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당신에게 진시아가 있다는 걸 잊었네.”박연희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날, 떠날 땐 일주일 후 돌아온다고 했는데 한 달 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니 진시아와 함께하고 있었겠죠. 진시아를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왜 그녀에게 명분을 주지 않는 거죠? 대체 왜 진시아를 두고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말하고 여생을 보내려고 애쓰는 거예요?”“하지만 그거 알아요? 남은 생은커녕 나는 당신을 1분 1초도 보고 싶지 않아요.”“그리고 당신을 만난 적도 없고요.”“저에겐 오직 진범이만이 아무런 죄가 없어요. 진범이에게 당신 같은 생물학적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에 제가 다 비참한걸요... 하지만 괜찮아요. 진범이도 곧 당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테니까. 저는 진범이를 은서 씨와 선우 씨 아들로 넘겨줄 거예요. 그들 곁이라면 진범이도 분명 훨씬 밝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자랄 테니까.”...박연희는 많은 말들을 토해냈지만 그녀가 내뱉은 모든 말 한마디가 조은혁의 마음을 사정없이 후벼팠다.조은혁은 그녀의 얼굴을 강제로 돌리더니 야위고 볼이 형편없도록 움푹 꺼진 얼굴을 쥔 채, 갑자기 그녀에게 미친 듯이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진범이는 내 아들이고 너는 내 아내야. 이 점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어.”그는 지체 없이 증명하고 싶었다.박연희는 여전히 그의 것이고 그녀가 여전히 사모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박연희의 옷이 찢기며 장작같이 마른 몸이 드러났고 바싹 마른 몸에는 살이 거의 없어 사실 여자의 매력은 없었지만 조은혁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박연희의 몸을 더듬으며 그녀와 관계를 맺고 그녀가 여전히 그의 여자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이럴 때, 그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이다.설령 박연희가 정말 죽더라도 그는 저승까지 쫓아갈 기세이다.박연희는 저항하지 않았다.그녀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음을 잃었는데 사실 몸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또 한 번 더럽혔을 뿐이겠지.하지만 박연희는 너무 말랐고 그녀
하지만 결국 조은혁은 끝까지 달리지 않았다.그는 박연희의 옆에 털썩 쓰러져 눕더니 그녀의 수척한 몸에 바싹 달라붙었다. 낮은 목소리가 옆을 통해 들려왔는데 어쩌면 말로 이룰 수 없이 쉰 목소리에는 심지어 약간의 비굴함을 띠고 있었다.“연희야,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건 어때? 난 다시는 너를 떠나지 않을 거고 이제 나에게도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일편단심으로 너만 바라봐줄게. 네가 어렸을 때 원하던 것, 좋아하던 것, 내가 다 줄게.”“그러니까 날 떠나지 마. 너만 떠나지 않는다면.”그 말에 박연희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다시 시작한다고? 어떻게 이토록 우스울 수가. 뭘 또 어떻게 시작하려고 하려나?그들은 한 번도 시작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그들 사이에는 거짓말과 속임수, 그리고 그녀의 젊은 시절 일방적인 희망만이 있을 뿐이다.박연희는 옷이 반쯤 찢긴 상태에서 병상에 누워있었는데 뼈만 앙상하게 삐쩍 마른 몸이 그대로 훤히 드러났으나 불빛 아래서 놀랍게도 그녀는 여전히 맑고 아름다웠다.그녀는 옷을 걷어 올리고 싶었지만 힘이 없었다.그 순간,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영혼을 잃었고 박연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봄이 가고... 여름도 지나가고 이제 2년 가을이 지나면 진범이도 학교에 가겠네. 그래, 학교... 학교... 학교... 나도 원래 행복하게 학교에 다녔어야 하는 건데.”“전 몇 번이고 꿈속에서 당신을 만났던 그 날의 아침을 그려요.”“그리고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전 저 자신을 원망하죠. 그날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고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여기에 누워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캠퍼스에서, 또는 졸업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겠지.”결국 두 줄기의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조은혁은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박연희를 바라보는 그의 검은 눈빛은 참으로 깊고 이해하기 어려운 뜻을 품고 있다.“나는 네가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나는 절대 너를 죽게 하지 않을
