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하연은 친구 예나와 함께 명품 매장에 가서 주문해둔 물건을 찾기로 약속했다.가게에 들어서자 직원들은 그녀가 최하연이라는 것을 알고는 즉시 매장 매니저를 호출했다.매니저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최하연 고객님, 잠시만요. 고객님이 주문하신 보석은 너무 고가의 제품이라서 금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받으러 갈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제가 먼저 다른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괜찮습니다, 저희끼리 알아서 볼게요.”예나와 하연은 매장 곳곳을 한 바퀴 돌았지만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자기야, 1층의 옷은 별로 맘에 안드네. 다른 사람들이 다 고르고 나서 남은 것들 같아. 우리 2층으로 가 보자.”예나는 하연을 끌고 2층으로 갔다.매니저는 곤란해하며 말했다.“정말 죄송합니다. 2층은 여러 사모님들이 보고 계십니다. 지금 들어가서 보시는 것이 불편하실 겁니다.”하연은 매니저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알겠어요, 그럼 우리는 주문한 보석만 가지고 갈게요.”매니저는 매장의 상황을 잘 이해해준 하연에게 연거푸 감사인사를 했다. 이렇게 재산이 있으면서도 갑질을 하지 않는 고객은 드물었다.하연은 예나를 끌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즐겁게 핸드폰 게임 ‘에닝팡’을 즐겼다. 아래층에 있는 두 사람의 말소리는 펀칭된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전해졌고 이수애의 귀에까지 들렸다.이수애가 유리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고 하연을 발견하고는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옆에 동행한 귀부인은 입을 가리고 몰래 웃으며 이수애의 상황을 비꼬는 것을 잊지 않았다.“사모님 댁 한씨 집안 못된 며느리가 인터넷에서 이름도 다 공개되고, 무슨 일인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다는데, 정말이예요?”“댁의 따님 서영이는 경찰서로 연행됐었잖아요, 이제 나왔어요?”상류층은 원래 강약약강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라, 모두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수애의 아픈 곳을 세게 찔렀다.이수애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이를 악 물었다. 물컵을
“세상에 이렇게 비싼 목걸이가 어디 있어? 순 날강도 같으니라구!”이수애는 평소에는 고상하고 우아한 척 행동했지만 막상 하연과의 갈등 상황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니 뼛속 깊은 데부터 인색하고 쩨쩨함이 드러났다. 이수애의 날카롭고 째지는 목소리가 들리자 순식간에 매장 직원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매니저가 앞으로 나가서 설명했다.“사모님, 이 제품은 VERE와 우리 브랜드의 주문제작형 모델입니다. 위의 노란 빛을 띠는 다이아몬드는 일찍이 T국 여왕이 착용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이 가격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있습니다.”“내가 당신들이 물건 팔아먹으려고 하는 허튼소리를 믿을 것 같아? 차라리 죽은 사람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을 믿겠네. 정말 우리 같은 부자들 돈을 그렇게 쉽게 뜯어가려고?”이수애는 매장 매니저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매니저는 지금까지 일해오면서 진상부리는 고객들을 수없이 봤지만 이수애처럼 직설적인 사람은 처음이었다. 매니저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매장 직원들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하연은 조롱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고, 말투도 점점 차갑고 딱딱해졌다.“말씀하신 대로 저는 뭘 사도 상관없는데 뭘 머뭇거리시는 거예요? 빨리 결제하세요!”그녀는 위층에서 난간에 기대어 구경하는 재벌집 안주인들을 가리켰다.“지금 사모님이 하신 말씀은 B시의 명문가 사모님들 모두가 들었으니 억지 부리시면 안 됩니다.”이수애가 고개를 들자마자 2층에 함께 있었던 재벌 집안 안주인들이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는 얼굴들을 보았다.상황이 불리해지자 후회가 막심이었다. 체면을 되찾으려고 그런 건데 오히려 낯뜨거운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하연은 매장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침착하게 목걸이를 착용했다. 불빛 아래의 황금빛 다이아몬드는 반짝반짝 빛나고 눈부신 광채를 내는 것이 하연의 성격과 잘 어울려 보였다.예나는 하연 옆에서 한술 더 뜨며 맞장구를 쳤다.“역시 자기는 안목이 높다니깐.”또한 이수애를 향해 눈알을 부라
