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돋친 한현진의 말은 듣기 거북했다. 중고를 쓰는 여자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중고는 더 말한 것도 없이 불만을 표현했다. “누가 중고라는 거예요?”한현진이 멈칫하더니 말했다. “당연히 강한서 씨를 말한 건 아니죠.”강한서의 마음이 조금 수그러질 때쯤 뒤이은 한현진의 말이 들려왔다. “손을 한 번 거치면 중고잖아요. 두 번 거치면 중중고죠. 강한서 씨는 이미 한 번 거치셨잖아요.”“...”“현진 씨, 저와 한서 오빠는 현진 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그런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요?”한현진이 송가람의 말을 잘랐다. “얘기해 봐요.”송가람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전... 전 그저 한서 오빠가 빨리 나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에요. 다른 건 바라지 않아요.”“이상하네요. 가람 언니가 있으면 강한서 씨가 빨리 낫나요? 가람 언니가 의사예요 아니면 강한서의 몸을 지배할 수 있는 묘약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예요?”말문이 막힌 송가람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한참 동안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송가람은 안 그래도 얼굴이 울상이라 억울한 표정을 짓자 한결 더 가여워 보였다. 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걸 보니 총알이라도 장전하고 온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가람 언니가 강한서 씨를 구했기 때문에 계속 봐주고 있는 건데요.”말하더니 한현진은 강한서의 귓가에 다가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한서, 네가 날 기억하든 아니든, 네가 송가람을 보호하려고 할 때마다 난 송가람을 디뎌 버릴 거야. 네가 감히 송가람과 만나기라도 하는 날엔, 네 대를 끊어버릴 줄 알아.”한현진은 제법 나긋한 모습으로 말을 꺼냈지만 그녀가 내뱉은 말은 강한서의 아랫도리를 서늘하게 했다. 한현진이 진씨를 따라 멀어질 때까지도 강한서는 멍해 있었다. “한서 오빠, 물 마실래요?”송가람이 강한서를 부르고 딸랑 종소리가 울려서야 그는
정인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괜찮단다.”“정말 괜찮으세요? 전에 한서가 실종되었을 때 사람도 만나시지 않으시고 아저씨는 할머니께서 병상에서 내려오시지도 못한다고 하셨거든요. 정말 그러셨어요?”정인월이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현진아,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잖니?”한현진의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인제 보니 정말 그녀가 예상했던 것처럼 당시 정인월은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강단해의 뜻이었는지 아니면 강단해와 신미정이 함께 도모한 작품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현진이 뭔가 얘기를 꺼내려는데 정인월이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정인월은 위생 장갑을 끼며 얘기했다. “올 때 한서 보러 안 갔어?”강한서 얘기가 나오자 자연스레 송가람과 함께 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 한현진은 짜증이 치밀었다. “같이 있어 줄 사람이 곁에 있는데 제가 왜요? 절 화나게 하는 짜증 나는 얘기 들으러 가겠어요?”정인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서가 돌아오고 나서 많은 일을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격도 꽤 변했더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한현진이 멈칫했다. 그녀가 떠보기도 전에 정인월이 먼저 얘기를 꺼내 더 이상 뭘 물어볼 수도 없게 만들었다. 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할머니, 죄송해요.”정인월이 고개를 들어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한현진이 말을 이었다. “전부터 계속 죄송하다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때 제가 강한서를 꽉 잡지 못했어요. 만약 제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면 한서가 손을 놓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고가 일어난 뒤, 사실 할머니를 뵐 낯이 없었는데, 강한서가 돌아와서 너무... 너무 다행이에요.”잠시 침묵하던 정인월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마음에 응어리가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이 할미는 널 원망할 자격이 없단다. 