담배를 쥐고 있던 조은혁의 손바닥이 허공에서 멈칫했다.한참 동안 그의 목소리는 다 갈라진 땅처럼 메말라 있었다.“매칭이 안 된다니. 그럴 리가요. 그들은 이복 남매 아닙니까? 어떻게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김 비서는 아무런 대답할 수 없었다.이 세상에서 사건, 사고, 그리고 예상 외의 일은 매일 일어나고 있다.조은혁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창가에 서서 천천히 담배를 다 피웠다... 담배 한 개비가 전부 타들어 가자 등 뒤에 서 있던 김 비서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지금 당장 나에게 적합성 검사를 마련해 줘.”“대표님, 그럴 확률은 매우 낮아요.”조은혁은 마치 그녀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두 개의 셔츠 단추를 열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팍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나는 연희와 부부 사이야. 어쩌면 난 이 세상에서 그녀와 가장 인연이 있는 사람이니 나의 것도... 쓸 수 있겠지.”“대표님, 저희는 과학을 믿어야 해요.”“하지만 난 이제 운명을 믿을 수밖에 없어!”“연희에게는 이제 시간도 없고 간원을 찾을 시간도 없고 또 소모할 수 있는 시간도 별로 없어... 연희의 몸은 수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메말랐어. 왜, 대체 왜 한 달 만에 이렇게 됐냐고. 왜...”조은혁의 주먹이 거세게 벽을 들이받았다.검붉은 선혈이 그의 손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김 비서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 밑은 어느새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지금 당장 적합성 검사 병원을 마련해 줘. 오늘 밤 당장 결과를 가져야 하니까... 그리고 은서는 모르게 해.”김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대표님.”그녀는 줄곧 일 처리가 확실한지라 한 시간 뒤, 곧바로 병원 한곳에 연락을 넣었다.깊은 밤이니 병원에는 당연히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김 비서의 제안에 병원 측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해버렸다.“죄송하지만 이 시점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몇 시간 만에 결과가 나오는 건 어느 곳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그런데 그때
하지만 조은혁은 박연희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그녀가 그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전에 박연희는 학교에 가고 싶다고 중얼거렸었다.그럼 하와이로 가서 그녀만 괜찮아지면 무엇이든 박연희가 좋다는 대로 계속하여 공부시킬 계획이었다....조은혁이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그리고 박연희는 어렴풋이 꿈에서 깨어났다.조은혁이 병실 문을 열고 천천히 그녀 곁에 다가와 앉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고 이에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그러자 조은혁은 그녀에게 겁먹지 말라고 속삭였다.“연희야, 말 들어. 우리 잘살아보자. 네가 원한다면 난 너에게 간 하나를 주고 네가 신장을 원한다면 내가 이식해주면 돼... 나는 너에게 모든 걸 해주고 싶어.”“연희야, 네가 날 오빠라고 불렀던 거 기억나?”“그거 한 번만 더 불러주면 안 돼?”...박연희의 손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갑게 식어있었다.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몇 글자 내뱉었다.“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물론 오빠라고 부르려 하지도 않았다.검은 눈빛으로 박연희를 뚫어지라 바라보던 조은혁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네가 죽고 싶어 한다는 건 알지만 난 너를 죽게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죽더라도 난 네가 바라는 대로 날 떠나게 하지 않을 거야. 혼자 멀리 떠나게 놔두지 않을 거야.”박연희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박연희는 이미 샹겐에 있을 때 죽어버렸다고.나중에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몸일 뿐 영혼을 잃은 좀비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입 밖에 꺼낼 수 없었고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조은혁은 서류 한 부를 그녀의 머리맡에 두었다.“유서에 진범이에 관한 일도 전부 적어놓았어. 우리가 죽으면 바로 법적 효력이 발생하며 앞으로 진범이는 남의 아들이 될 거고 매년 이맘때면 조은서가 진범이를 데리고 와서 우리 둘에게 제사를 지내줄 거야... 진범이가 학교에 가고 장가를 가면 우리도 모두 그의 기쁨