“최 사장님, 승마 솜씨가 훌륭하군요.”성재는 보이는 그대로 진심을 담아 하연을 칭찬했다. 누가 들어도 성재의 말을 인사치레가 아니었다.하연은 곁눈질로 한서준을 힐끗 보고 성재에게 말했다.“임 대표님, 잠깐 대표님과 단 둘이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기항그룹은 핵심 과학 기술 발전에 주력하는 회사이다.설립 이래 5년간 수많은 참신한 스마트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하여 모든 분야의 찬사를 받았다.이번 나노로봇 기술은 전례없는 기술 혁신으로써 의료계 역사에서 해결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난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하연은 기항그룹의 바로 이 점을 높게 평가하여 성재에게 협업을 제안하려고 했다.서준의 눈동자는 차갑고 목소리에는 이미 불쾌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기항그룹은 이미 HT그룹과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미 다 끝난 계약에 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하준의 시선이 계속 하연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가 말을 타고 멀리서 나타났을 때부터 서준은 하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그동안 하연은 서준이 보는 앞에서 말을 타 본 적이 없고, 심지어 승마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이 여자에 대해서는……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군.’기항그룹과 HT그룹의 협력은 아직 비밀유지 단계에 있었다. 하연이 이렇게 빨리 소식을 듣고 개입하려 하는 모양새로 보아 앞으로 B시 재계에서 두 기업이 치열하게 경쟁할 것으로 예상됐다.하연은 잠시 당황했다. 두 기업의 업무 진행이 이렇게 빠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짧은 며칠사이에 계약절차까지 이미 끝난 상태였다.마음속으로는 다소 화가 났지만, 홍조를 띤 하연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이 프로젝트에 저희 DS그룹이 함께 해도 될까요?”성재는 하연의 목소리를 듣고 빙그레 웃었다. 그의 맑게 빛나는 두 눈동자를 보면 누구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현재 기항그룹이 이미 HT그룹의 투자를 받았는데, 투자자를 멋대로 추가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결정이 될 겁
서준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멈췄다.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시종일관 차갑고 무겁게 침묵을 지켰다.‘이 여자는 정말 아름답고, 팔색조처럼 변화무쌍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이 여자가 내민 문제는 마치 함정처럼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아.’남은 정이 있는지 없는지는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지금 서준은 이 결혼을 너무 쉽게 일찍 끝내 버린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하연은 눈을 아래로 깔고 가볍게 웃으며 미간의 서늘한 기운을 지웠다.“훗! 내가 잠깐 실언한 거예요, 한 대표님 같은 냉혈한이 그런 별볼일 없었던 과거에 매달릴 리가 있겠어요?”하연이 계속해서 말했다.“비즈니스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익이잖아요. 이 점은 내가 굳이 말할 것도 없을 거고. 한 대표님이 나보다 더 잘 알 거고.”“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서준의 얼굴빛이 더욱 어두워지고 그의 매서운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더욱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하연은 전혀 서준을 의식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한 대표님이 지난날의 감정으로 DS그룹의 사업 참여를 거절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요?“저와 승마 시합을 하는 게 어때요?”머리카락 한 가닥이 뺨에 드리워져, 하연의 얼굴 전체에 자유분방함이 넘쳐 보였다.“당신이 이기면 DS그룹은 앞으로 절대 사업 참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내가 이기면 당신은 DS그룹의 참여에 동의하는 겁니다.”서준은 전문적으로 승마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전문 선수 수준에 버금가는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하연은 오늘 아주 컨디션이 좋아서 반드시 그를 이기려고 할 것이다.임성재는 딱히 누구 편이라고 할 것이 없었지만 말 속에 자신의 진심을 분명히 드러냈다.“최 사장님의 진심은 제 눈에 너무 잘 보이고, 승마 기술도 특출하신 것 같습니다. 한 대표님이 승마실력에 얼마나 자신이 있는지가 오늘의 관건이겠군요.”서준이 눈썹을 살짝 찌푸릴 때 하연의 눈동자 색이
