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절대 안 받는다.다만 이 사람도 집착이 꽤 심했다. 그녀가 안 받으니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결국 송재이는 마지못해 통화 버튼을 눌렀다.“재이 씨, 지금 시간 돼? 밥 사주고 싶은데.”전화기 너머로 익숙하면서도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송재이는 순간 핸드폰을 쥔 손이 움찔거렸다. 역시 양반은 못 된다고.상대는 바로 지민건이었다!전에 그녀는 지민건의 모든 연락처를 블랙리스트에 넣었다.지금 걸어온 이 번호는 다른 사람 휴대폰을 빌렸거나 혹은 새로 구한 전화번호거나 둘 중 하나이다.어찌 됐든 송재이는 이젠 지민건이란 사람에게 생리적 혐오감을 느낀다.목소리만 들어도 온몸이 불편해진다.제일 먼저 든 생각은 식사 장소에 나가기 싫다는 것이었다.지민건은 지금 여기저기 쫓겨 다니는 신세가 돼버렸다.한 무리의 빚쟁이들과 뿔뿔이 투자금을 빼가는 주주들 때문에 그는 이미 제 코가 석 자이다.그런 인간이 송재이에게 밥을 사줄 여유나 있을까?이중엔 분명 또 어떤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게다가 그는 송재이의 아이까지 해친 장본인이다.송재이는 이런 경험도 적고 너그러운 아량도 못 돼 자신의 원수와 평화롭게 대면할 순 없다.다만 거절하려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삼키고 말았다.유중건이 연루되어 있으니까.송재이는 일단 설영준을 걸치지 않고 유중건의 돈을 돌려받으려고 했다.물론 그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보고 싶었다.또한 지민건이 이런 처지가 된 게 진짜 그 사람 때문인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럴만한 능력이 있을 것 같았다.몇 초 동안 침묵한 후 송재이는 끝내 그의 요구에 응했다.“그래, 좋아.”...한편 식사 장소는 송재이가 정했다.그곳은 오픈된 야외 식당이었다.송재이는 일부러 룸을 피했다. 지민건이 갑자기 과격한 행동을 보일까 봐서.그녀 눈에 이 사람은 일찌감치 이성을 놓은 사람이다.사면초가에 빠진 지금, 자포자기하는
지민건 회사의 자금줄이 갑자기 끊긴 건 경주의 어느 한 거물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상대의 정체에 대해서는 업계 내부의 모든 이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다들 알고만 있을 뿐 감히 발설하지 못했다.요 며칠 주현아는 집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이뤘다.지민건의 일이 동네방네 소문이 쫙 퍼졌다.설영준은 분명 무언가를 알게 되어 지민건을 궁지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주현아는 바로 짐작이 갔다.지민건이 주현아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한때 그의 비서였던 박경은 둘 사이가 틀어지자 이 사건을 도화선으로 삼고 수행비서라는 공식적인 신분을 이용해 악의적으로 지민건 회사의 계열사를 파산에 이르게 했다.사실 대부분 돈은 박경이 챙겨서 도망갔다.그리고 모든 빚쟁이는 지민건에게 책임을 따져 물었다.그는 지금 본사를 간신히 운영해 나가지만 이 또한 거의 무너질 지경이다.그러니까 주현아는 제발 나 몰라라 하지 말고 도움의 손길을 건네주길 바랐다.한편 주현아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지금은 그녀 본인조차도 밤낮없이 걱정에 휩싸여 있는데 언제 딴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있을까?그녀는 이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봐 너무 두려웠다.아빠 회사 상황은 어떤지, 아직 괜찮은지 무심코 묻기도 했었다.잔잔한 바람이 스쳐도 그녀는 심장이 바짝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다만 설영준은 일부러 그녀를 입맛이 달아오르게 하고 있다.그녀가 불안해할수록 그는 더 침착하고 차분했다.상대가 아무런 인기척이 없으니 주현아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그날 지민건과 밥을 먹은 후 송재이는 확신하게 되었다. 설영준은 바로 그녀가 유산 당한 진실을 알게 되어 지민건에게 잔혹한 수법을 쓴 것이다.지민건을 파산하게 한 것도 설영준의 의도였다.한편 송재이는 유은정을 도와 하루빨리 방법을 생각해서 유중건이 투자한 금액을 돌려받아야 한다.지민건은 이미 최악의 상황이라 더는 신경 쓸 게 없었고 가진 돈도 전혀 없었다!송재이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결국 또