조은서가 고개를 들고 울먹이며 말했다."오빠, 박연희 씨는 남고 싶대? 오빠가 이렇게 박연희 씨를 속박하면 그녀의 생활이 이전의 나랑 무슨 차이가 있겠어? 오빠, 부탁할게, 그녀를 놓아줘. 만약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냥 진범이 잘 돌보면서 남은 인생 잘 살게 해줘. 박연희 씨는 이미 충분히 고생하고 있잖아. 오빠,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그렇게 해줘, 알았지?”남매가 박연희 때문에 싸운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조은혁은 조은서를 매우 아꼈다. 그래서 그는 될수록이면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박연희를 놓아줄 수는 없었다.결국 그는 휴대전화를 끊고 레버를 당겼다.헬리콥터가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내며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았다.조은서의 그림자는 점점 작아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끊임없이 조은혁을 향해 소리쳤다.“오빠 잊었어? 오빠가 금방 감옥에서 나왔을 때 나랑 선우 씨 결혼생활이 맘에 안들어서 선우 씨랑 여러번 싸웠잖아. 근데 왜 오빠랑 박연희 씨 일에는 이렇게 무감각 한건데!”“오빠, 난 박연희 씨만 아끼는 게 아니야. 난 오빠도 아껴. 그래서 오빠가 후회할 일을 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래서 오빠가 더 이상 사랑 없는 결혼에 갇히는 것을 원하지 않아. 오빠랑 박연희 씨의 감정은 끝났고, 그녀는 오빠를 사랑하지 않아!”“사랑하지 않아서 그녀는 죽으려고 했던 거야.”조은서의 모습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그녀가 남긴 말은 조은혁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하와이 민국 병원.병원의 최상층은 조은혁에 의해 전부 통제되었고 각 엘리베이터 입구에 경호원이 배치돼 있어 모기 한 마리 쉽게 날아오지 못했다.박연희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오후 4시였다.새하얀 벽, 은은한 소독제 냄새, 그리고 곁에 있는 그 사람."일어났어?"조은혁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했지만 그 속에 알아채기 힘든 부드러움을 담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박연희의 입술이 움직이자 그는 그녀의 뜻을 이해하고 말했다. "진범이는 옆 병실에서 도우미들
그러다가 박연희가 갑자기 급발진했다.그녀는 더 이상 조은혁의 눈에서 처음의 풋풋함을 찾아볼수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단지 증오뿐이었다."조은혁 씨, 나는 모든 걸 잃었어요! 우리 오빠는 이제 B시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커리어는 완전히 박살이 났죠. 내가 당신을 벌주고 있다고요? 조은혁 씨, 틀렸어요. 내가 당신을 벌주는 게 아니라 당신이 나를 벌 주는 거겠지.”“진범이 목숨, 그리고 내 목숨. 어때요? 둘이면 충분해요?”"왜 나를 살렸어요.”"내가 왜 살아야 하는데, 내가 살아 갈 이유는 이제 없는데... 조은혁 씨, 당신은 진심이 짓밟힌 느낌을 알아요?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을 알아요? 당신은 항상 당신이 감옥에 갔었다는 얘기를 하지만, 나라고 처지가 달랐을 것 같아요?”"하와이에서의 첫 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눈치를 보며 살았어요. 당신이 웃어주면 전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 만약 당신이 굳은 얼굴을 하면 전 마음이 아팠고 제가 뭘 잘못했는지 반성했어요. 그렇게 저는 서서히 생명을 잃어갔어요.”"나중에 알게 된 건, 당신은 기분이 나쁜 게 아니고 내가 잘못한 건 더더욱 아니었죠. 단지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밖에 여자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뿐이었죠. 전 제가 당신 전부인 줄 알았어요, 사실은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일 뿐인데. 다른 여자들은 당신과 함께 있으면 얻어가는 거라도 있었겠지만 전 그저 당신의 복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죠.”"당신은 나를 달랠 때마다 무슨 생각 했어요?”"정말 무식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죠.”"그렇게 점점 당신은 집에 거의 돌아오지 않았고, 가끔 집에 와도 그저 생리적 욕구를 분출하는 것에 불과했죠. 제가 아무리 순진하다고 해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그때 전 어리고 무지해서 정말로 사랑받는 기분을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하인우를 받아들였고 그와 함께 캠퍼스에서 자전거를 타고 함께 길거리 음식을 먹었죠. 전
