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범이는 아직 어려서 어떻게 어른들의 일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저 아빠와 만났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쁜 마음에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고 새하얀 쌀알 같은 이빨을 몇 개 드러낸 모습은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짧은 팔을 내밀어서는 조은혁의 목을 세게 끌어안고 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보고 싶었어요.”조은혁은 코끝이 찡해져서 이마를 아이에게 비비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귀여운 자식.”그는 한 손에 장난감 차를 들고 한 손에 아들을 안고는 2층짜리 작은 건물로 걸어갔고 몇 걸음 가지 않아 뒤돌아서는 박연희를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안 갈 거야?”박연희는 나무 아래에 서 있었는데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찬란한 금빛을 뿌려대지만, 어느 한 줄기 햇살도 그녀를 따뜻하게 하지는 못했다...만약 진범이 이 자리에 없다면 그녀는 자신이 아마도 실성해서 물을 것이다. 왜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건지, 왜 이렇게 끝까지 쫓아오고야 마는 건지. 분명히 조은혁이 먼저 손을 놓겠다고 했으면서 왜 그는 지금 조진범을 품에 안고 7, 8명의 경호원을 데리고 와서는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지 말이다.조은혁은 아직 기다리고 있었고 박연희는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물었다.“왜 내가 마음 놓고 편히 살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조은혁의 그윽한 눈빛 속에는 그녀가 모르는 것들이 숨겨져 있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네가 보고 싶어서.”박연희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런 말들을 그녀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그녀는 벗어날 수 없었기에 그저 조은혁의 뒤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조금 지나 조은혁은 장난감 차를 경호원에게 맡기고 그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화기애애한 한 가족의 상봉이어야 했지만, 박연희의 뒤에는 한없이 서늘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한편, 별장에서는 장숙자가 정원에서 야채를 수확하고 있었고 곁에 있는 아기침대에는 민희가 누워있었다. 그녀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박연희가 조진범
조은혁은 문을 닫고 침대에 가서 걸터앉아 진범의 볼록한 작은 배를 어루만지면서 낮게 웃었다.“이 자식이 정말 잘 먹더라. 저녁마다 이렇게 많이 먹는 거야?”박연희는 대답하지 않았고 여전히 느긋하게 스킨케어를 하고 있었다. 조은혁은 그녀의 마음속에 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가벼운 농담을 던졌고 하인우의 아이한테도 칭찬을 건넸다.“장 씨 아주머니가 정말 아이들을 잘 돌보나 봐. 민희도 통통하게 살이 올랐네. 이제 장 씨 아주머니한테 보너스를 챙겨줘야겠어.”박연희는 여전히 말이 없었는데 이는 남자의 열정을 잠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승부욕을 불러일으켰다. 조은혁은 화장대의 의자 뒤까지 걸어가서 의자와 함께 그녀를 살며시 감싸 안고는 거울 속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나는 어디서 자?”박연희는 거울을 보다가 한참이 지나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곁에 손님방이 하나 있어요. 거기서 묵어요.”“당신이 나를 데리고 가.”그의 얇은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였지만, 그 안에는 은은한 협박이 담겨 있었다.“아니면 우리 여기서 할래? 근데 우리 소리가 너무 커서 진범이를 깨울까 봐 걱정돼. 진범이는 이제 두 살이나 됐는데 아빠랑 엄마가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 조숙할까 봐 말이야... 아무래도 사춘기가 된 다음에 내가 성교육을 하는 게 좋겠지, 안 그래?”박연희는 거울 속에서 조은혁과 눈이 마주치고는 차갑게 웃었다.“은혁 씨, 당신 지금은 정말 겉모습만 점잖고 속은 시커멓네요.”그녀는 선택권이 없었다. 복도에는 은은한 빛만 있었고 박연희는 손님방의 문을 열고 몸을 옆으로 하고 조은혁을 보며 말했다.“당신은 오늘 여기서 자요.”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조은혁에 의해 방으로 밀쳐졌다. 박연희는 벽에 기대 있었고 앞에는 뜨거운 남자의 몸이었다. 박연희는 살짝 고개를 들고 작게 말했다.“문 닫지 말아요!”그녀는 펑퍼짐한 잠옷을 입고 있었고 달빛 아래에서의 연약한 자태는 더욱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그래요?”