들 중 유일하게 여유만만해 보이는 민도준이 맨 앞에서 걸어가 엘리베이터 안쪽에 서자 민지훈이 그 뒤를 따라 그의 옆에 섰고 권하윤과 민승현은 나중에 오라 타 두 사람 앞에 자리 잡았다.뒤의 상황이 보이지 않고 그저 심문을 받는 듯한 시선이 느껴지자 권하윤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눈은 그저 점점 올라가는 숫자만 쳐다보며 올라가는 속도가 더 빨라졌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권하윤은 도망치 듯 밖으로 빠져나갔다.하지만 룸으로 들어갈 때 마침내 냉정을 되찾았다.현재 어떤 위기가 닥쳤는지 권하윤은 그제야 깨달았다.민씨 가문에서 나고 자란 민승현이 이제 그녀가 자기를 배신했다는 걸 알았기에 당연히 그녀를 약혼녀로 받아들일 리 없다.하지만 그가 파혼을 하는 순간 권씨 집안에서
민도준의 칭찬을 듣자 권희연의 얼굴에는 희색이 돌았다. 이윽고 목소리마저 더욱 부드러워졌다.“고마워요.”하지만 그때 옆에서 괴상야릇한 음성이 들려왔다.“권씨 집안 사람인데 사람 시중드는 건 당연히 잘할 거 아니에요.”여실히 드러낸 민승현의 경멸에 찬 눈빛에 권희연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다.“이런 건 저도 잘해요. 제 접시에 있는 음식은 권희연 씨가 드세요.”민지훈은 미소 지으며 이미 썰어 둔 음식을 권희연에게 넘겼다.그제야 권희연은 표정을 살짝 풀며 고마운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민지훈 씨.”“우리 나이도 미슷한데 성은 붙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요.”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가자 그제야 분위기는 다시 살아났다.하지만 민승현은 누구에게 화가 났는지 접시에 담긴 음식을 마구이로 잘게 썰어놓고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권하윤은 그가 권씨 집안을 들먹이면서 그녀를 모욕하려던 것이 실패해 화내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민지훈이 분위기 메이커 역을 자초한 덕에 식사 분위기는 어색해지지 않았다.게다가 식사 내내 권희연은 민도준의 옆에서 이것저것 시중을 들었고 민도준도 지난번처럼 그녀를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라 그나마 체면을 세워주었다.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권하윤과는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그 때문에 처음에는 가벼웠던 권하윤의 마음은 점차 이상해졌다.‘설마 정말로 입맛을 바꾸고 싶은 건가? 하긴, 나랑 관계를 오래 유지해 왔으니 질릴 때도 됐겠지.’권희연은 물처럼 부드러운 성격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속삭일 때 목소리는 여자인 그녀가 들어도 뼈가 나른해질 지경이다.그러니 민도준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마지막으로 디저트까지 먹고 나자 무미건조했던 점심 식사도 겨우 끝났다.하지만 민도준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그 누구도 먼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가자고.”민도준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권희연만 계속 우물쭈물거리며 망설였다.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