"의사 불러올게!”조은혁이 일어서자마자 박연희에게 잡혔다. 그녀의 손가락은 말랐지만 지금은 매우 힘이 있었다. 그녀의 동공이 풀리며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초점이 없어졌다.박연희의 암세포가 눈까지 퍼져서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았다.갑자기 일어난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눈물 한 방울이 조은혁의 손등에 떨어졌다.그녀는 그를 향해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입모양으로 몇 마디 말을 했다.조은혁 씨,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당신을 사랑하면서 너무 힘들었고, 너무 오래 기다리기만 했어요.3년 전, 두 사람이 B시에서 처음 만났을 때.그해 박연희는 21살이었고, 그녀는 박연준에게 잘 보호받았다.그때 그녀는 아직 B시 미대에서 공부하고 있었다.박연준은 매우 바빴고 그의 생활은 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다가 후에 그는 휴가 때 계속 하와이를 왔다 갔다 했다. 왜냐하면 그는 좋아하지 말아야 할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바로 조은서였다.그때부터 그는 박연희에게 소홀히 했고, 박연희는 200평짜리 아파트에서 혼자 살며 두 명의 도우미가 그녀를 돌보았다.그녀의 옷은 모두 수입 명품 브랜드이고 모두 박연준이 직접 선택한 것으로, 명절마다 박연준이 그녀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박연희의 옷장은 40평이었고 여러 개 금고에는 박연준이 선물한 귀중한 장신구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항상 하늘을 쳐다보고는 했다.스물한 살의 나이, 긴 생머리, 순수한 얼굴.그녀는 충분히 아름다웠다.박연준이 그녀에게 운전기사와 차를 주었지만 박연희는 항상 타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하교할 때 친구들과 함께 집에 갔다.그녀는 너무 외로웠고, 친구를 원했다.그녀와 조은혁이 만난 것은 어느 날의 저녁 무렵, 노을이 진 시간이었다.그녀가 탄 버스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화물차 한 대와 충돌해서 버스가 몇 미터 날아가 길가에 전복되었다.다행히 박연희는 가벼운 찰과상만 입
동창을 뒷좌석에 반듯이 눕히고 박연희는 남자와 나란히 맞은 편 좌석에 앉았다.남자가 손을 뻗어 앞 창을 두드리며 말했다."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네, 대표님.”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그때까지 박연희는 멍하니 있었다.그러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카펫 위에 반쯤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머금고 기절한 학생의 손을 잡고는 작은 소리로 그녀에게 버텨내라고 했다.조은혁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었다.올백머리를 한 그의 하얀 셔츠에 피가 묻었지만 그의 미모는 조금도 절감되지 않았다.그는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지만, 불을 붙이지 않고 가볍게 두드리며 정신을 겨우 붙들고 있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순했고, 마치 무해한 흰 토끼 같았다.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엉덩이가 위로 올라간 자세로 있었는데, 그 뒤에 하얀 짧은 꼬리를 달면 더 귀여울 것 같았다.그녀의 피부는 매우 하얬고 드러난 종아리는 투명했다. 그 모습은 남자들로 하여금 부셔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조은혁 또한 평범한 남자였기에 그는 순수한 남성의 눈으로 박연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눈빛에는 성욕이 담겨 있었다.그는 몸을 기울여 손바닥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목소리는 약간 쉬어있었다."괜찮을 거야. 곧 병원에 도착해.”박연희가 몸을 움츠렸다.그녀는 돌아서서 물기 어린 큰 눈으로 조은혁을 바라보았고, 그 풋풋함은 이 세상의 더러움을 겪은 조은혁조차 은근히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그러나 그는 곧 이 느낌을 지워버렸다.그가 살짝 웃었다. 방금 그는 하마터면 그녀가 박연준의 여동생이라는 것을 잊을 뻔했다.박연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조은혁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를 붙잡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분명히 아까와 같이 그의 곁에 앉았는데, 그녀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하지만 옆에 있는 남자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그는 휴지를 가져다가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