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강하영이 노인을 자세히 살펴보니 눈매가 어딘지 정유준과 닮은 것 같았다.‘설마 정유준 씨 할아버지인가?’강하영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3년 동안 정유준만 따라다녔기에 정씨 집안의 가족구성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었다.강하영은 마음 한구석에 의심을 품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정 노인은 그런 그녀를 한번 훑어보더니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생긴 것은 반반한데 주제를 모르는 것 같군.”자신이 언제 이 노인한테 원한 살 일을 했는지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지만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어르신, 제가 뭘 잘못했기에 그런 막말을 하시는 겁니까?”“막말? 내 말이 듣기 싫으면 그만 유준이 곁을 떠나지 그래.”정 노인의 비웃는 듯한 말투에 강하영은 미소르 지었다.“저도 떠나고 싶은데 정유준 씨가 못 가게 하네요.”“유준이가 못 가게 하는 거야, 아니면 네가 무슨 수단으로 유준을 홀리고 있는 거야?”“어르신, 정유준 씨는 아시아 지역에서 몸값조차 가늠할 수 없는 MK 대표님입니다. 그런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건 머리도 좋고 계략에도 능한 사람이라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제 속셈 하나 꿰뚫어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강하영의 말엔 조리도 있고 평정심도 잃지 않았으나 아쉽게도 신분 차이로 정씨 집안에 들어올 수는 없다.“1억을 주고 다른 도시에 별장 한 채를 주겠다. 위치는 네가 고르는 곳으로 해줄 테니, 단 한 가지 요구는 네가 유준이 곁을 떠나는 거다.”“신분 따위는 한 번도 원해본 적이 없어요, 돈이라면…… 저도 이제 관심 없어요.저를 설득하기보다는 정유준 씨한테 저를 그만 놓아줘라고 얘기하는 건 어때요?”강하영의 말에 정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돈이 필요 없어? 그럼 3년 동안이나 내 아들 정부 노릇을 한 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아들이라고? 외모만 봐서 정유준 씨 할아버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데.’강하영은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그건 저의 개인적인 사정
“강하영 씨, 저는 괜찮아요. 미리 말씀하시면 제가 준비하고 있을게요.”점심, MK 그룹.정 노인은 회사로 정유준을 찾아갔다. 그는 소파에 앉아 정유준이 서류에 사인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말재주가 아주 좋은 여자를 찾았더구나.”정노인의 말에 정유준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더니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강하영을 찾아갔습니까?”“그 여자는 언제 처리할 거야? 그리고 다인이랑은 언제 결혼할 생각이냐?”정유준은 서류를 덮었다.“어젯밤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 일은 걱정하지 마시죠.”“네가 처리할 수 없다면 내가 할 수밖에 없겠구나!”정 노인의 차갑고 딱딱한 말투에 정유준 주위의 기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만약 강하영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저도 회사 내 둘째 형님의 모든 직무를 해임할 겁니다.”“너는 아직 그럴 권리따위는 없다!”정 노인은 크게 화를 내며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쳤다.“그렇게 소리 지르시면 제가 두려워할 것 같으세요? 강하영만 건드리지 않으면 저도 둘째 형님은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그의 말에 정 노인은 정유준을 쏘아보기 시작했다.“네 놈이 이제 다 컸구나!”“이제 아버지와 쓸데없는 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천수를 누리세요.”“네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회수할 수도 있어!”정유준의 담담한 어투에 정 노인은 화가 나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큰형과 작은형이 MK 그룹을 인수했을 때 회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제가 하나하나 다시 말씀드릴까요?”“네 이놈!”“네놈이 여자한테 빠져 허우적댈 줄은 몰랐구나!”정 노인은 벌떡 일어나 이를 악물고 한 마디 남긴 뒤 몸을 돌려 떠났다.저녁.소 노인은 양다인을 소씨 집안으로 데려와 몸조리를 시키며 그녀를 위로했다.“얘야, 이제 안심하고 여기서 지내라.”양다인의 얼굴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할아버지, 저 때문에 여러 가지로 귀찮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해요.”“그 얘기를 대체 몇 번이나 할 셈이냐? 너는 내 손녀다.”소 노인의 안타까워하는 말투에