박연희는 조은혁의 어깨에 기대 표정은 아주 담담하였다.“은혁 씨, 더 얘기하면 재미없어요. 나는 이제 잘 테니까 아직 부족하면 여기 합법적인 방식으로 돈 내고 하는 서비스가 있으니 전화해서 불러줄게요.”그는 고개를 숙여 박연희를 보았고 눈빛은 아주 그윽했는데 분명 화난 모습이었다. 박연희는 그를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잠옷을 여미고는 어두운 방을 나섰고 조은혁은 문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그는 박연희가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만약 그녀가 관계하기 싫으면 무조건 큰 난리를 피웠는데 지금은 모든 감정을 빼버린 채 그저 그의 기분을 맞춰서 움직이기만 한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아침이 되자 박연희는 씻고 2층에서 내려왔다. 조은혁은 지금 아들과 함께 정원에서 공놀이하고 있었고 민희는 아기침대에서 햇살을 받으며 자고 있었는데 편안한 듯 작은 팔을 뻗고 있었다...그 장면은 형용할 수 없을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고 박연희는 조용히 보고 있었다. 곁에는 그녀가 새로 고용한 아주머니인데 마침 B 시의 사람이었고 조은혁을 보면서 칭찬이 마르지 않았다.“사모님, 전에는 사모님께서 결혼을 이렇게나 잘하신 줄은 몰랐네요. 남편분의 풍채가 대단하고 데리고 온 7, 8명의 경호원도 모두 건장하고 단단해 보이는 게 월급이 정말 높을 것 같네요!”박연희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렸다.“경호원이 아니라 감시자겠죠.”아주머니는 믿지 않았다.“부부 사이에 감시가 웬 말이에요! 남편분은 무조건 외국에서 치안이 좋지 않다고 여겨져서 사모님과 도련님이 걱정되어 직접 와서 보호해주시는 거예요. 제네바는 정말 안전해서 경호원이 필요 없다고 얘기하셔야겠어요.”박연희는 그녀를 힐끔 보았고 아주머니는 입을 다물었다. 박연희는 조은혁의 앞으로 가서 함께 아들을 보고 있었다. 조은혁은 그녀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조진범을 다독여주며 공을 줘서는 혼자 놀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지만, 서로의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박연
박연희는 그를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은혁 씨, 당신 정말 독하네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진범이까지 희생시키려 들다니요! 그래요, 하긴 당신 마음속에서 진범이는 처음부터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어요. 그저 당신의 몇 초간 열정으로 생긴 결과물일 뿐이죠. 당신이 아이를 대하는 게 저기 고양이와 강아지를 대하는 거랑 무슨 차이가 있어요?”조은혁은 멀리 있는 진범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지금 공놀이를 하고 있었고 새하얀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조은혁은 한참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박연희에게 얘기했다.“내 아들은 원래부터 그렇게 가르쳐야 했어. 네가 진범이를 곁에 두기 좋아하니까 네가 키우라고 한 거야. 그래서 아이가 지금처럼 천진난만하게 지낼 수 있는 거고.”“그 말은 내가 당신한테 감사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에요?”“근데 당신이 진범이를 가르칠 시간이 있기는 해요? 당신은 여자를 끼고 놀 시간도 부족하잖아요!”...지금 박연희가 뱉는 말이 아주 사람을 화나게 했지만, 조은혁은 그녀와 따지지 않고 그저 그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앞으로 나한테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이 말을 박연희는 믿지 않았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인 격이니 3일 후 결국 그녀는 조은혁에 의해 강제적으로 B시에 돌아가게 되었다...박연희는 그 아주머니에게 보상의 의미로 2000만 원가량 주었다. 귀국하기 전날 밤, 박연희는 두 아이를 재우고 홀로 옷방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두 아이의 물건도 있어 뒤죽박죽으로 캐리어 몇 개를 채웠다.조은혁은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들어와서 큰 상자 몇 개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물건이 이리 많아, 국내에서 다 살 수 있는 것들이잖아?”박연희는 여전히 작은 옷가지들을 정리하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아이들의 옷은 다 자주 입어서 습관이 된 것들이기에 어떻게 함부로 바꾸겠어요... 그리고 이렇게 많이 한꺼번에 바꾸면 돈이 얼마나 드는데, 나는 당
