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림한 핏의 슈트는 그의 다리를 더 길어보이게 만들었고 가슴에는 버건디색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챠콜색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그는 일거수일투족 귀해보였다.서준혁은 스태프의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는 위에서 덤덤한 눈빛으로 훑어보더니 정확하게 신유리에게 시선을 멈췄다. 신유리는 마침 그의 시선과 마주치자 입술을 오므리며 개의치 않은 척했다. 화인 그룹은 줄곧 부산 시장에 진입할 계획이 있었기에 서준혁이 투자자의 신분으로 나타난 게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신유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발언을 듣더니 사람들을 따라 형식적으로 박수를 쳤다. 현장에 여자 스태프들이 적지 않게 있었는데 회의가 끝난 후 그녀들은 한결같이 서준혁을 칭찬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신유리는 이런 화제에 별로 관심이 없어 대충 핑계를 둘러대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나 하필 이 층 화장실은 청소 중이라 신유리는 위층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엄청 마르고 야윈 아가씨가 세면대 옆에 선 채 혈관이 보이는 하얀 손목으로 검은 대리석 세면대를 짚고 있었는데 손목이 너무 얇아서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몸에 맞지 않는 타이트한 민소매 스커트까지 입고 있어 더욱 여위어 보였다. 신유리는 멈칫하더니 몸을 돌려 화장실을 나가려 했다. 바로 그때 아가씨가 마침 돌아섰다. 그녀는 약간 올라간 눈매에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진 미녀였다. 다만 그녀의 표정이 그렇게도 슬프지 않았다면 말이다...그녀는 신유리의 곁을 지나갈 때 자신도 모르게 어설픈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마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방금 일어난 일은 신유리에게 에피소드 같았고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신유리는 회의 시간을 맞춰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전에 이신이 말했던 몇 명의 커리어가 대단하신 분들께 가르침을 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회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한 남자와 부딪힐 뻔했는데 신유리는 뒤로 두 발짝 물러섰고 그 남자는 서둘러 사과했다. 그 남자는 고개를 들어 신
이 점을 깨닫고 나니 신유리는 마음이 한결 밝아졌다. 다만 서준혁과 같은 차에 탄다는 것이 여전히 조금 꺼림칙했다. 신유리가 말하려고 하자 오혁이 옆에서 낮은 소리로 그녀를 재촉했다. “빨리 타세요. 다른 사람들은 이미 출발했어요.”“아무래도 저는 택시 타고 가는 게 낫겠어요. 대표님과 부 선생님께서 일을 이야기하는데 제가 차에 같이 있으면 불편하지 않을까요?”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오혁은 조수석의 문을 열고 신유리에게 말했다. “방금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잘 듣지 못했어요. 거참, 조수석에 타도 괜찮죠? 뒷좌석은 모두 남자들이라 여성분 혼자서 불편하니까요.”오혁은 그녀를 위해 많이 고려해 주었다. 뒷줄에 부 선생께서 이미 타고 있었고 서준혁은 멀지 않은 곳에서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시간 지체하지 마시고 빨리 타죠.”“유리 씨, 어서 타세요. 쑥스러워하지 마시고 저도 이따가 버닝 스타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서요.”부 선생은 이신과의 관계가 밀접하다고 하니 신유리는 더 이상 거절할 수도 없었고 묵묵히 조수석에 올랐다. 다만 이렇게 되면 난감한 것은 오히려 오혁이었다. 신유리는 조수석에 앉았고 부 선생님과 서준혁은 뒷좌석에 앉았다. 그는 이 두 분과 함께 앉는 것도 쉽지 않았고 누구더러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선생님, 저는 아마 택시 타고 가야 할 것 같아요. 좀 불편해서요.”신유리도 상황을 보며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마침 부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마침 가는 길에 연구실로 돌아가서 내가 준비해 놓은 자료를 갖고 와. 이따가 조 선셍과 곽 선생힌테 보여줘야겠다.”오혁은 대답하고 재빨리 떠났다. 신유리는 조수석에 앉아 투명 인간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다만 이런 상태가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다. 