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온 예은이는 어른들과 인형놀이를 시작했다. 서혜지는 그 틈을 타서 나준우를 끌고 침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이게 무슨 상황이죠? 당신 다 들었죠? 아주버님 긴장 좀 하셔야겠는데요?”서혜지는 수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무척 궁금했다.나준우는 아내의 생각을 눈치채고 인상을 찌푸렸다.“당신 상준이 형이랑 형수님 일에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아?”“내가… 그랬나요?”서혜지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과하게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냥 아주버님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면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요.”“사람 좋고 성격이 좀 까칠하지만 그래도 딴짓하는 게 아니라 일에 몰두하는 느낌이고. 아내로서는 참 걱정할 게 없고 든든하겠다고 생각했거든요?”“하지만 형님이 아깝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형님은 아주버님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아주버님은 너무 싸늘하시잖아요. 형님이 많이 서운했을 것 같아요.”“예전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사실 모든 부부가 우리처럼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 아까 남자 목소리를 듣고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상대가 형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느꼈거든요.”“그래서 상준 아주버님의 생각이 궁금해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아내인데 누군가가 그런 아내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떤 느낌일지.”“어쨌든 아주버님이 조금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랄까요? 여자 때문에 흔들리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해야 하나?”뒤로 가면서 점점 주제 넘은 그녀의 발언에 나준우는 살짝 언짢았다.그는 아내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게 안 느껴지나?부부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들었다는 건 두 사람의 신뢰에 문제가 생길 거라는 것을 의미한다.그는 걱정됐다.부부는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차우미와 나상준을 걱정했다.그 시각, 서재.원목 자재의 책장이 줄 지어선 서재는 호화로우면서도 근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박물관 동료들과 사이가 아주 좋았기에 차우미는 쉽게 스케줄을 조절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그들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작업실 동료들은 거의 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라 차우미를 딸처럼 각별히 아꼈다.게다가 평소에 그들이 일이 있다고 했을 때 차우미도 흔쾌히 당직을 서주었기에 그들도 그녀 대신 당직을 서는 일이 당연하다고 말했다.온이샘은 다음 주 주말에 보자고 연락이 왔다.차우미도 동료들과 합의를 마쳤고 그렇게 두 사람은 다음 주 토요일에 근교에 있는 구현으로 가보기로 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금요일이 되었다.차우미가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니 어머니가 저녁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고 아버지도 일찍 퇴근했다.공방은 열 시까지 운영하지만 따로 파트타임 직원을 썼기에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부지런한 아버지는 밥만 드시고 공방으로 돌아가고는 했다.그녀의 아버지 차동수는 이 일을 무척 사랑했다. 몇십 년을 공방에서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게 일상이지만 전혀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차우미는 그의 그런 우직한 성격을 닮았다.“어쩜 부녀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시간에 들어오니? 내가 저녁을 조금 늦게 준비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하선주가 반찬을 테이블에 올리며 말했다. 차동수와 차우미는 손만 씻고 주방으로 가서 그녀를 거들었다.잠시 후, 가족들은 오붓하게 식탁에 모여앉았다.“우미야, 내일 친구랑 몇 시에 나갈 거야? 엄마가 아침 준비할 테니까 그 친구한테 와서 아침 먹고 출발하라고 해.”차우미는 부모님에게 주말에 온이샘을 도와 근교에 다녀오겠다고 이미 얘기한 바 있었다.부모는 그 말을 듣고 흔쾌히 찬성했다. 어차피 딸만 원한다면 그들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그들은 딸이 언제나 올바른 판단을 내릴 거라고 믿었다.차우미는 생각없이 일 저지르는 타입은 아니었다.그녀는 된장찌개를 한술 뜨며 대답했다.“아침 일곱 시에 출발하기로 했어. 차 막히기 전에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안평은 꽤 큰 도시였지만 많은