박연희는 조은혁에게 더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새해가 다가오는 시점에 조은혁은 반드시 참석해야 할 접대 장소가 생겼다. 모두 비즈니스를 하는 중요한 파트너이니 가지 않는다면 유별나 보였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는데 이지훈이었다. 전에 조은서를 좋아해서 유선우와 싸웠던 적이 있었다. 이지훈은 결혼을 한번 한 적이 있었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의 성격 차이로 1년도 안 되어 합의로 이혼하고 지금은 솔로인 몸이다. 그는 구석진 곳에서 술을 따르며 조은혁을 훑어보고 있었다.‘귀국했구나!’이지훈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남의 일을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므로 외국에 있는 박연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조은혁이 귀국했어.」 메시지를 발송한 그는 휴대폰을 던지고 조은혁과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평소에 조은혁은 술을 잘 마시지 않았는데 마신다고 해도 적게 마셨다. 그는 술을 많이 마실 때마다 여자를 안고 싶어 했는데 박연희에게 상처를 줄까 봐 지금은 접대 장소에 가서 아주 절제하고 있었다. 이지훈은 이걸 모르고 있었기에 웃음을 띠고 얘기를 했다.“지금 사업이 크고 잘 되니까 우리는 눈에 차지 않는 거야?”조은혁은 잔을 들어 이지훈과 잔을 부딪쳤다. 단번에 털어 넣고 이지훈은 다시 술을 따르고 두 사람은 점점 더 많이 마시게 되어 결국 둘이서 양주 두 병을 다 마셨다.사모님들이 다 전화를 걸어왔지만, 남자들은 모두 귀가하기 싫은 모습들이었다.“조 대표님,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아이고, 저도 먼저 가야겠네요! 집에 마누라가 단속이 심해요.”“조 대표님, 이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집에 있는 사나운 살쾡이 마누라가 난리를 피우네요...”...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고 조은혁은 진한 색의 소파에 기대 이지훈을 힐끔 쳐다보았다.“이 대표 집사람은? 상관 안 해?”“재작년에 이혼했어.”이지훈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고개를 들어 느긋하게 연기를 내뿜었다.“함께 살 수가 없어! 조 대표랑 연희 씨처럼 말이
이 일은 새벽 두 시까지 이어졌다. 조은혁은 별장에 돌아와 차에 잠시 앉아있었다. 주위는 한없이 고요했고 별장의 불은 다 꺼져 있었고 정원에 있는 조명들만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어 엄동설한에 아주 한산하고 쓸쓸해 보였다...한참 후, 그는 차 문을 열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은 은은한 빛만 있었고 그는 불을 켜지 않은 채 2층까지 더듬어 올라갔다. 안방에는 달빛이 부드럽게 비춰 들어왔고 박연희는 두 아이의 곁에서 단잠에 빠져있었다. 2미터가 되는 킹사이즈 침대에 여전히 그의 자리는 없었다...조은혁은 침대 곁에 서서 썰렁한 달빛을 받으며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정장 외투를 벗고 흰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박연희는 술 냄새에 눈을 떴다.“깼어?”조은혁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보고 있었고 차가운 말투에는 한줄기의 온기도 없었다. 대답하기도 전에 조은혁은 그녀의 위로 누웠다...박연희는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그의 몸 아래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다.“은혁 씨! 당신 미쳤어요?”“그래, 나 미쳤어!”...그는 마음에 화가 있어 일부러 거칠게 그녀를 대했다. 조은혁은 평소처럼 다정하게 그녀를 쓰다듬지도 않고 이렇게 뻣뻣한 상태로 관계를 하려고 했다. 박연희는 자신이 도망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드물게 다정한 모습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손님방으로 가요! 그리고... 콘돔도요!”조은혁이 멈췄다. 그는 박연희를 내려다보았는데 한줄기 달빛에도 그는 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울듯 말 듯한 모습에도 그는 마음이 수그러들지 않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왜 나를 다른 사람한테로 밀어냈어?”박연희는 대답할 기회도 없었다. 조은혁의 몸은 달아오른 철 덩어리처럼 놀랍게 뜨거웠다. 그는 박연희를 안고 옆방으로 갔는데 손님방이 아니라 그의 서재였다. 짙은 색의 나무 책상은 하나도 편하지 않고 딱딱하고 차가웠지만, 조은혁은 소중히 다루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이렇게 거칠고 상스러운 적이 없었다. 몸을 파는
