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 씨가 입은 오트 쿠튀르 옷이 좀 많아요?”지유가 무표정으로 말했다.“제가 산 옷을 입으면 그만이죠. 근데 승아 씨는 누구 옷을 고르러 온 거예요?”승아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시선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서로 물러서려 하지 않았고 곧 불꽃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았다.승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제 남자 친구한테 전 세계에 딱 10벌 있는 오트 쿠튀르 사주러 왔죠. 한번 보여줄까요?”승아의 말투는 어딘가 묘하게 자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에게 명품 코트를 사주려고 하는데 지유는 매장에서 흔히 보는 옷들을 고르고 있었다.남자한테 옷을 골라주는 일로만 봐도 둘은 차원이 달랐다.매장 직원은 한정판 코트가 담긴 박스를 들고나왔다. 포장만 봐도 돈이 많이 깨졌을 것 같았다.시유가 이를 힐끔 보더니 비아냥거렸다.“드레스 하나도 다른 사람 돈으로 사면서 이번엔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승아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남자 친구가 날 위해 지갑을 여는 게 부러웠나 보죠?”“부러운 건 아니고.”지유가 덤덤하게 말했다.“그 돈이 그렇게 떳떳한 돈은 아닌 것 같아서, 소문이라도 나면 승아 씨 명예가 실추될까 봐 그러는 거죠.”승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지유가 무슨 말 하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아직 지유는 이현과 부부 사이였기에 이현이 승아에게 쓴 돈에 지유의 지분도 있었다.지유가 다시 회수하고 싶다면 방법은 많았다.그러면 승아의 명예가 실추될 수밖에 없다.유명한 가수가 유부남을 꼬셨다는 소식이라도 나면 그대로 연예 생활은 끝이 난다.이런 스캔들을 터트리지 않고 참은 것도 다 지유가 마음이 착해서였다.“그걸로 협박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승아도 더는 지유를 상대하기 싫어 차갑게 말했다.“지유 씨는 오빠랑 이혼하면 한 푼도 못 받을 거예요. 애초에 오빠랑 결혼한 것도 여씨 집안 돈 보고 결혼한 거잖아요. 지유 씨는 그저 비서일 뿐이에요. 손에 든 그 옷을 사려고 해도 몇 개월 치 월급은 써버려야 되는 거 알죠
이현이 지유에게 200억이 담긴 카드를 줬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승아는 다 조사해 봤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현이 지유를 별로 챙기지 않는다고 말이다.이현의 비서로 7년이나 있었는데 이현은 여전히 지유를 거들떠보지 않고 있다.만약 이현이 정말 지유를 좋아하는 거라면 결혼한 사실을 숨기지 않고 떳떳하게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했겠지.승아는 지유가 이현 몰래 스폰서를 찾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믿더라도 이현이 돈을 줬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내 조카가 조카며느리한테 돈 좀 쓰는 게 어때서?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 승아 씨가 갖지 못한다고 다른 사람도 갖지 못하는 건 아닌데 말이죠?”순간 두 사람의 대화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비녀로 머리를 얹은 여희영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거의 오십이 되는 나이었지만 몸매는 여전히 잘 관리되어 있었고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작은 고모님.”여희영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던 지유가 웃으며 불렀다.여희영이 웃으며 말했다.“옷 좀 사러 나왔다가 너를 만날 줄은 몰랐네.”여희영은 이현의 하나뿐인 고모였다.할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막내딸이었다.자유로움을 좋아하는 여희영은 여씨 본가에서 지내지 않고 여행 다니기 좋아했다.만나려면 정말 인연이 닿아야만 했다.저번에 본 건 작년이었다.그것도 스치며 한번 만났다.“언제 들어오셨어요? 소식 못 들었는데.”지유는 여진숙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고모인 여희영과는 잘 맞았다.여희영의 사상이 오픈 마인드라 젊은이들과 비슷했다.하여 지유는 그를 선배가 아니라 친구로 대했다.“들어온 지 얼마 안 됐어. 이게 인연 아니겠어?”여희영도 열정적으로 지유에게 인사를 건넸다.승아는 이런 곳에서 여희영을 만날 줄은 몰랐다.여희영은 이현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승아도 여진숙보다 여희영과 더 잘 지내고 싶었다. 여씨 집안 사람들과 잘 지내야 여씨 집안에