부 선생은 그녀한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유리 씨, 방금 대표님께서 화인 그룹과 버닝 스타가 현재 합작하고 있다고 했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하며 신유리를 바라보았다.신유리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장수영이 배시시 웃으며 서준혁에게 다가와 특별히 신경 써서 한 화장을 거울로 슬쩍 확인하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했다.“어머, 서대표님.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모셔다 드리기로.”장수영은 부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지라 말을 할 때 섞여있는 애교는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편하게 만들었다.그녀는 신유리를 보며 웃더니 계속 말했다.“서대표님이랑 아시는 사이세요?”장수영의 말투에는 떠보려는 의도가 가득했고 신유리는 담담히 대답했다.“저희 사무실이랑 서대표님이 협업하는 사이죠.”“그러시구나~”신유리의 대답에 장수영은 말끝을 묘하게 올리며 입을 열었다.“어쩐지 서대표님이 유독 챙기시더라고요. 근데 지금 날씨도 안 좋고 외지 사람들은 이런 태풍 부는 날에 적응을 못할 테니 제가 서대표님을 모셔다 드릴게요.”장수영은 에둘러 말하는 것 없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뜻을 표달 했고 예전의 신유리였다면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거절의 의사를 내비췄겠지만 현재 그녀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알겠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서대표님~”몸을 돌려 떠나려고 하던 신유리의 뒤에선 장수영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고 그녀의 목소리와 더불어 진한 술 냄새와 서준혁 특유의 냄새가 주위에 가득 퍼졌다.남자는 어두운 얼굴로 살짝 취한 듯한 목소리를 하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이러지 마시죠, 저 지금 정말 불편합니다.”신유리는 재촉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쳐다보았다. 은은한 조명 아래 비춰진 서준혁의 눈빛엔 취기가 가득했고 그 덕에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은 검은 보석처럼 더욱 선명해졌다.서준혁은 단추를 꽁꽁 잠근 셔츠 차림이었지만 하필 눈꼬리 쪽이 빨개지는 바람에 평소 그 냉정하고 도도한 기질 때문에 더욱 더 유혹적이었고 섹시해 보였다.그는 신유리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그의 체온마저 신유리는 느껴질 것만 같았다신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뒤
물수건을 쥐고 있던 신유리의 손에 힘이 조금 실리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어 서준혁을 쳐다보았다.서준혁도 신유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침대에 앉아있고 신유리는 서있는 상태라 분위가는 더욱 이상해졌다.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는 물수건을 침대 옆의 상에 놓고는 말을 꺼냈다.“내려가 볼게요.”“기억나십니까?”서준혁의 목소리와 공기 중에 퍼지는 은은한 술 냄새는 방안 분위기를 달궈주는 듯싶었고 서준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다.그는 신유리를 바라보지도 않고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나중에 우리 아이 낳으면 이름을 서유희라고 하자고 했잖습니까.”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서준혁은 말을 할 때 신유리를 보지도 않았고 그 말을 들은 신유리는 굳더니 복잡한 눈빛을 하곤 서준혁을 보며 씁쓸히 아려오는 마음을 달랬다.전에 신유리는 확실히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이름은 서유희라고 하자고 약속했다. 서준혁의 서, 신유리의 유자도 있기에 알 맞춤이라고 생각하며 까르르 좋아하던 일이 엊그제 같았다.신유리는 주먹을 꽉 쥐고 한숨을 푹 쉬더니 단호한 눈빛으로 서준혁을 쳐다보며 말했다.“서준혁씨, 많이 취하셨어요.”“그런가 봅니다, 옛 생각이 막 떠오르는걸 보니.”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리며 담담하게 대답했고 신유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더니 물었다.“뭐 좋을 게 있다고 자꾸 생각해요?”방 밖으로 나올 때, 마침 해장국을 가져다주는 카운터 직원과 마주쳐버렸고 신유리는 더욱 더 짜증이 밀려왔다.방으로 도착한 신유리는 베란다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서준혁은 오늘 누가 봐도 많이 취한 사람이었고 신유리도 신경을 덜 쓰겠다고 다짐했지만 서유희라는 이름 석 자를 듣자마자 마음에서 파도가 치듯 일렁거렸다.