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영의 목소리가 너무 높아 주위에 순간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그중에는 박시언과 김하린도 포함돼 있었다.뭇사람들에게 소은영은 그저 까칠하고 교양 없는 여자로만 낙인됐다.허리가 구부정한 정원사는 쪼그리고 앉아서 바닥에 떨어진 장미를 주우며 쉴 새 없이 사과했다.주위 시선을 느낀 소은영은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재빨리 미안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제가 너무 경황이 없었어요. 괜찮으시죠 어르신?”김하린이 가까운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소은영은 이젠 더 이상 수습이 불가했다. 지금 이러는 건 오히려 가식적으로밖에 안 보였다.그 시각 소은영도 박시언과 나란히 서 있는 김하린을 발견했다.“쟤가 여길 왜 와?”박시언은 미간을 구겼다.김하린은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는데 정말 소은영이 올 줄 몰랐던 눈치였다.그럼 설마 소은영 스스로 오게 된 걸까?김하린은 침묵했다.이 전개는 전생과 달랐다. 그녀의 기억대로라면 전생에 박시언은 소은영을 데리고 연회에 참석했고 그 자리에서 소은영은 서호철 어르신의 찬사를 받으며 순조롭게 출국길에 올라섰다. 졸업 후에는 박시언과 서호철 어르신의 후원으로 탄탄대로만 걷게 되었고...김하린은 오늘 박시언이 소은영을 데려오지 않았으니 그녀가 연회장에 안 나타날 줄 알았다.뜻밖에도 소은영은 끝까지 제 발로 찾아오고 말았다.“대표님!”이 비서가 연회장의 인기척 소리에 재빨리 달려왔다.박시언은 이미 불쾌한 어투로 변했다.“누가 얘 들여보냈어?”“제가...”이 비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소은영 씨가 대표님께 도움이 될 줄 알았어요.”박시언은 미간을 문질렀다.그는 전에 늘 소은영에게 관대했다.하지만 이런 장소에 김하린을 데려온 이상 소은영은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다!“소은영 씨 모든 게 낯설 텐데 얼른 가봐.”김하린이 무심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박시언은 당황해하며 어쩔 바를 모르는 소은영을 쳐다보다가 결국 혼자 내버려 두기가 안쓰
박시언의 표정을 보니 그 부지가 대박 난다는 걸 진작 알고 있는 듯싶었다.하지만 그는 과감하게 매입을 포기하고 스티븐에게 그 부지를 양보했다.이 또한 박시언다운 선택이다.김하린이 진지하게 말했다.“난 그저 칭찬 몇 마디 한 것뿐이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박시언은 미간을 구기고 그녀의 말을 되짚어보았다.‘하긴, 김하린 머리로 그 부지가 향후 몇 년 사이에 가치가 부상한다는 걸 알 리가 없지. 내가 괜한 생각 했네.’“그래. 그러길 바랄게.”박시언은 더는 김하린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소은영을 데리고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러 갔다.소은영은 떠나기 전에 미안함이 섞인 눈빛으로 김하린을 쳐다봤다.애써 감춘다고 노력은 했지만 김하린은 여전히 그녀의 눈빛 속에 숨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보아냈다.김하린은 고개 들어 샴페인 한 잔을 원샷했다.그녀는 지금 다른 사람들 눈에 남편을 뺏긴 패배한 여자로 거듭났다.남편 박시언은 신혼인 아내를 내팽개치고 다른 여자 파트너와 함께 사업가들과 인사를 나누러 갔다. 김하린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 황당한 경우가 있을까?김하린도 답답할 따름이었다. 원래 이 기회를 빌려 대기업 회장들과 친분을 쌓으려 했는데 박시언이 가버리니 그녀 홀로 선뜻 그분들 앞에 나서기가 어려웠다.‘어떻게 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저 사업가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김하린은 주위를 쭉 둘러보다가 가까운 곳에 놓인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찾았다!’김하린은 우아하게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 원래 피아노를 치던 분과 짤막하게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어려서부터 김씨 일가의 따님으로 살아오며 많은 걸 배웠었다. 전생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는데 지금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이야.오랜만에 만져보는 피아노인지라 조금은 낯설었지만 습관이라는 건 쉽게 변하지 않는다.김하린은 곧장 현란한 손놀림으로 피아노를 연주했다. 연회장에 순간 지금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은은한 피아노곡이 흘러나왔고 다들