승아는 거기 멈춰 선 채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고모님, 혹시 다른 일 있어요?”여희영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옷 사러 온 것 같은데, 그 옷 본인이 입을 거 아니죠?”노승아의 얼굴이 굳었다.“네, 선물하려고 산 거예요.”여희영은 다 알고 있었지만 톡 까놓고 얘기하기는 싫어 앞으로 팔짱을 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노승아 씨, 공인으로서 어떤 일은 해도 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아야죠. 어떤 일은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노씨 집안 체면을 생각해서 눈감아주는 거지 내가 동의한 건 아니에요. 뭐든 다 까밝혀지고 나서 후회하지 말라는 말이죠. 나는 여진숙이 아니니까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마요.”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던 승아는 여희영의 말에 눈시울이 빨개지더니 주먹을 꼭 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잘 알겠습니다. 고모님.”여희영은 그런 승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코웃음을 쳤다.승아는 모욕받았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렸고 매니저의 부축을 받으며 매장을 나섰다.“지유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뭐 좀 마시자.”여희영이 웃으며 말했다.“좋죠. 옆에 카페가 하나 있는데 거기로 가요.”둘은 카페로 향했다.여희영은 여씨 본가에서 지내진 않았지만 늘 이현과 지유를 걱정했다.“현이랑 결혼한지도 3년이 되어가는데 아이 가질 생각 없어?”지유가 멈칫하더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여희영은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지유야, 나는 슬하에 아이가 없잖니. 현이가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너희들이 빨리 손주 안겨줬으면 싶은데. 내 친구 중에 나보다 나이가 어린 애들도 벌써 손주 있더라.”지유는 커피만 홀짝거렸다.이현은 여희영과 사이가 좋았고 친모인 여진숙보다 고모 여희영을 더 잘 따랐다.여씨 집안은 사실 관계가 조금 복잡했다.이현도 어릴 때 여씨 집안에서 자란 게 아니었다.이현이 여씨 집안으로 오게 된 것도 여희영 덕분이었다.여진숙은 이현을 별로 상관하지 않았고 그에게 오히려 차가웠다.
그냥 사랑하지 않을 뿐이다.여희영은 그녀와 이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이현이 지유와 있으면 행복한지가 중요했다.하지만 여희영은 지유의 의도를 오해했다.“나 고작 두 마디 했는데 그래도 남편이라고 편드는 거야? 지유야, 너 현이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것도 현이 복이라면 복이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어디서 너처럼 좋은 색시를 얻겠어.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했으니 커서라도 복 좀 받아야지.”지유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어릴 때 잘 못 지냈나요?”우월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일반인보다 행복해야 맞다.여희영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그 일은 넘어가자. 현이도 그때 얘기하는 거 싫어할 거야. 난 그냥 너희들이 빨리 손주나 안겨줬으면 좋겠다.”여희영은 은퇴하면 집에서 손주를 볼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저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있지만 그녀에게도 손주가 생기면 데리고 나가 실컷 자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승아는 광고 촬영 중이었지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여희영에게 한 소리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저혈당 증상까지 보이고 있었다.이현은 마침 순찰하다가 승아가 한편에 앉아 많은 사람의 보살핌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는 시간관념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시간을 한번 확인하더니 무슨 문제가 생긴 걸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무슨 일이죠?”승아의 매니저가 이현을 발견하고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승아 언니 몸이 안 좋아요.”이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어제까지 괜찮았잖아요.”매니저가 승아를 힐끔 보더니 투덜거렸다.“오전에 언니 데리고 쇼핑하러 갔었거든요. 대표님께 고맙기도 하고 날씨도 추워져서 코트 한 벌 선물하려고 갔는데 온지유 씨를 만났어요...”승아가 매니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허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해. 나 괜찮아.”이현은 승아의 창백한 얼굴과 빨개진 눈시울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매니저가 말을 이어갔다.“아까