신유리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이 안에 새 생명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는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신기해하며 바라보고 있었다.베란다에서 돌아가자마자 이석민에게서 걸려온 전화로 인해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신유리와 주언이 몸을 돌려 올라가려고 할 때, 뒤에서는 신연인지 서준혁인지 모를 시선이 느껴졌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주언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저 방금 제대로 못했죠?”“뭘 제대로 하는데요?”신유리는 말을 하는 주언을 옆으로 힐끔 쳐다보며 되물었고 주언은 얼른 자신의 생각을 말해줬다.“임아중씨가 저보고 서준혁씨 앞에선 특히 더 조심해라고 해서요. 제가 방금 서준혁씨 앞에서 좀 더 친한 척 친밀한척 했어야 했는데...”임아중이 도대체 주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는 신유리는 얼른 대답했다.“아중이 말... 너무 새겨듣지 마요.”“음, 네.”주언의 짧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둘 사이는 어색하기 짝이 없어 엘리베이터 안은 조용했다.그의 방은 신유리보다 높은 곳에 있었기에 신유리는 자신의 방이 있는 층에 도착하고는 바로 내려버렸다.현재 그녀의 모든 신경은 주언이 아닌 신연에게로 쏠려있었고 아까 신연과의 눈 맞춤은 신유리로 하여금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그 사람도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 같은데.]많은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 신유리는 소파에 앉아 한참을 진정하려 애썼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어딘가 불편했다.신기철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신유리가 15살 되는 해였다.그때 신유리는 갓 중학교를 졸업해 명문고에 붙은 상황이라 기쁜 마음에 몰래 신기철에게 전화를 걸었었다.하지만 신기철은 원래 기억속의 자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닌 억지로 힘듬을 억누르고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변했었고 전화를 건 신유리에게 무슨 일이 있냐 고만 물었다.자신이 알던 사람과는 180도 달라진 신기철의 모습에 신유리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지만 그래도 그에게 자신이 명문고에 입학한다는 사실을 알려줬고 그것을 들은 신기철은 잠시 당황하더니 얼른 축하의 말들을 건넸었다.그 후 신기철은 아무도 몰래 신유리의 계좌로 5만원을 입금해줬고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연락 이였다.오늘 뜻밖으로 신연을 마주한 신유리는 담담하게 굴었지만 사실 못내 가슴
인사를 건넨 부선생은 미소를 지으며 서준혁에게 말했다.“신유리씨가 방금 저한테 버닝스타도 이번 입찰에 참여한다고 알려주던데, 화인이랑 버닝스타가 또다시 만나 같이 일하게 되는 건가요?”“화인도 참여해요?”신유리가 물었다.“입찰회엔 설계사도 있고 투자자도 있습니다. 꽤나 큰 활동이라고 볼 수 있죠.”어젯밤 몰래 입찰회에 관한 기사들을 검색해본 신유리는 이런 활동이 기타활동과는 달리 국내 모든 자원들이 다 동원하기에 규모가 크고 평범한 회사들이 얻기에 매우 힘든 기회라는 것을 알았고 한번 열면 어마어마하게 성대한 모임이라는 것도 알았다.당연하게도 입찰회 현장에는 수많은 섹션들을 나누어놓기에 매 영역마다 다른 모양들도 준비되어 있었다.버닝스타가 눈독을 들인 것은 바로 성남시와 부산이 합동해서 여는 현장-성명월이라는 전시회였다.대범하고도 도전적인 주제사상과 현대 유행하는 원소들이 더해져 이 섹션은 모든 입찰회중에서 제일로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물건이었다. 신유리가 화인에 대한 이해로는 많고 많은 섹션들중 서준혁이 성명월을 고를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생각했다.아니나 다를까-부선생이 가만히 있다 입을 열었다.“사실 되게 우연입니다, 선택한 주제들이 비슷비슷해서 정말 떨어진다면 서로 맞춰가는 과정은 생력해도 되니까 좋잖습니까.”서준혁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얼른 말을 이어갔다.“저도 버닝스타와의 2차 협업, 기대가 많이 됩니다.”부선생이 자리를 떠난 후 신유리는 서준혁을 쳐다보며 아까 그가 했던 말에 대해 물었다.“화인에서 버닝스타랑 또 같이 하고 싶다고는 해요?”그도 그럴 것이 신유리는 방금 서준혁이 한 말을 도저히 믿지를 못했다.필경 미래의 일에 관해서 서준혁은 몇 번이나 버닝스타의 계획을 제쳐버렸으니까 말이다.“그럼 성남에 더 잘 어울릴 사무실이 있기나 합니까?”그의 대답에 반응을 한 신유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서준혁이 버닝스타랑 같이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닌 싫어도 무조건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새로운 사무실과