“미리 얘기해줘서 고마워요.”소예준은 휴대폰 화면을 보며 강하영이 대체 언제쯤이면 자신과의 연락을 거부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아홉 시.정유준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자 임씨 아주머니가 그의 외투를 받으며 말을 건넸다.“사장님, 오늘 아버님께서 다녀가셨어요.”그 말에 정유준은 입술을 꾹 깨물며 물었다.“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임씨 아주머니는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를 간단명료하게 전하자 정유준의 안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겁날 게 없나 보군요.”말을 마친 정유준은 성큼성큼 위층으로 올라가더니 2층 침실 문을 열었다.강하영이 노트북을 닫자마자 어두운 표정을 한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힐끗 쳐다본 뒤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정유준을 스쳐 지나가던 순간 남자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강하영!”강하영은 발걸음을 멈추고 손을 빼낸 뒤 살짝 몸을 돌리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아버지와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말았어야지.”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탓하는 남자의 말에 강하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돌렸다.“그럼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나는 분명 물건을 가지러 돌아왔을 뿐인데 당신이 나를 여기에 붙잡아 둔 거잖아. 그런데 내가 왜 유준 씨를 유혹했다고 잘못을 인정해야 해?”“아버지를 화나게 한 결과가 어떤지 알아? 나는 24시간 동안 너를 지켜볼 수는 없어!”차가운 정유준의 말에 강하영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그럼 내가 떠나는 게 최선의 선택이잖아! 내가 위험에 처하는 건 모두 당신 때문이야!”그 말에 정유준은 마음 한 켠이 욱신거렸지만 빠르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싸늘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네가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떠날 수 있을 줄 알았어?”“그래서 지금 나더러 그들의 온갖 빈정거림을 감수하라는 얘기야?”강하영은 되물으며 남자의 깊은 눈매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정유준 씨, 당신은
정유준의 물음에 배현욱은 말문이 막혀 되물었다.“네가 요즘 강하영 씨 신상을 조사하고 있는 건, 혹시 너를 구한 사람이 강하영 씨라고 의심하는 거야?”“그래. 나는 세상에 그런 우연은 없다고 생각하거든. 반대로 양다인한테서는 아무런 익숙함도 느낄 수 없었어.”“그럼 강하영 씨는 뭐라고 대답했는데?”“당시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어.”“그럼 혹시 그사이에 사고라도 난 거 아닐까?”배현욱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꺼낸 얘기에 정유준은 오히려 침묵에 잠겼다.“허시원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강하영이 어렸을 때 한동안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고 했어.”그 말에 배현욱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그럼 그것 때문에 기억을 잃었을 수도 있잖아. 수소문해서 당시 입원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는 건 어때?”정유준은 실눈을 뜨고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휴대폰을 꺼내 허시원에게 문자를 보냈다.“당시 강하영이 입원한 원인을 알아봐.”……목요일.강하영은 원고를 보낸 뒤 우인나와 함께 교외에 있는 병원에 가서 산전검사를 받기로 약속을 잡았다.임신 4개월, 배가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했고, 의사 선생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헀다.“김제시를 통틀어 세쌍둥이를 임신하고도 배가 이렇게 불러오지 않은 산모는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그 말에 강하영과 우인나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병원을 나서자 우인나는 강하영의 배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이젠 헐렁한 옷을 사는 게 좋을 것 같아.”“하긴, 그래도 세쌍둥이니까 헐렁한 옷을 입지 않으면 숨길 수 없겠지.”“가자! 우리 쇼핑하러 가자!”우인나는 강하영을 끌고 차에 오른 뒤 백화점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가 3층 육아 코너에 도착하자 강하영은 두 경호원을 거느린 양다인을 발견했고, 우인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이를 갈았다.“정말 재수가 없네! 쇼핑하러 와서까지도 양억지를 봐야 해?”강하영은 경호원 손에 들려있는 쇼핑백을 보고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괜찮아, 쇼핑은 이미 다 끝났을 거야