한 달 만에 보는 설영준은 조금 야윈 듯한 모습이었다.하지만 그윽한 두 눈동자는 여전히 눈부셨고 강렬한 포스가 은은하게 뿜어져 나왔다.그는 훤칠한 키에 날카로운 눈매를 지녔다.그녀 앞에서 설영준은 자연스럽게 머리를 살짝 숙였다.“할 말이 있어서...”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설영준은 사실 지난번에 송재이가 지민건과 함께 중식당에 있는 모습을 길옆에서 지켜보았었다. 송재이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그때 서로 불쾌하게 헤어진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로 생각했다.설영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그는 이미 아이의 유산에 관한 진실을 알고 있다.유산을 겪은 후 그녀 홀로 아이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마주했을지, 그 힘들었던 나날을 어떻게 견뎌왔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물론 지난번에 그녀를 향한 ‘불신’으로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를 남겼을지도 알고 있다.설영준은 그녀를 스쳐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송재이도 정신을 차리고 얼른 따라 들어왔다.“영준 씨한테 할 얘기 있는데 지금 시간 돼?”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설영준은 손을 들어 사무실이 위치한 층수를 눌렀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이 남자의 안색을 살폈다.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고 딱히 거절하지도 않았다.그렇다면 묵인은 곧 허락이겠지?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송재이는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아이를 잃은 후 그녀는 이 남자를 단독으로 마주할 때마다 유난히 쉽게 연약해지고 전보다 마음이 자꾸 예민해진다.두 사람은 더 이상 함께할 가능성이 없지만 그녀의 몸과 마음은 왜 이렇게 통제받지 못한 채 이 남자의 강렬한 분위기에 휩쓸리는 걸까?이 남자가 첫사랑이자 처음 잠자리를 가진 남자라서? 또한 그녀를 임신하게 한 남자라서?이런 경험과 느낌은 아마 이번 생에 다른 남자를 만나도 충분히 구별이 가능할 것이다.설영준...이름 석 자가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다.엘리베이터가 서서히 올라갔다.바로 이때 주변이 갑자기 확 어두워졌다.머리 위의 전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발
송재이는 순간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설영준이 말한 ‘내 사람’은 그녀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녀가 임신한 아이를 말하는 건지 말이다.재벌은 늘 그렇듯 아이를 중시했다.결혼 후든 전이든 아이만 남기는 경우가 태반이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품에 안겨 작은 소리로 울먹였다.정신을 차린 설영준이 송재이를 더 꼭 끌어안았다.지금 설영준의 마음은 부드럽기 그지없었고 말투도 온화함이 극을 달했다.“저번엔 내가 오해했어. 아무리 화난다 해도 그런 말은 하지 마. 나는 너 그런 말 하는 거 싫어.”설영준은 이렇게 말하며 그녀를 안은 채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둠 속에서 엘리베이터 무전을 찾아 통화 버튼을 여러 번 눌렀다.수리하는 사람들이 오기 전에 송재이는 계속 설영준의 품속에 안겨 있었다.송재이는 울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나를 얕잡아 보면서 방탕하고 음란한 여자라고 생각했잖아.”“아니야.”“아니긴, 맞아...”“...”설영준은 말문이 막혔다.송재이의 울음에서 진실과 거짓은 얼마 정도 될까?심장이 벌렁대는 건 확실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재이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지나간 화제를 다시 이어갔다.“지민건을 처리하는 건 나도 반대하지 않을게. 근데 은정이 아버지가 전에 지민건의 회사에 투자한 돈이 있거든? 지금 이런 상황에 그 돈이 수포가 되면 어떡하지?”말이 끝나기 바쁘게 엘리베이터 안은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설영준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송재이는 분위기가 딱딱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송재이는 아무 말 없이 설영준이 대답하기를 기다렸다.결국 설영준이 이렇게 말했다.“친구 아버지 이름이 뭐라고?”“유중건.”“알았어.”설영준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 말을 뒤로 설영준은 더는 말이 없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하여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 말하려는데 설영준이 말을 이어갔다.“유 대표님한테 프로젝트 하나 줄게. 지민건 회사에 얼마를 투자한 거야?”“아마