이를 들은 이현이 깜짝 놀라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디에요? 지금 거기로 갈게요.”“대표님, 혹시 무슨 일 있어요?”승아는 어딘가 많이 다급해보이는 이현에게 물었다.“지유한테 사고가 났대요.”이현은 승아를 거들떠볼 새도 없이 바로 뛰어갔다.승아는 그렇게 허둥지둥 달려가는 이현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지유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승아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아까 만났을 땐 멀쩡하던 지유가 마침 사고가 났다고?선물한 쇼핑백이 그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보고 승아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옆에 선 매니저가 이렇게 말했다.“몇 시간 전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사고는 무슨? 그냥 대표님이 여기 있는 거 알고 일부러 방해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승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래도 체면을 지키려 이렇게 말했다.“그렇게까지야 하겠어? 지유 씨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진짜 무슨 사고가 났을 수도 있어. 내가 가서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언니, 언니는 너무 착해요. 나는 온지유 씨가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매니저가 말을 이어갔다.“그러니 언니도 참고만 있지 마요. 대표님은 옆자리는 원래 언니였어요. 온지유 씨가 그 자리를 빼앗은 거고. 온지유 씨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대표님과 다시 이어졌을 텐데.”매니저는 지유를 깎아내리며 승아 편을 들고 있었다.소식을 듣고 온 곳은 한 호텔이었다. 허둥지둥 위로 올라가 스위트룸에 쳐들어간 이현이 큰 소리로 외쳤다.“온지유!”들어가 보니 지유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주변을 빙 둘러봐도 위험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현은 방 구석구석 열심히 검사했다. 그러더니 침대맡으로 걸어가 이렇게 소리쳤다.“온지유!”잠에서 깬 지유가 이현을 보고는 일어나 앉았다.“이현 씨가 왜 여기 있어요?”아까 여희영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여희영이 갑자기 앉아 있는 게 힘들다며 근처에 있는 호텔로 가자고 했다.지유는 여
여희영은 문을 막아선 채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이현은 여희영을 보고 걸음을 멈춘 채 표정을 정리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고모.”“내가 네 고모긴 하니?”여희영은 이현이 내뱉은 말을 들어줄 수가 없어 이렇게 나무랐다.“지유를 혼자 버려두고 그 노승아라는 세컨드를 찾으러 가는 거야?”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반박했다.“들리는 소문이 다 사실은 아니에요. 그런 말은 앞으로 하지 마세요.”지유는 이를 듣고 씁쓸하게 웃었다.언제 어디서나 이현은 승아를 감싸고 돌았다.여희영은 믿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내가 너를 몰라? 그 여자 말고 네가 지유를 버리고 갈 이유가 뭐가 있어? 뭐래? 당장 죽기라도 한대? 오늘은 절대 못 나가. 남아서 지유 보살펴 줘.”여희영의 태도는 꽤 딱딱했다.이현은 그래도 여희영은 존중하는 편이었기에 인내심 있게 대답했다.“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요.”“회사가 망한다 해도 못 가.”여희영이 경고했다.“지유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어. 지금 일 처리 안 한다 해서 회사가 망할까? 잘 생각해. 지유야말로 너의 와이프야. 다른 여자는 죽든 말든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이현이 이대로 계속 막 나갔다가 지유가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더는 손 쓸 수가 없는 지경이 되고 만다.여희영은 이현이 자기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별 볼 일 없는 여자에게 정신이 팔렸다가 진짜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봐 걱정이었다.지유처럼 좋은 여자를 누군가에게 뺏기는 날엔 이현이 통곡할 일만 남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리 고모라 해도 도울 수가 없게 된다.하여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을 때 무엇이라도 해서 이현이 자기 마음을 알아채게 해주고 싶었다.지유를 힐끔 돌아본 이현이 그제야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를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손에 옷을 든 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여희영의 성격이라면 이현이 오늘 이 문을 나갈 방법은 없을 것이다.이현이 말했다.“지유 제 와이프예요. 저도 어떻게 할지