강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에 네가 가고 나서 확실히 화풀이를 제대로 했지.”우인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강하영을 잡고 흔들었다.“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으면 나도 같이해!”강하영은 우인나의 머릿속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이게 재밌는 일인가?’MK 그룹 대표님 사무실.허시원은 서류를 들고 몇 번 노크를 한 뒤 정유준의 사무실로 들어가 알아낸 자료들을 정유준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대표님, 강하영 씨의 입원 자료입니다.”서류를 받아 확인하던 정유준은 위에 적힌 진단 보고서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했다.“고열로 인한 기억 상실?”“네, 강하영 씨가 보름 넘게 병원에 입원했다고 적혀 있었는데, 열이 내리고 기억상실증이 왔다고 하더군요. 대표님 뒷장을 확인해 보시죠.”정유준이 두 번째 페이지를 훑어보며 위에 적힌 기록을 확인하더니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강하영이 폭행을 당했어?”“폭행을 당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당시 병원에 실려 갔을 때 몸에 적지 않은 멍 자국이 있었다고 합니다.”정유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에 서류를 꽉 움켜쥐었고, 눈가의 어두운 기운이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어렸을 때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거야?’“당시 재직했던 선생님은 알아봤어?”정유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서류를 내려놓았다.“세 명 정도 연락이 닿았는데 전부 인상이 없다고 하더군요. 대표님, 일부 자료들이 많이 훼손된 탓에 나머지 선생님들한테 연락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알았어. 계속 알아봐.”정유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지만 허시원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난감한 표정으로 정유준을 바라보았다.“대표님, 양다인 씨에 대한 일로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얘기해.”정유준이 눈을 치켜뜨며 싸늘한 말투로 대답하자 허시원은 몰래 숨을 들이마셨다.“반세진 씨 얘기로는 양다인 씨가 예전에 자기한테 연락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든 강하영 씨를 회사로 불러내라고 했답니다. 시간을 보니 회사 기밀이
양다인은 탁자 밑으로 주먹을 꽉 쥐며 서둘러 설명하기 시작했다.“아무리 출산 휴가중이라고 하지만 회사 내부에 퍼진 소문 정도는 알아. 소식을 듣고도 얘기하지 않은 건 괜히 유준 씨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정유준은 손가락으로 천천히 무릎을 툭툭 두드리며 짜증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다음부터 어떤 핑계로도 강하영을 찾지마.”“유준 씨, 왜 그렇게 그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뭐가 부족해?”양다인이 화장마저 번질 정도로 서럽게 울었지만 정유준은 말을 돌렸다.“소씨 집안에서 태교에 전념하도록 해.”“나 이대로 내버려둘 셈이야? 유준 씨, 이 아이는 우리 두 사람의 아이잖아.”양다인이 이성을 잃고 거듭 따지기 시작하자 정유준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계속 그런 식이면 파혼하고 양육권은 내가 가질 수도 있어.”이 말을 남기고 정유준은 몸을 일으켜 룸을 나갔고, 문이 닫히자 양다인은 거칠게 눈물을 훔쳐냈다.‘이 모든 게 다 강하영 탓이야! 죽여버릴 거야!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소씨 집안.양다인이 빨갛게 퉁퉁 부은 눈으로 집에 돌아가자 거실에는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소예준만 있었다.양다인은 소예준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할 수 없었다.“오빠.”“난 네 오빠가 아니야.”양다인이 목멘 소리로 소예준을 불렀지만 소예준이 그녀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 계속 재정 잡지를 읽기 시작하자 양다인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오빠가 나 싫어한다는 거 알아. 그래도 우리 유전자 검사 결과는 99%이고, 사실이 그래.”“DNA도 조작할 수 있지.”손에서 잡지를 내려 놓은 소예준이 몸을 일으켜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양다인, 우리 어머니는 절대 너처럼 간접적인 수단으로 남을 해치는 분이 아니었어!”그의 말에 양다인은 이를 악물었다.“오빠, 나한테 그런식으로 얘기하다가 할아버지가 화내실까 봐 두렵지도 않아?”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소 노인이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며 들어왔는데,