이름을 듣자 박연희는 순간 넋이 나갔다. 조은혁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보았는데 박연희의 미간에는 은은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 이는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를 물씬 풍겨 아주 사람을 끌었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췄다.박연희는 흠칫 놀랐다. 한참 그녀는 반항하는 것도 있고 조은혁이 그녀의 입술을 머금으며 자신을 밀어붙이려 했을 때야 다급하게 몸을 움츠리고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박연희의 목소리가 살짝 떨고 있었다.“오빠가 왔어요.”조은혁은 그녀의 얇은 어깨를 살며시 누르고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았다. 동시에 그는 그녀의 대고 뜨거운 모래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우리는 정식 부부야. 박연준이 온다고 해도 문제가 돼?”박연희는 그를 밀어냈다.“나는 당신처럼 뻔뻔하지 못하겠네요.”박연희는 그를 앞서 밖에 있는 고용인에게 말했다.“오빠한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세요! 조 대표님이 좀 있다가 손님맞이를 하러 간다고 전하세요.”고용인은 지시를 듣고 자리를 떴다. 조은혁은 몸을 일으켜 하얗지만 다부진 상체를 드러냈다. 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박연희를 보면서 가볍게 웃었다.“정말 모질어! 어젯밤에 내가 술을 마시고 일까지 치른 마당에 절대 네 오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나를 불구덩이로 밀다니.”박연희는 옷을 정리하고 일어서서 담담하게 말했다.“마음이 모진 거야 누가 당신보다 더할 수 있겠어요?”조은혁은 손을 뻗어 바닥에 널브러진 바지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여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바지를 입고는 지퍼를 채우며 지난 밤의 일이 생각나 곱씹었다.격렬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는 간단하게 씻고 느긋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박연준은 뒷짐을 지고 일 층에 서 있었는데 아마도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고 있는듯했다. 하지만 온몸은 경직되어 있었고 조은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조은혁은 계단에 서 있었다. 현재 그의 기분은 아주 복잡했는데 박연준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만들고 그
박연준은 일어서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소용없는 짓이었다.“오빠!”박연희는 빠르게 달려 내려와서는 힘겹게 박연준을 일으키고 그가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또 한 번 불렀다.“오빠!”그리고 박연희는 눈물을 흘렸다. 그때 박연준의 말을 듣지 않고 조은혁과 몰래 연락해서는 안 됐었다. 그로 인해 이후 진흙탕 속에 점점 더 빠져들어 가게 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남매가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만남이 얼마나 어렵고 마음이 쓰린 건지... 두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박연준은 얼굴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예전처럼 다정하게 동생의 머리를 어루만졌고 그녀에게 원망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박연준이 말했다.“지금 바로 너를 데리고 갈게.”박연희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조은혁의 손에 있는 증거뿐만 아니라 진범이와 민희를 봐서라고 그녀는 떠나버릴 수가 없었다. 조은혁과 몇 년간의 부부생활을 하면서 그가 어떤 성격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박연준은 계속 말하고 싶었지만, 박연희는 그를 부축하고는 고용인에게 얘기했다.“약상자를 가지고 접대실로 와요.”고용인은 공손하게 말했다.“네, 사모님.”...두 사람은 접대실로 들어갔고 박연준은 동생을 심란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왜 안 간다는 거야?”박연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위로 찢어진 그의 옷을 베어내고는 고용인이 약상자를 가지고 오는 것을 기다려서 조심스럽게 그의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 거의 끝났을 때쯤에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오빠, 오빠는 그냥 내가 누군가의 보살핌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해. 혼자서 아이를 둘씩 키우려면 얼마나 힘들겠어. 은혁 씨는 진범이의 친아빠니까 박대하지는 않아. 만약 은혁 씨와 이혼하고 떠나서 앞으로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또 다른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밖에 더 되겠어? 그 사람은 은혁 씨보다 돈이 없을 수도 있고 은혁 씨처럼 나한테 아낌없이 대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오빠, 나 지금 이렇게 사는 게 좋아, 아주 만족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