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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현실 감각을 일깨워 주지

차 안에 삭막한 정적이 감돌았다.

박태준이 말했다.

“그건 당신이 멍청하고 현실 감각이 없어서 그딴 생각이나 하는 거야.”

“정말이지….”

신연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도 아닌 거랑 무슨 대화를 한다고.”

말을 마친 신연지는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 박태준이 음침한 표정을 하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바깥에서 서성이던 이경수는 안에서 반응이 없자 다급한 목소리로 신연지를 불렀다.

“연지 씨, 괜찮아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하, 눈물 나는 관심이군.”

남자는 싸늘한 표정으로 신연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직 이혼도 하기 전에 벌써 바람을 피우는 거야? 그런데 남자 보는 안목은 여전히 형편없군.”

신연지는 더 이상 설명도 하기 귀찮아졌다.

“그래. 남자 보는 안목이 형편없으니까 당신이랑 결혼했지. 그리고 이경수 씨랑은 그냥… 친구야. 당신이 떳떳하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도 다 그렇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런 거 아니거든?”

그를 약 올리는 건 상관없지만 그렇다고 무고한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대체 뭐가 남자의 신경을 건드린 건지, 박태준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당신 애인은 당신이 유부녀라는 거 알아? 우리가 차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목격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인간은 대체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신연지는 짜증이 치밀었지만 누구 한 명 죽일 것 같은 남자의 눈빛을 보자 가슴이 철렁했다.

박태준은 행동으로 자신이 한 말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거칠게 그녀의 몸을 더듬으며 입술을 부딪혔다.

신연지가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버튼을 눌러 의자를 뒤로 젖힌 뒤,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박태준이 이렇듯 통제를 잃은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이거 놔!”

그 순간, 그녀의 움직임과 함께 차체가 흔들렸다.

창문을 노크하던 소리가 사라졌다. 아마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신연지는 동작을 멈추고 분노한 눈빛으로 박태준을 노려보았다. 거친 키스로 입술이 퉁퉁 부어 올랐다.

박태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미간을 마사지하며 말했다.

“안 건드릴 테니까 저 인간 보내.”

그가 다시 자리로 돌아간 순간, 신연지는 황급히 옷매무시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차에서 내려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이경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연지 씨, 괜찮아요? 혹시 누가 괴롭혔나요?”

차문이 열리던 순간, 그는 운전석에 앉은 남자를 발견했다. 싸늘한 표정과 온몸에 두른 명품들, 딱 봐도 평범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신연지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그에게 말했다.

“아무 일 없었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어서 들어가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택시를 불러 세우고 새로 계약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온 신연지는 욕실로 가서 샤워부터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녀는 이혼 전문 변호사에게 연락했다.

“장 변호사님, 만약 제가 법원에 소송을 건다면 승소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재산분할은 힘들 것 같습니다.”

변호사의 대답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였다.

“재산을 포기한다면요?”

신연지도 처음부터 박태준의 돈을 바라고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물러나기는 너무 억울해서 그의 기분을 더럽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도 박태준 대표의 의사가 제일 중요합니다. 소송은 진행할 수 있지만 박 대표 쪽에서 끝까지 싫다고 나온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거에요. 명확한 가정 폭력의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은 패소할 가능성이 큽니다. 다시 상소하려면 최소한 3개월이 걸릴 거예요.”

신연지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박태준이 이혼을 반대하는 이유는 아마 이혼을 그녀가 먼저 제기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이 시점에 그녀가 이혼 서류를 언론에 뿌리기라도 한다면 전예은의 이미지에도 타격이 클 것이다.

비밀 결혼한 사이인데 법정 소송까지 간다면 모두가 그들이 부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전예은은 불륜녀 타이틀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예은을 위해서라면 박태준은 이혼에 순순히 동의할 가능성이 컸다.

신연지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변호사님, 이혼 서류를 다시 작성해서 그쪽에 보내세요. 거부한다면 법원에 소송을 신청하겠다는 의사도 밝혀주시고요.”

전화를 끊은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아침, 박태준은 장 변호사로부터 이혼 서류를 받았다.

박태준에게 오는 퀵이나 택배는 진영웅이 먼저 받아서 선별하는 과정을 거친다. 서류를 확인한 진영웅은 등 뒤에 식은땀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사무실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상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대표님, 그냥 시위하는 걸 수도 있습니다.”

박태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 요즘 뭐 하고 다녔는지 좀 알아봐.”

대체 무슨 금광이라도 찾았기에 이렇게까지 자신을 자극하는지 궁금했다.

신연지의 행적을 조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점심 때가 되자 진영웅에게서 정확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신연지 씨는 현재 경원 작업실에 취직하였습니다.”

“경원?”

“골동품 복원 작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작업실인데 업계에서는 꽤 유명합니다. 난이도가 높은 골동품만 취급하는데 여기 면접을 통과한 사람들은 업계에서 꽤나 인정을 받는 인재들입니다.”

박태준은 그 말을 듣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는 신연지의 과거 직업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대학교를 고고학과를 나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문물 복원에 재능이 있었단 말이야?”

“그건 아니고 거기서 청소부로 일하는 것 같았습니다.”

진영웅은 정확한 조사를 위해 직접 경원에 방문한 적 있었다. 그때 신연지가 바닥을 청소하는 모습을 직접 봤고 직원에게 사실확인까지 했다.

“청소부?”

박태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재벌 사모님 생활이 정말 질렸나 보군. 서민 체험을 하러 간 거네. 내가 너무 오냐오냐 해줬어. 현실 감각을 좀 일깨워 줄 필요가 있겠어.”

진영웅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는 신연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재경의 안주인이면서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비서실에서 잔심부름이나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갑갑하고 억울했을까? 정성 들여 준비한 식사도 박태준에 의해 쓰레기통으로 버려졌으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도시락을 박태준의 얼굴에 부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가 봐.”

진영웅을 내보낸 뒤, 박태준은 신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밀한 복원 작업을 하고 있던 신연지는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움찔 놀라며 공구를 떨어뜨렸다.

안 그래도 기분이 나빴는데 발신자를 확인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아마 지금쯤 변호사가 보낸 이혼 서류를 받은 모양이었다.

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남자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전해졌다.

“신연지, 요즘 집값이 얼마나 비싼지는 알아?”

“무슨 소리야?”

“그 가련한 월급으로 변변한 월세나 구할 수 있겠어?”

자신이 너무 과했다고 생각했는지 박태준은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부 사이에 다툼이 있는 건 지극히 정상이야. 하지만 그만큼 난리를 피웠으면 수그러들 줄도 알아야지. 난 당신이랑 밀당할 시간도 없고 정력도 없어. 오늘 저녁에 당장 집으로 들어오면 요즘 그 소란 피운 거 없었던 일로 해주지.”

신연지는 그 말을 듣고 자존심이 확 상했다.

“박태준, 당신 미친거 아니야? 내가 아무리 가난해져 거리에서 동냥을 하더라도 절대 그 집에는 다시 안 돌아가! 그냥 서로 편하게 이혼 도장 찍자. 법원까지 가면 당신에게도 별로 좋지 않잖아!”

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어 버리고 그의 연락처를 블랙리스트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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