넌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어. 한서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정인월이 멈칫하더니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한현진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고 표정은 얼어붙었다. “그럼 가렴. 현진이도 같이 데려가. 현진이도 방금 준이 본지 오래됐다고 얘기했었거든.”한현진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정인월을 쳐다보았다. 정인월은 기회를 잡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인월의 말에 강한서는 멈칫하더니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 같이 가요.”“...”‘개자식, 무슨 표정이 저래. 난 가고 싶은 줄 알아?’‘됐어. 머리에 물이 들어찬 사람과 따질 필요 없어.’한현진은 송가람의 말투를 따라 하며 비꼬았다. “잘 부탁드려요, 한서 오빠.”강한서와 송가람 모두 말문이 막혀버렸다.세 사람이 마구간에 도착했을 때 사육사가 준이의 갈기를 빗겨주고 있었다. 멀미서부터 그들이 오는 것을 확인한 준이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말발굽을 들어 왔다 갔다 하는 준이의 모습은 심지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았다. 준이는 일반 말보다 몸체가 훨씬 큰 편이었다. 말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준이와 가까운 거리에 서 있으면 덮칠 듯한 위압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송가람은 튼실한 준이의 모습을 보더니 겁에 질렸다. 그녀는 준이의 한쪽 눈 위의 흉터를 보더니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이러니 오빠가 준이를 흔히 없을 준마라고 했던 거군요. 하지만 한 쪽 눈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깝네요.”강한서가 손을 뻗어 준이의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완벽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도 그래요. 비록 속도는 빠르지만 길들이기 어려운 말이었어요. 경주마는 순종이 잘 된 말로 선택되거든요. 이렇게 길들이기 어려운 말은 아무리 빨리 달려도 탈락이죠. 준이 눈은 바로 훈련 도중 채찍에 맞아서 멀게 된 거예요.”송가람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쌍하네요. 많이 아팠겠죠?”한현진이 힐끔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강한서의 공대남스러운 사유방식이라면 그는 아마 누가 맞든 아팠을 거라고 대답할 것이었다. 그러나 강한서
강한서는 자기 몸을 훑어보며 말했었다. “우리 몸무게를 합하면 150kg은 거의 될 텐데, 준이를 낙타로 만들 셈이야?”‘나쁜 자식. 송가람이 나보다 가벼우면 얼마나 더 가볍다고. 너희는 준이를 낙타로 안 만들 수 있나 보지?’송가람은 당연히 강한서의 대답에 기쁜 기색을 내비쳤다. 특히 한현진의 어두워진 얼굴을 확인하더니 송가람의 얼굴은 더 밝아졌다. 한현진은 준이를 만진 적도 없다고 생각하니 송가람은 어떻게든 이 말을 길들여 강한서 앞에서 자기가 특별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한서 오빠. 한 번 해보게 해줘요. 사람을 가리는 준이가 전 만지게 해줬다는 건 우리가 인연이라는 뜻이에요. 저도 이렇게 예쁜 말을 본지 너무 오래됐어요. 한 번 시도는 하게 해줘요.”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가람 언니, 말 위에서 떨어지는 건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고집부릴 일이 아니에요. 만약 다치기라도 하면 제가 집에 돌아가서 아주머니께 뭐라고 말씀드리겠어요?”송가람은 한현진이 강한서 앞에서 지고 싶지 않아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한현진의 충고는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말을 길들이면서 다치지 않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현진 씨, 현진 씨가 준이를 순종시킬 수 없다고 저도 못하는 건 아니에요.”그녀는 말하더니 다시 강한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서 오빠, 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만약 준이가 올라타지도 못하게 하면 그만둘게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요. 보호 장비 잘 착용하고 조심해요. 안 될 것 같으면 바로 내려오고요.”송가람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가 나긋하게 대답했다. “네.”그러더니 그녀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현진 씨, 다른 말을 골라서 시합해 볼래요?”