숨을 헐떡이던 송재이가 고개를 들더니 설영준이 한 말을 곱씹어봤다.설영준은 송재이가 알아듣지 못했음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침대에서 뭐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힘들다고 앵앵거리잖아.”설영준은 이렇게 말하며 송재이의 손을 놓고는 성큼성큼 테이블로 향했다.송재이는 그제야 설영준이 잠자리에서 보여준 그녀의 표현을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쳇, 그래도 3년이라는 시간을 견딘 거 보면 영준 씨도 이런 타입 좋아한다는 거야.”송재이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설영준이 이를 듣고는 고개를 들더니 차갑게 웃었다.“맞아. 내가 원래 병약한 거 좋아해.”병약하다는 말에 송재이는 원래 발끈해야 맞았다.하지만 그 뒤로 따라오는 ‘좋아한다’는 말에 송재이는 마음이 간질거렸다.송재이는 입술을 앙다물더니 반박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설영준은 매번 그랬다.약 올리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여러 감정이 뒤섞여 화가 나도 쏟아낼 수가 없었다.송재이는 아직 사무실 입구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혼자 씩씩대는 모습이 어딘가 풋풋하면서도 귀여웠다.설영준은 난감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송재이가 답답했다. 그런 송재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설영준이 끝내 입을 열었다.“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설마 일부러 그런 거야?”“...”송재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크게 뜨고는 이렇게 물었다.“뭐가?”“저번에 내가 너 오해해서 미안해하고 있는 거 알고 있었잖아. 그리고 아까 같은 돌발 상황에서 약하게 나오면 어떤 요구든 내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거 알고 그런 거 아니야?”안 그래도 설영준은 송재이에게 미안했고 보상해 주고 싶었기에 눈에 훤히 보여도 그냥 넘어갔다.평소에 설영준에게 좋게 좋게 말해도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송재이는 하필 그런 돌발 상황에서 말했다. 이에 설영준은 송재이가 얕은 수로 그를 이용하려 든다는 느낌이 들었다.감히 누가 천하의 설영준에게 얕은수를 쓸 수 있
송재이는 그 여자를 ‘약혼녀’라고 불렀지만 설영준은 반박하지 않았다.지민건을 화력이 주현아에게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생각에 송재이는 너무 서운했다.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아직도 그 여자와 결혼하려는 거지?특별히 편애하는 게 아니라면...송재이는 갈수록 설영준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솔직히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 유중건의 일로 이미 그를 한번 이용했고 이를 들키기까지 했다. 역시 설영준은 너무 총명했고 그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그러니 송재이는 더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분위기가 딱딱해졌다.송재이의 기분은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었다.얼마나 골똘히 생각했는지 설영준이 그녀 앞으로 다가서는 것도 몰랐다.송재이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고 있는데 시야에 광이 나는 까만 구두가 들어왔다.송재이가 멈칫하는데 설영준은 이미 송재이의 턱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큰 키와 특유의 아우라가 압도적이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몸에서 나는 옅은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든 채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다.하지만 설영준이 한발 빨리 앞으로 걸어오더니 두 팔로 송재이의 허리를 휘감았다.설영준은 자기도 모르게 송재이의 반듯한 아랫배를 힐끔 쳐다봤다.그 배 속에 설영준의 아이가 있었지만 끝내 잃어버리고 말았다.이런 느낌에 설영준은 마음이 복잡해졌다.“영준 씨...”“저번에 사무실에서 무슨 일 있었던지 기억나?”설영준이 낮은 소리로 귀띔하며 진지하게 말했다.“나는 사업하는 사람이야. 원하는 걸 들어줬으니 너도 보답은 해야지 않겠어?”송재이는 멈칫하더니 그제야 설영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저번에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정말 너무 수치스러웠다.마음속으로는 틀렸다는 걸 아는데 몸은 그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송재이는 그 광경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심사하듯 그녀를 바라보는 설영준의 눈빛에도 송재이는 전혀 두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굳건하고 매서운 눈