강하영이 크게 반항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이것 놔!”“짝!”남자가 강하영의 뺨을 힘껏 때리자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방금 뺨을 맞은 것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기 시작했다.남자는 그대로 강하영을 끌고 차 안에 밀어 넣은 뒤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얘기했다.강하영은 자신의 힘으로 이 남자를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 남자가 함부로 손찌검을 한다면 그녀의 아이를 지킬 수 없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강하영은 차 문에 달라붙어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조심스레 주머니에 손을 넣어 허시원에게 긴급 전화를 걸려고 했다.화면 잠금 버튼을 세 번 누르기만 하면 바로 긴급 전화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미처 버튼을 누르기 전에 남자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휴대폰을 뺏앗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강하영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대체 누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강하영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차창밖을 내다보면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두려움에 떨 뿐이었다.차에서 뛰어내리려면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유산을 하거나, 유산을 당하거나.강하영은 마음을 다잡으며 대처할 방법을 생각해야한다고 거듭 다짐했다.두 시간 뒤.차는 낮은 단독주택 앞에 멈춰 섰고, 주위는 칠흑 같이 어두운 숲으로 뒤덮였다.남자가 강하영을 차에서 끌어내리자, 운전기사가 주택 문을 연 뒤 강하영을 집안으로 힘껏 밀었다.비틀 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란 강하영이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려고 애썼지만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강하영은 문을 두드리며 다급하게 소리쳤다.“당신들 대체 누구야? 왜 나를 여기에 가둬두는 건데?!”하지만 들려오는 건 자동차 엔진 소리뿐이었다.그때 강하영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치기 시작했다. 설마 죽을 때까지 이곳에 갇혀 있어
“6시에 나가셨는데 혹시 무슨 일 생긴 겁니까?”임씨 아주머니가 걱정스레 물었고, 정유준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알았어요.”전화를 끊은 정유준이 다시 우인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우인나가 전화를 받았다.“정 대표님! 하영이 집에 있어요?”“혹시 저녁에 같이 식사하기로 약속했습니까?”정유준의 진지한 말투에 우인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네, 맞아요. 레스토랑에서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휴대폰 전원도 꺼져 있어요!”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정유준의 눈가엔 싸늘한 한기가 스쳤다.“일단 끊어요!”그는 바로 허시원에게 전화를 걸어 분부하기 시작했다.“강하영이 사라졌어. 지금 당장 애들을 보내 찾아봐.”정유준은 전화기를 든 채 지시를 내리며 성큼성큼 사무실을 나섰다.레스토랑.우인나는 다급한 마음에 화가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어떡하죠? 하영이가 난원에 없대요!”그 말에 부진석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유림 아파트로 가보자, 어쩌면 집에 있으면서 휴대폰을 충전하는 것을 잊었을 수도 있잖아. 임신 중엔 건망증 증상도 있고 잠이 몰려오는 경우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우인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부진석을 따라 유림 아파트로 향했다.강하영의 집 앞에 도착해 한참 문을 두드리자 맞은 편 주민이 문을 열었다.“아이고, 그만 좀 두드려요. 지금 시간이 몇 신 줄 알아요? 거기 살던 사람 안 돌아온 지 꽤 됐어요.”부진석이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혹시 오늘도 돌아온 적 없었습니까?”남자는 불쾌한 듯 부진석을 노려보았다.“없다니까요! 오늘 하루 종일 집에 있었으니 집에 돌아왔으면 문 여는 소리가 들렸을 겁니다!”말을 마친 뒤 거칠게 문을 닫자, 우인나는 다급한 마음에 눈가가 붉어졌다.“강하영은 대체 어디로 간 거죠? 요 며칠은 기분이 괜찮았단 말이에요!”“혹시 최근에 다른 사람과 싸운 적은 없었어?”부진석이 침착한 말투로 묻자 우인나도 곰곰히 생각에 잠기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