잠시 후 소은영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녀는 어느덧 하얀색 드레스로 갈아입었다.이에 박시언이 물었다.“왜 그래?”“방금 화장실에서 옷 갈아입고 나올 때 하린 언니 본 것 같아요.”“김하린?”소은영이 머리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지난번 그 남자분과 함께 있더라고요. 두 분 꽤 친해 보이던데...”그녀는 박시언의 표정을 살피며 재빨리 말했다.“제가 잘못 봤을 수도 있어요. 언니가 왜 서도겸 같은 사람이랑 친하겠어요... 서도겸 그 사람 망명자라면서요?”“김하린 진짜...”박시언이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그는 저번에 이미 서도겸이 김하린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이 여자가 정말! 위험이 있으면 피해 다녀야지 왜 서도겸 같은 망명자와도 가깝게 지내는 거야?!’박시언은 저도 몰래 가슴이 답답했다.그 시각 김하린은 화장실에서 나와 불만 가득한 박시언의 얼굴을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방금 뭐 하러 갔어?”박시언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나? 화장실 다녀왔는데.”김하린은 영문도 모른 채 그에게 답했다.이때 소은영이 앞으로 나서서 일부러 친한 척하며 김하린의 손을 잡았다.“언니, 저 아까 봤어요. 서도겸 씨 착한 사람 아니에요. 언니 절대 속으면 안 돼요.”김하린은 뒤늦게 손을 빼냈다.소은영은 허공에 손이 붕 뜬 채 속상한 얼굴로 말했다.“언니, 저 일부러 대표님께 고자질한 거 아니에요... 그냥 서도겸 진짜 좋은 사람 같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서도겸이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알아서 판단해요. 딴 사람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아 줄래요?”김하린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저는...”소은영은 입술을 꼭 깨물고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에 박시언이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은영이는 널 위해 그런 거잖아. 분수도 모르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 건드리지나 마.”소은영이 박시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너무 심하게 몰아붙인다고 원망하는 듯싶었다.이 광경을 본 김하린은 순간 소은영이야말로 박시언 아내인 것
원래 타임 라인이라면 3년 후 서호철이 사망한 후에야 서도겸의 신분이 밝혀진다.그렇다면 설마 그녀의 환생으로 무심코 모든 것이 바뀐 걸까?그 시각 소은영은 서호철의 말을 듣고 얼굴이 백지장이 되었다.‘서도겸 소문에 고아였잖아? 서호철의 손자라니? 이게 말이 돼?’방금 그녀가 한 말을 서호철이 고스란히 들었을 게 뻔하다!서호철의 심기를 건드리면 이번 생은 금융계에서 어떤 활로도 찾을 수 없다.소은영은 멘탈이 탈탈 털린 채 박시언에게 구원의 신호를 보냈다.“어르신, 은영이가 생각이 짧아서 말실수했어요. 아직 어리다 보니 부디 노여움 푸세요.”서호철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자네 옆에 업계 천재가 나왔다고 들었는데 인제 보니 별 거 아니구먼.”소은영은 사색이 되었다.그녀는 이미 서호철에게 제대로 낙인이 찍혔다.김하린은 이 광경을 쭉 지켜보았다.이렇게 된 이상 박시언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남의 집 귀한 손자를 그딴 식으로 헐뜯었으니 연회장에서 내쫓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체면을 준 셈이다.박시언은 입술을 앙다물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한편 서호철은 한결 부드러운 눈빛으로 김하린을 바라봤다.“김씨 일가의 여식이라고 했나?”김하린은 정신을 가다듬고 먼저 말을 걸어오는 어르신께 머리를 끄덕였다.“네, 김하린입니다.”“김종현 그 자식 젊었을 때 잘생긴 줄 몰랐는데 손녀가 이렇게 예쁘네. 40년 전에 나랑 자네 할아버지가 의형제를 맺었거든. 눈 깜짝할 사이에 자네가 벌써 이렇게 컸어.”‘의형제?’김하린의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는 항상 한량 같았고 집안일은 전혀 묻지 않으셨다. 또한 너무 일찍 돌아가서 서호철 어르신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는 아예 들은 적이 없다.김하린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일 때 서호철이 대뜸 그녀에게 물었다.“결혼은 했고?”김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뉘 집 자식이야?”김하린은 옆에 있는 박시언을 힐긋 살폈다.서호철은 박시언을 보더니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박동준의 손자였네.
