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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설영준, 나 괴롭히지 마!

한참 후 그녀가 생각했던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송재이는 눈을 감고 있어서 설영준이 얼마나 사람을 질식시켜버릴 것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봤는지 전혀 모른다.

그는 송재이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더니 ‘됐어’라는 말만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송재이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송재이는 잠시 뒤에야 눈을 떴다.

“얼굴에 속눈썹 묻어서.”

설영준이 말했다.

“떼어냈어.”

그는 여전히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마치 좀전의 야릇한 제스처와 그윽한 눈빛은 그녀만의 착각인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화나서 얼굴이 또다시 빨개졌다!

다만 그녀는 화를 낼 수가 없다.

여기서 발끈하면 본인이 뭘 기대했는지, 얼마나 엉큼한 상상을 했는지 인정하는 셈이 되니까.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속으로 쉴 새 없이 되뇌었다.

‘우린 이미 헤어졌어. 설영준은 지금 여자가 생겼다고. 한 인간으로서 딴 여자의 약혼자에게 망상을 품을 순 없어! 그건 너무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야!’

...

송재이의 생각이 점점 더 골로 갔다.

잠시 후 뒤에서 울리는 경적에 설영준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웃음기를 거두었다.

방금 그녀를 놀리며 반응을 지켜보았는데 이렇게 깨고소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장난은 장난에 불과하다.

설영준은 별안간 웃음기를 싹 거두고 아예 차 방향을 틀었다.

송재이는 반응이 느려 잠시 넋 놓고 있다가 물었다.

“어디 가?”

그녀는 지금 일부러 설영준을 피하려고 하지만 설영준은 아예 그런 생각이 없는 듯싶다.

송재이는 제발 좀 남자로서 책임감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주현아를 위해서라도 자꾸만 전 애인인 그녀와 엮이는 건 그릇된 일이라고 강조하고 싶었다.

“어디 가는데? 나 안 가.”

송재이의 반항은 그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설영준은 여전히 그녀의 집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송재이는 이렇게 일방적인 설영준이 너무 싫다.

이제 막 버럭 화내려 할 때 설영준이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백화점 가서 선물 골라줘. 여자한테 줄 건데 뭐가 좋은지 모르겠어.”

‘약혼녀에게 주려고? 주현아에게 줄 선물을 지금 나더러 고르라는 거야?’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든 송재이는 들끓었던 울화가 한순간 더 격하게 치밀어올랐다!

그녀는 설영준과 싸우기 싫지만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설영준, 나 괴롭히지 마! 너무 한다는 생각 안 들어?”

벌써 두 번째로 그에게 발끈하는 송재이였다.

한편 설영준은 차분함을 잊지 않았다. 그녀의 발악은 깃털로 간지럽히듯 별 효과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담담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왜?”

“너!”

“50대 여자야.”

설영준이 말을 이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건데?”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는데 나쁜 놈이 따로 없었다.

송재이는 지금 이 남자에게 놀아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높은 자리에서 그녀의 기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그녀의 감정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별 후 재회할 때마다 송재이에겐 지옥 같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깊이 사랑해서 제 마음을 공제할 수가 없고 그처럼 차분하고 여유 넘치게 나올 수도 없다.

설영준은 참 못됐고 너무 무심하여 고양이 놀리듯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장난치고 있다.

어떻게 이 세상에 이토록 나쁜 인간이 다 있지?

송재이는 입술을 꼭 깨물고 울화가 치밀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뒤로 설영준은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오늘 설도영의 일로 송재이는 휴가를 내고 밴드에서 나왔다.

병원에서 나온 뒤로 집에 돌아가려 했는데 설영준에게 끌려 한사코 백화점으로 왔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설영준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로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멋진 포스로 걸어가다가 가끔 고개 돌려 그녀를 바라보기도 했는데 미간을 구기고 왜 이렇게 느리냐고 눈빛으로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송재이는 그를 향해 손짓했다.

“먼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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