하연은 두 번째 바퀴에서 이겼는지는 개의치 않고, 마지막 세 번째 커브길에 집중해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다시 서준을 한 걸음 차이로 제치고, 결국 먼저 결승점에 도착했다.이 소리 없는 대결은 결국 하연의 승리로 끝이 났다.계속해서 손에 땀을 쥐고 있던 관중석의 사람들의 하연의 승리에 환호를 표했다.경마란 그런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속도를 줄여가며 한 바퀴 더 달리고 난 후, 하연은 서준 앞에서 멈추고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이목구비가 날렵한 하연의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해졌다. 헬멧을 벗으니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흩어졌다. 짜릿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목소리에는 아직 경기 중의 흥분이 남아 있었다.“한 대표님이 졌네요.”하연은 일찍이 여왕이 개최하는 ‘여왕컵' 승마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여왕의 찬사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하연은 어릴 때부터 말을 타는 것을 매우 좋아했는데, 이 때문에 최하민은 특별히 하연을 위해 진귀한 말을 구입하여 수많은 승마 챔피언을 초청하여 함께 훈련하게 했다.15살 때 하연의 애완동물은 천만 원이 넘는 I 국에서 수입한 황금빛 말이었다.이런 실전이 매우 중요한 종목에서 하연이 서준처럼 감독에게 레슨이나 받는 얼치기 선수에게 질 리가 없었다.이전에는 부드럽고 순종적인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강한 면을 숨겨왔었다. 이는 단지 서준이 자신을 한 번만이라도 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우습기 짝이 없었다.서준의 마음속에서는 하연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서준의 복잡한 눈빛이 하연에게 몇 초간 머물렀다가 다시 거둬들여졌다.“당신, 언제 승마를 배운 거야?”좀 전에 하연이 말을 타고 나타났을 때는 하연이 원래 말을 탈 줄 알았다는 사실에 놀랐는데, 이제는 하연이 뜻밖에도 정상급에 도달한 전공자 수준의 실력을 갖고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눈앞의 하연은 야생마처럼 자유분방하고 가시 돋친 장미 같은 존재였다. 하연의 일거수일투
태현은 서준의 성토에 순간 당황했다. 서준은 하연에게 져서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나는 저 바람기 있는 여자를 상대도 안 하고 싶지만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네.”“그래?”하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태현이 깜짝 놀랐다.그는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며 당황하여 말했다.“소리도 없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당사자가 여기 있는데 바로 물어보면 되잖아?”하연은 팔짱을 끼고 똑바로 섰다. 눈동자 속의 상대를 압도하는 기세는 예전 그대로였다. ‘내가 방금 자기를 욕한 걸 들었나?’서준은 조용히 한쪽에 비껴 서서, 관심 없는 척 하연을 여러 번 곁눈질했다.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서준의 마음은 매우 복잡했다.“쳇, 원래 당신 같은 여자한테는 관심 없었어. 네 돈줄이나 얼른 찾아가.” 태현은 하연에게 가라고 손을 휘저으며 제멋대로 깔보는 투로 말했다.하연은 하이힐 신은 발로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갔다. 하연의 이 기세 때문에 태현은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아무도 말 안 해줘? 안태현 씨, 당신이 다른 사람을 험담할 때 말이야... 정말 동네 노점상 같다는 거.”태현은 갑자기 화가 났다.“최하연 씨! 이혼하고도 내 친구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내 친구들의 일에 방해나 하고 다니고 말이야! 최하연 씨 같은 계집애들 이미 충분히 많이 봐왔어, 그런 당신이 나를 비웃어? 정말 어이가 없어서 웃겨 죽겠네.”마침 이때 청소부가 청소차를 밀고 지나가자 하연은 바닥 발 매트를 닦은 걸레를 빤 오수가 든 통을 들어 태현의 몸에 끼얹었다.태현은 오늘 리넨 소재의 흰색 양복을 입었는데 하연이 뿌린 오수에 온통 젖어 위아래로 옷 색깔이 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속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그야말로 완전히 다 벗은 것보다 훨씬 더 못한, 참으로 딱한 상황이었다.그는 한 손으로는 상반신을 가리려고 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반신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허둥지둥해서 웃음을 자아냈다.“최하연! 당신이 감히 나한테 덤벼?”