장수영은 순간 흠칫하더니 막연한 눈빛으로 신유리를 보며 물었다.“신연씨... 아버지요?”“신연씨 가정사는 저희 대부분 다 몰라요. 지연이도 모를걸요? 근데 그 사람을 보아하니 집안도 그저 그런 것 같더라고요.”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고 신유리는 생각에 잠겼다.지연.이 이름을 듣자 신유리는 바로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밖으론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장수영을 제외하고 연우진마저도 지연이라는 이름을 문득 말했었고 심지어는 그녀가 부산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더러 지연이라는 여자를 보러 가보라고도 말했었다.[지연이라는 사람은 신연... 여자친구인건가?]신유리의 미간을 점점 더 찌푸려졌고 엉킬 대로 엉켜버린 실마리들을 풀어헤치려고 애를 썼다.“신연씨한테 관심 있어요?”신유리의 표정을 본 장수영은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그러더니 조금 망설이다 말을 이어갔다.“신유리씨 성도 신, 신연씨도 신씨... 둘이 친척 아니에요? 헐?”신유리는 장수영의 오버 섞인 말에 담담히 대답했다.“너무 멀리 갔어요, 저희 둘 서로 모르는 사이에요.”그녀는 그저 한 가지 사실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장수영도 별로 큰 신경을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고 지내고 싶어요? 그럼 오늘밤 같이 놀러가요! 지연이도 오고 진송백씨도 온대요. 아마 신연씨도 올걸요?”신유리는 원래 망설이고 있었는데 장수영의 꼬드김에 넘어가 허락해버렸다.어떤 일은 빨리 알면 알수록 좋으니 질질 끌 필요는 없기 때문에.장수영이 말한 놀 거리는 부산에서 술집이 즐비한 골목에 있는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술집이었다.신유리가 그녀를 따라 들어간 순간 첫눈에 보이는 건 마른 몸에 진한 파란색 치마, 하얀 피부를 하고 서있는 인형 같은 여자였다.“지연아!”옆에 있던 장수영이 그 여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신유리의 팔을 잡고 다가가며 소개를 시켜줬다.“이쪽은 내가 너한테 말했던 예쁜 그 언니, 포스 죽이지?”태지연은 신유리를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는 인사를 건넸다
큰 화분 옆에 서있는 신연은 이제 고작 20대 초반인지라 아무리 도도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앳돼보였다.복도의 따뜻한 조명이 그에게 비춰지자 신유리와 똑 닮은 그의 눈은 더욱 반짝였다.신유리는 앞으로 한 발자국 성큼 다가가 신연을 보며 담담하게 입을 뗐다.“신연.”한자 한자 똑똑히 들리게 말을 하는 신유리는 신연의 성씨를 더욱 강조하며 말했고 그것을 들은 신연은 아무런 기복이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은 그때 호텔에서 본 눈빛이랑 전혀 차이가 없었다.사람들로 붐비는 복도와 밖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도 불구하고 신연과 신유리 두 사람은 마치 그들만의 세상에 갇힌 듯 고요했고 정적만 흘렀다.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얼굴에서 익숙한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춰졌다.신연은 한참 있다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빛으로 신유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신기철 씨한테서 얘기 자주 들었습니다.”“그래요?”신유리는 그의 말에 흠칫하더니 물었고 신연은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그 사람이 신유리 씨를 많이 사랑하던데요.”신유리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떨려오는 가슴을 진정시킨 채 신연에게 묻고 싶었던 물음을 물어보았다.“처음부터 절 알아보셨나요?”그녀의 물음에 신연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얘기해줬다.“사진 본 적 있습니다.”담담한 그의 말투에서 신유리는 그가 자신을 조금 얕본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지만 신연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 신분을 확인하려는 목적만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신연의 몸에는 섣불리 다가가기도 힘든 거리감이 느껴졌고 신유리는 신연의 눈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고 다시 물었다.“여기서 절 기다리고 계신 게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닐 텐데요?”정곡을 찔린 신연은 뜨끔하더니 옆에 있는 화분을 길고 큰 손으로 만지더니 별안간 잎을 하나 뜯어서 버려버리고는 대답했다.“아니요, 그냥 뭐 좀 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뭘 보고 싶은 건데요?”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