배주원의 차가 가까운 곳에 있는 미완성 건물 앞에 도착했다.“X발 손정원 이 새끼가 어떻게 사람을 이딴 곳에 가둬 두냐고?!”배주원은 주위를 쭉 둘러보았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들리는 거라곤 본인의 메아리뿐이었다.서도겸은 차에서 손정원을 끌어냈다. 그는 허둥지둥거리다가 겨우 제대로 섰다.배주원이 앞으로 다가와 발로 툭 차며 물었다.“말해! 하린 씨 어디에 가뒀어?”“그건, 쟤네들이 숨긴 거라. 원래 그 쌍... 김하린 씨를 따끔하게 혼낼 생각이었어요. 돈 받으면 이 건물 폭발시켜서 박시언 목숨도 따내고 거액의 돈도 챙겨서 도겸 씨한테 공을 세워줄 생각이었는데 김하린 씨랑 도겸 씨가 아는 사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폭발시켜? 여길 폭발시킨다는 거야?”배주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설마 시한폭탄?”손정원은 겁에 질린 채 머리를 끄덕이며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었다.서도겸의 눈가에 싸늘한 빛이 감돌았고 손정원은 두려움에 휩싸여 침을 꼴깍 삼켰다.“주원아, 얘 꽁꽁 묶어둬. 폭탄 터지거든 얘부터 죽일 테니까.”손정원은 황급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지만 결국 배주원에 의해 사지가 묶였다.미완성 건물은 구조가 매우 복잡했고 지금 서도겸은 김하린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했다. 급선무는 주변에 있는 폭탄을 제거하는 일이다.바로 이때 검은색 벤틀리가 건물에 도착했다.서도겸은 이 차 주인이 박시언이란 걸 한눈에 알아봤다.“대표님, 여기 어디예요... 저 무서워요...”소은영이 두려운 표정으로 박시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박시언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넌 차에 있어. 내려오지 말고.”소은영이 머리를 끄덕였다.배주원은 차에서 내리는 박시언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와이프가 납치당했는데 애인이랑 알콩달콩할 새가 있어요?”“대체 누가 김하린 납치했어?”박시언이 싸늘한 눈길로 서도겸을 쳐다봤다.“내 기억이 맞다면 손정원은 서도겸 씨 부하일 텐데요?”서도겸이 차갑게 쏘아붙였다.“얘가 제멋대로 일을 벌인
박시언의 말을 들은 소은영은 머리를 숙이고 얌전하게 그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모습은 화들짝 놀란 토끼를 방불케 했다.박시언의 싸늘한 시선은 전생과 똑같았다. 김하린은 순간 마음이 깊게 가라앉았다.고맙다고 말하려 했는데 지금 보니 박시언은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었다.“나 너무 피곤하네. 두 사람 편하게 있어.”김하린이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는 이젠 박시언과 소은영에게 아예 관심이 없다.오늘 밤에 손정원이 쉽게 그녀에게 손을 쓸 수 있다는 건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설명한다.김하린은 언제까지 박시언에게 기댈 순 없다. 자신을 보호할 능력을 슬슬 갖추어야 한다.다음날, 김하린은 일찍 외출 준비를 했다. 이제 막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최미진이 거실에 늠름하게 앉아 계시고 소은영이 옆에 서 있었다. 보아하니 그녀는 금방 운 모양이다.“할머니?”김하린이 미간을 구겼다.최미진은 평소에 더 빌리지에 거의 오지 않는데 오늘은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걸까?“시언이가 그러는데 너 2조 원 주고 땅을 샀다며?”최미진은 살짝 죄를 묻는 식으로 그녀에게 캐물었다.김하린은 아래층으로 내려와 어르신의 옆에 앉아서 차를 따라드렸다.“네, 맞아요.”“어젯밤엔 원수를 져서 납치까지 당했고?”“네...”김하린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우리 집안은 평범한 집안이 아니잖니. 결혼한 여자는 얼굴을 자주 드러내면 못 써. 사업은 남자들이 알아서 하는 거고 너는 지금 임신에 가장 신경 써야 해. 딴마음 품은 것들이 그 틈을 노릴라.”최미진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옆에 있는 소은영을 쳐다봤다.김하린도 그녀를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은영의 눈시울이 또다시 빨개졌다.“할머니, 저는 단지...”“그 입 닥쳐. 너 따위가 어딜 함부로 끼어들어 끼어들긴!”소은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시언의 안목이 점점 후지단 말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개나 소나 다 들이는 거야!”최미진이 소은영을 대하는 태도를 지켜보면서 김하린은 저도 몰래 전생이 떠올랐다.전생에도