‘오해라니? 선 넘네.’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모욕했던 일들이 지금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절대 별일 아닌 것처럼 간단히 넘어갈 수는 없지.’“공교롭게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나는 성격은 좋은데 뒤끝 작렬이지.’하연은 큰오빠의 설명을 떠올리자 운석을 놀리는 일이 재미있어졌다. 운석은 하연이 누군지도 모른 채 관심을 보였고 하연은 그런 운석의 모습을 즐겼다.“나한테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아시겠어요?”운석은 하연의 말을 전혀 듣지도 않고 직접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부드러운 빛을 띤 옥팔찌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 가치가 상당했다. 지난번 민혜경의 경매 낙찰 금액보다 수백 배 더 비싸 보였다.“지난번 일에 대한 감사의 선물인데, 마음에 드는지 한번 보세요.”이 옥팔찌는 운석이 오래 시간을 들여 직접 골랐다. 여러 보석 전문가들을 청해 보석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배우고 나서 장만한 상품이었다. 팔찌의 퀄리티로 보나, 가격으로 보나 그야말로 운석의 정성이 가득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가져가세요, 저는 이런 거 필요 없어요.”“나의 여신님,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운석은 다시 한번 하연에게 마음을 고백했다.운석은 온몸에 눈부신 자신감이 흐르고, 용모도 준수하고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실제로 운석과 원수진 사람일지라도 그의 소탈하고 제멋대로인 매력에 흠뻑 빠질 정도다. 그러나 지금 운석의 앞에 있는 사람은 하연이었다.“저는 아니에요.”“왜죠?”“내 스타일이 아니에요.”하연의 말 한마디에 운석은 상처받은 것 같았다. ‘여신도 자기 이상형이 있었군. 흠...”운석은 하연의 이상형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기로 했다.“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하연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혹시 나중에 내 아이의 아이큐에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요.”운석은 마치 엄청난 농담을 들은 것 같았다. 운석은 실제로 IQ 167의 천재였다.“저를 거절하는 이유가 아이큐라니 믿을 수가 없군요.”
“죄송합니다, 사장님.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막았지만 워낙 완력으로 들이닥쳐서...”비서는 난감한 표정으로 뒤따라 들어왔다.하연이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아, 문 닫아.”유신혁의 갈비뼈 골절 회복이 빠르고, 얼굴의 상처도 대부분 아물었다.“사장님, 기항그룹과의 프로젝트 계획서를 봤는데, 거기 내 이름이 안 보이네요? 누락된 것 아닌가요?”하연은 만년필을 손가락으로 돌리면서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빠뜨린 거 아니고, 내가 유신혁 씨 이름 빼라고 했어요.”“사장님, 이것은 애초에 약속했던 겁니다.” 유신혁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지고 음흉한 것이 가득했다.“아쉬울 때는 이용하고, 쓸모없으면 그냥 버리는 거 너무 모양 빠지는 거 아닙니까?”하연은 예리한 눈빛으로 유신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유신혁 씨는 내가 당신 상관이라는 것을 잊은 거 아니죠? 내 판단에 따라 내가 결정하고 책임도 내가 집니다.”유신혁은 하연에게 잘 보이는 것에 실패하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최 사장님, 저한테 너무 함부로 하지 마세요.”“그래? 그러면 내 결정 안 따를 겁니까?”하연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두꺼운 사진 한 묶음을 꺼내 책상 위에 던졌다. 날렵한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유 부장 같은 사람이 기항그룹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면 적지 않은 분란이 일어났을 것 같네요.”유신혁이 책상 위의 사진을 들고 보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온몸에 힘이 빠져 후들거리고 공포에 질려 하연을 바라보았다.“이거 다 어디서 났어요?”“아직 보여줄 게 많이 남았는데, 유 부장한테 내가 자세히 설명해야 합니까?”“아니, 됐습...”순식간에 유신혁의 기세가 꺾였다.하연의 가녀린 손가락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연의 입술 사이에는 유신혁에 대한 비웃음이 가득했다.“내 짐작이 맞네요. 몰카를 찍은 게 처음이 아니더군요.”“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 연락처 다 가지고 있어요. 이 여자들과 유신혁 씨와의 관계가 사생활이겠지만 이게 다 몰카로 찍혔다는 것을 알면, 이 여자들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