달 말, 콘서트 당일.설영준 외에도 경주시의 정계, 비즈니스계의 거물들이 도착했다.송재이가 백스테이지에서 준비하는데 서유리가 귓속말로 속삭였다.“아까 몰래 백스테이지를 한번 봤는데, 이야, 정말 대단하던데요? 설 대표님 지금 갑자기 혜성처럼 내려온 서진 그룹 전무랑 얘기 나누고 있더라고요?”“그 사람은 누군데요?”송재이는 이런 소식에 빠삭하지 못한 편이었다.“서진 그룹 후계자잖아요. 투자회사 중에서도 유명한 재벌 2세.”서유리는 뭔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근데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외국에서 엄청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다녔다고 하던데.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꼭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린대요.”“재이 씨처럼 예쁘게 생긴 여자는 조심해야 해요. 저런 사람한테 찍히지 않게.”서유리가 조심스럽게 귀띔했다.송재이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무대에 오르기전 송재이는 화장실로 향했다.백스테이지 대기실엔 다 화장실이 있었다.문 앞까지 갔는데 연지수가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큰 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수석이 된 후로 연지수는 데시벨이 전보다 훨씬 높아졌고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송재이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드레스 자락을 들고 바깥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복도를 건너는데 까만 슈트를 입은 키 큰 남자와 스쳐 지나갔다.그 남자는 고개를 돌려 송재이를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봤다.송재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남자는 고개를 다시 돌렸고 성큼성큼 관중석으로 향했다.그러더니 옆에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쉬고 있는 서도재에게 이렇게 말했다.“전무님, 아까 어떤 여자와 마주쳤는데 곧 무대에 오를 사람인 것 같았어요. 근데 오케스트라 수석인 지수 씨보다 훨씬 예쁘게 생겼더라고요...”“난 지수만 있으면 돼.”서도재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오케스트라 화보에서 수석 피아니스트인 연지수는 센터에 서 있었다. 그 얼굴은 그렇게 서도재의 머릿속에 각인한 듯 떠나지 않았다.서도재
공연이 끝나고 송재이는 얼른 백스테이지로 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바깥에서 소동이 들렸다.문을 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연지수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중에 보디가드도 보였다. 조금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시끄러워졌다.송재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가서 보려는데 트렌치코트를 입은 중년 여자가 연지수의 팔목을 낚아챘다.연지수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 중년 여자가 바로 귀싸대기를 날렸다.“빌어먹을 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순간 그저 옆에서 싸움을 말리던 보디가드들이 잽싸게 앞으로 나서서 중년 여자를 제압했다.연지수는 얼얼한 볼을 감싸고는 신고하겠다고 이리저리 고아댔다.송재이는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직원을 불러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했다.직원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지켜보며 신비로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말도 마요. 다 연지수 씨가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전에 설영준 씨와 춤을 추는 사진이 인터넷에 퍼졌잖아요. 그러면서 계속 스캔들이 났었거든요. 근데 설 대표님은 약혼녀가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알면서 세컨드 노릇을 한 거라는 소린데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가정주부들이 듣고 화가 난 거죠…”주부들은 원래도 이런 일에 잘 반응하는 타입이었기에 순간 도덕의 화신이 되어 뜻이 맞는 다른 주부들과 함께 ‘세컨드를 타도하자’는 명목하에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었다.송재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하려는데 멀지 않은 곳에 선 설영준이 보였다.설영준은 연지수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맞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 표정 없이 자기와 관계없다는 듯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보디가드와 경찰들이 그 주부들을 연행해 갔다.연지수는 지금 꼴이 매우 처참했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머리가 다 뜯겼고 옷도 다 찢겼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오늘은 원래 연지수에게 최고의 날이어야 했다.연지수는 얼떨결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설영준을 발견했다. 순간 연지수는 쥐구멍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