한현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다음에요.”한현진이 창피해서 핑계를 대는 것이라고 확신한 송가람이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훑어보더니 냉소 지었다. “입김을 불면 낫는다니, 한현진 씨 입김이 만병통치약이라도 돼요?”“네.”한현진이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전엔 계속 저더러 여왕님이라고 했잖아요. 여왕님이 불어준 입김인데 당연히 만병통치약 아니겠어요?”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 “헛소리하지 말아요. 제가 그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했을 리가 없잖아요.”한현진이 혀를 찼다. “고작 그게 뭐라고요. 강한서 씨가 저에게 했던 느끼한 멘트는 이것보다도 더 오글거렸어요.”강한서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한 번 얘기해 봐요. 제가 무슨 오글거리를 멘트를 했었는지.”“너무 많죠. 예를 들면 네가 없으며 어떻게 살아, 평생 너만 사랑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특히 그 뭐냐...”강한서가 말끝을 흐린 한현진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뭐라고요?’한현진이 강한서의 귓가에 다가가려고 하자 그가 손을 뻗어 한현진을 막았다. “거기 서서 얘기해요.”한현진이 말했다.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런데.”강한서가 물병을 열며 덤덤하게 말했다. “여기서 못 할 얘기가 뭐가 있어요? 말해요.”한현진이 입을 삐죽였다. “특히 섹X할 때면 절 ‘자기’라고 부르길 좋아했어요. 제가 말랑하고 맛있다면서, 제 위에서 죽어도 좋다고...”“풉—켁켁—”막 물을 마시던 강한서가 입안에 있던 물 절반을 뿜어냈다. 남은 물 절반에 사레가 들려 얼굴과 목이 다 새빨갛게 변했다. 한현진이 다가가 걱정스레 강한서의 등을 토닥이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라고 했는데도 굳이 말하라고 했잖아요. 절 기억하지도 못하니 강한서 씨 기억엔 본인이 아직도 총각 같을 테니, 이런 주제가 한서 씨에겐 얼마나 자극적으로 들리겠어요.”강한서는 귀가 빨개질 정도로 기침을 해댔다. 그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함께 밀려와 한현진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얘기했다. “한현진 씨는 정말, 켁켁... 저속하네요.”한현진은 마음속으로 희
강한서가 고개를 돌리자 기쁜 마음에 송가람은 다시 준이를 채찍질했다. 그러나 이번엔 어찌 된 일인지 준이는 갑자기 날뛰더니 승마장을 마음대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준이는 앞 다리와 뒷다리를 번갈아 높이 차며 송가람을 떨어뜨리려고 했다. 쉴 틈 없이 들썩거리는 바람에 송가람은 하마터면 말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녀는 더 이상 멋있는 척할 겨를도 없이 준이의 목을 꽉 끌어안고 소리 높여 강한서의 이름을 불렀다. 강한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바로 그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한현진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네 몸 아직 다 안 나았어.”강한서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었다. “떨어지면 가람 씨는 죽을 지도 몰라요.”한현진의 심장이 찌릿 아파졌다.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송가람이 다칠까 봐 그렇게 걱정돼?”강한서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가람 씨가 절 살렸어요.”한현진이 눈을 감았다. “그래. 그 빚, 내가 대신 갚아줄게.”그녀는 말하며 강한서를 승마장 밖으로 밀어버리더니 이를 악물고 얘기했다. “네가 들어오기만 하면, 난 송가람 상관 안 할 거야.”할을 마친 한현진은 휙 다른 말에 올라탔다. 강한서의 가슴이 꽉 조여왔다. 그가 버럭 소리 질렀다. “내려와요!”한현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의 배를 꽉 잡은 채 몸을 낮춰 송가람 쪽으로 달려갔다. 송가람은 이미 준이 때문에 눈앞이 어지러운 지경이었다. 오직 생존 본능만으로 그녀는 준이의 목을 죽을힘을 다해 꽉 안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 한현진은 정말이지 그대로 뒤돌아 나가고 싶었다. 송가람에 대한 원망이 가짜는 아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강한서를 숨기고, 이런 모습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녀는 마치 도둑처럼 한현진 것이었어야 했을 인생을 훔친 것으로도 부족해 심지어 그녀의 연인마저 훔쳐 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했던 어두운 모습이 점차 머리를 쳐들었지만 결국은 이성이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다. 한현진이 휘파람을 불자 그 소리를 들은 준이가 바