오직 박시언만이 소은영에게 감쪽같이 속고 있다.그는 소은영을 좋아하니까 그 속셈을 보아내기 힘든 법이다.“됐어요, 뭐 딱히 큰일도 아니고. 은영이 오늘 수업 있으니 일단 학교까지 바래다줄게요.”박시언이 소은영에게 곁눈질했다.소은영은 대뜸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이에 최미진이 싸늘하게 말했다.“나 오늘 하린이랑 쇼핑할 거다. 너도 안 바쁜 것 같으니 우리랑 같이 가.”“그렇지만 은영이...”“이 비서 시키면 돼. 명색이 모건 그룹 대표라는 자가 신분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야 되겠니?”최미진이 거침없이 쏘아붙였다.소은영은 하는 수 없이 입술을 꼭 깨물고 말했다.“대표님, 이 비서님이 저 학교까지 바래다주면 돼요. 할머니 노엽게 하지 마세요.”그녀는 최미진을 향해 예의 바르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다만 최미진에게 이런 수단은 전혀 안 통했다.박시언이 입술을 앙다물었다.“문 앞까지 바래다줄게.”소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최미진은 박시언이 소은영을 데리고 밖에 나간 후에야 김하린에게 시선을 돌렸다.“시언이가 아직 어려서 저런 여우 년에게 쉽게 홀릴 수 있어. 네가 많이 신경 써야 해.”김하린은 겉으론 머리를 끄덕였지만 속으론 두 사람이 진도가 더 빨리 나가길 바랐다.“너 요즘 시언이한테 점점 더 무심하더라.”최미진이 김하린의 손을 잡고 말했다.“얼른 시언의 마음 사로잡아야 한다. 적어도 통통한 아들 녀석을 낳아야지. 아이만 낳으면 남자 마음 확 사로잡을 수 있어.”“네. 알겠어요, 할머니.”김하린이 웃으며 답했다.하지만 정작 그녀는 박시언의 마음을 사로잡기는커녕 아이를 낳을 생각조차 없었다.박시언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결혼했지만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으니 임신은 더 불가능한 일이다!전생에 모진 애를 써서 박시언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그는 소은영 말고는 아무도 자기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다고 여겨왔다.김하린은 고작 27살에 난산으로 수술대에서 생을 마감했다.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마저 박시언은 그녀가 빨리 죽
하지만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박시언이 자신을 믿어주길 바라지 않으니까.이어서 김하린과 박시언은 나란히 차에 올라탔고 심지어 박시언은 일부러 친한 척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 모든 것은 단지 최미진 앞에서 쇼하는 것뿐이다. 김하린은 누구보다 잘 안다.박시언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커왔다. 그는 최미진을 매우 존중하고 지극히 효도하고 있다.김하린도 더는 까발리지 않고 적당하게 박시언에게 맞춰주며 연기했다.“그 땅은 어떻게 처리할 셈이냐?”최미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다만 이 말은 김하린에게 물은 게 아니라 박시언에게 묻고 있었다.박시언이 앞에 앉아서 백미러로 김하린을 힐긋 쳐다봤다.“하린이가 산 땅이니 알아서 처리하겠죠.”최미진은 김하린에게 시선을 돌렸다.“부지에 관한 일은 시언이한테 맡겨. 여자는 남편 뒷바라지 잘하고 아이만 잘 키우면 돼.”“할머니, 박씨 일가의 일은 당연히 시언이가 관리해요. 다만 이 땅은 제가 우리 집안 어르신들을 대신해서 산 거라 그분들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제 손도 안 거치거든요.”김하린의 말을 들은 최미진은 말투가 조금 바뀌었다.“나중에도 이런 일은 되도록 간섭하지 마. 넌 이미 시언이랑 결혼했으니 모든 행동이 박씨 일가를 대표하고 있어.”“네, 할머니.”김하린이 순순히 대답했다.최미진이 어떤 성격인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이 타이밍에 대뜸 독립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엄청난 번거로움만 살 게 뻔하다.“시언아, 난 저녁에 고스톱 약속이 있어서 네가 하린이 집까지 바래다주거라. 업무는 잠시 내려놔. 아내를 챙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니?”최미진의 말속에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박시언은 미간만 찌푸릴 뿐 더 많은 불만을 표출할 순 없었다.“알았어요, 할머니.”김하린은 백미러로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바로 알아챘다. 그는 분명 또 그녀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이거 참 괴로워도 말 못 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기분이었다.김하린은 숨을 깊게 몰아쉬며 억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