술을 먹고 알레르기가 돋아 몸이 간지러웠지만 이현이 옆에서 보살핀 덕에 몸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그녀와 이현 사이에 사랑이 없다고 해도, 그녀가 여씨 집안에서 행복하지 않다고 해도 가끔은 그의 연민을 받을 수 있었다.지유는 손을 뺐다. 입안이 씁쓸했지만 그래도 이현에게 맞춰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천천히 좋아질 거예요. 알레르기 약을 먹는다 해도 효과가 백 퍼센트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처리할 일이 남아 있다면서요. 고모님 말 신경 쓰지 말고 가요. 간다고 해도 고모님한테는 뭐라 말하지 않을 테니까.”문을 열러 갔지만 바깥에서 단단히 잠겨 안에서는 열리지 않았다.“오늘은 일단 여기서 자자. 내일 아침이면 문 열어줄 거야. 그때 집에 가면 되지.”이현은 여희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오늘 여기서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지유도 별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그래요.”이현은 외투를 벗고 셔츠만 입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배고파?”지유는 오늘 아침만 먹은 상태였다. 여희영과 있을 때도 거의 커피만 몇 모금 마셨다.“조금요.”이현이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여이현, 잔머리 그만 굴려. 넌 오늘 호텔에서 절대 나갈 수 없어.”여희영은 이미 계획을 마친 상태였다.오늘 그 누구도 그들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빨리 손주를 볼 수 있다.누가 감히 방해를 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거기엔 이현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이현이 이렇게 말했다.“고모, 지유가 배고프대요. 먹을 것 좀 올려줘요.”여희영은 그제야 말투가 열정적으로 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아, 지유가 배고프대? 그럼 바로 올려줘야지. 잠깐만 기다려.”여희영은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이현은 말을 붙일 새도 없이 뚝 끊긴 전화에 고개를 젓더니 지유를 돌아보며 장난쳤다.“가끔 고모는 도대체 누구 고모인지 헷갈리게 만든다니까. 나보다 너한테 더 잘해줘. 전화 받자마자 일단 잔소
시간이 흐르면서 이현은 점점 성숙해졌고 차분해졌다.이현은 지유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왜 그렇게 봐? 무슨 생각해?”턱을 괴고 있던 지유가 이현에게 들키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아까 분명 몰래 훔쳐봤잖아.”지유가 오히려 반박했다.“이현 씨도 나 안 봤으면 내가 보고 있는지 몰랐을 거 아니에요.”“그래, 나도 너 훔쳐보긴 했어.”이현이 바로 인정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행동을 살폈던 건 사실이다.이현의 말에 지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심장이 요동치고 있는 건 확실했다.이현은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더니 그녀 앞에 놓아주었다.“자, 먹어.”이현이 그녀를 살뜰하게 챙기자 그녀의 마음도 순간 따듯해졌다.이현이 한 걸음만 다가와도 지유는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지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아까 이현 씨 보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이현이 와인을 홀짝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생각 했는데?”“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 행운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생활에서도 일에서도 크게 고생한 적이 없거든요.”지유가 웃으며 말했다.“집안이 잘사는 건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내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대학까지 쭉 뒷바라지 해주셨죠. 그러다 이현 씨를 만났고 쭉 잘 풀렸죠. 이현 씨가 우리 아버지 빚도 갚아줬고 당신이랑 결혼까지 했죠. 이겨내지 못할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뻔한 고비가 있긴 했지만 무사히 넘겼고요. 나는 사실 충분히 행운스러워요. 많은 사람에 비하면 정말 행운스럽죠.”그래서 지유도 늘 만족했다.이현은 지유의 말을 열심히 들어줬다. 그녀를 만난 지도 꽤 오래된지라 그녀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죽을 뻔했다고? 전에 나한테 말한 적 없었던 거 같은데?”이현이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지유는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번 심호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