송가람이 말에서 떨어진 뒤 강한서와 한현진도 얼마 되지 않아 멈춰 섰다. 한현진은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강한서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송가람에게로 향했다. 한현진은 고삐를 꽉 움켜쥐고 말에서 내렸다. 송가람은 손에 찰과상을 입었고 다른 데는 다친 곳이 없었다. 아무래도 속도가 다 늦춰진 뒤 떨어진 거라 그저 바닥에서 한 번 굴렀을 뿐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놀란 것만은 사실이었다. 말 위에서 흔들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한현진 역시 처음 승마를 배울 때 직접 경험한 적이 있었다. 송가람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뚝뚝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를 보자 그 서러운 감정은 극에 달했다. 송가람이 참지 못하고 강한서를 불렀다. “한서 오빠...”강한서는 아무 말 없이 몸을 숙여 송가람의 손을 잡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팔다리 움직여 봐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한현진이 얼굴을 지추렸다. ‘그렇게 느린 속도에서 떨어졌는데, 골다공증이 아니고서야 왜 못 움직이겠어.’송가람은 강한서에게 기대 그가 시키는대로 팔다리를 움직였다. 뼈가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강한서가 말했다. “손 말고 아픈 곳은 없어요?’송가람이 눈시울을 붉힌 채 고개를 가로저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 오빠, 저 무서워요...”“괜찮아요, 괜찮아...”강한서가 나지막이 위로했다. 한현진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쩐지 지금 이곳에서 그녀는 소외된 것만 같았다. 그녀가 몸을 돌려 자리를 피하려는데 송가람이 갑자기 한현진을 불렀다. “현진 씨. 현진 씨는 분명 준이를 순종시킬 수 있었으면서 왜 거짓말한 거예요? 일부러 절 준이를 타게 하려고 속인 건가요?”한현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송가람을 쳐다보았다. “제가 언제 준이를 순종시키지 못했다고 얘기했죠?”조금 진정이 된 송가람이 머릿속으로 어떨게 된 일인지 파악을 끝냈다. 그러자 그녀의 말투도 조금 날카로
거실에서 정인월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한현진은 강한서와 송가람이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순간 웃음을 거두었다.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한현진을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정인월에게 말했다. “할머니, 전 오후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정인월이 말했다. “식사 준비가 거의 다 되었을 거야. 일부러 네가 좋아하는 요리도 몇 가지 하라고 했어. 먹고 가.”한현진이 말했다. “아니에요, 할머니. 친구와 12시 30분에 만나기로 했거든요. 밥 먹고 가면 늦을 거예요. 직장 동료라 늦으면 곤란하거든요.”한현진의 말에 정인월도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그럼 내가 아줌마한테 네가 좋아하는 음식 포장하라고 할 테니까 갈 때 가져가렴. 집에 가져가 먹는 건 괜찮겠지?”한현진이 못 말리겠다는 듯 말했다. “할머니께서 이렇게까지 얘기하셨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하겠어요.”그 말에 정인월은 기뻐하며 한현진을 이끌었다. “가자. 할머니와 주방으로 가서 네가 먹고 싶은 거로 포장하렴.”말하며 정인월은 한현진을 이끌고 걸어가더니 갑자기 무엇을 떠올린 듯 고개를 돌려 강한서에게 말했다. “한서야, 가람이를 손 씻는 곳 알려주고 밥 먹을 준비하렴.”송가람의 기분이 조금 불쾌해졌다. 누가 봐도 정인월은 손님을 대하는 태도로 송가람을 대했다. 하지만 한현진에게는 친손녀보다도 더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 강한서는 주방 쪽을 쳐다보더니 곧 송가람에게 말했다. “따라와요.”송가람이 고개를 숙인 채 짧게 대답했다. 진씨 아주머니와 집안의 도우미들은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주방에는 이미 가지각색의 산해진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진씨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는 차미주가 견주어도 될 정도였다. 그게 아니라면 입맛이 까다로운 한성우리가 어렸을 때 그렇게 오랫동안 밥을 얻어먹었을 리가 없었다. 정인월이 음식 포장을 지시하며 한현진에게 물었다. “현진아, 어죽 좋아해?”한현진이 대답했다. “이건 못 먹어봤어요.”정인월은 귀중한 보물을 꺼내듯 항아리 뚜껑을 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