그런데 갑자기 이런 친구가 나타나 주니 두 사람은 딸을 밀어주고 싶었다.그리고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고 판단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차동수가 말했다.“엄마 말이 맞아. 여기까지 왔는데 아침도 안 먹이고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지.”차우미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이따가 문자해서 물어볼게.”그녀는 부모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이미 돕기로 했으면 사소한 부분에도 신경 쓰는 게 당연했다.그녀의 말을 듣고 하선주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참 속이기 쉬운 단순한 아이였다.식사가 끝난 뒤, 차우미가 설거지를 돕겠다고 했지만 하선주는 빨리 친구한테 문자나 해보라며 그녀를 주방에서 밀어냈다.차동수도 맞장구를 치며 주방 일은 자기가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차우미는 두 분의 정성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로 가서 온이샘에게 문자를 보냈다.그녀는 교수인 온이샘이 언제 바쁘고 언제 한가한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문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나상준과 살 때도 통화보다는 문자를 선호하기도 했다.그녀는 문자를 보낸 뒤, 방으로 가서 내일 입고 갈 옷을 정리했다.그 시각 온이샘은 강의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하루 종일 논문을 수정하고 강의를 하느라 아직 저녁도 먹기 전이었다.진동음이 울리자 그는 곧바로 걸음을 멈추었다.[선배, 지금 바빠?]그의 입가에 저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그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그 시각 차우미는 온이샘이 바쁠 거라 생각하고 침실에서 옷장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녀는 한참 정리가 끝난 뒤에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온이샘에게서 문자가 두 개나 도착해 있었다.[안 바빠.][통화 괜찮아?]두 문자 사이에 시간 간격이 조금 있었던 거로 보아 그녀의 문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차우미는 30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을 확인하고 미안한 마음에 바로 답장을 보냈다.[미안해, 선배. 옷장 좀 정리하느라 문자 못 봤어. 지금 시간 괜찮아? 내가 전화 걸게.]
온이샘은 혹시라도 운전 중에 그녀에게서 답장이 올까 봐 줄곧 차에서 기다렸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나갔다.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차우미에게서 답장이 오자 그는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나긋나긋하고 진지한 물음에 그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집으로 오라고?’누군가를 좋아하면 당연히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법이다.당연히 그도 조만간 그녀의 가족을 만나야 한다.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그녀의 가족을 만나야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는 잠시...... 어쩔 바를 몰랐다.온이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이런 고요함은 차우미에게 한 가지 문제를 깨닫게 했다. 이렇게 갑자기 친구를 집에 부르면 친구는 반드시 불편해할 것이라는 걸.누구나 다 여가현처럼 친구의 집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니까.“선배, 미안해. 내가 너무 갑작스러웠지? 마음에 두지 마.”“아니, 그게 아니라. 아침 식사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어. 그래, 내일 아침 7시 30분에 출발하자.”온이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그제야 차우미는 한시름 놓았다.“그래, 그럼 일 봐. 내일 아침 거의 도착한다 싶으면 문자줘. 내가 내려갈게.”“그래, 알았어.”전화를 끊은 차우미는 내일 아침 시간을 대략 계산하더니 부모님께 온이샘이 내일 아침 식사하러 올 거라고 말씀 드렸다.그 말에 부모님은 너무 기뻐 내일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온이샘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하지만 차우미는 온이샘이 좋아하는 음식을 알지 못했다. 하여 그녀는 다시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가리는 건 없는지.같은 시각, 차에 앉아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하던 온이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녀의 집으로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하지만 무엇을 사야 할지, 어떻게 사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을 직면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곰곰이
차우미가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7시가 훌쩍 넘었다.여가현이 가장 바쁜 시간이다.그녀는 자주 야근을 했으며 밤을 새우는 것이 다반사인데 모처럼 이 시간에 그녀에게 영상 통화를 보냈다.영상 통화를 받자마자 머리를 박고 컵라면을 먹고 있는 여가현의 모습이 보였다.차우미는 관심조로 말했다.“너 또 컵라면이야? 몸에 안 좋다니까. 너 밥 해먹을 시간 없으면 차라리 밀키트라도 사 둬. 데우면 먹을 수 있을 거 아니야.”여가현에게 돈은 생명이다.목숨과 돈 중에, 그녀는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돈을 선택할 것이다.여가현은 컵라면을 후루룩 먹으며 대꾸했다.“내 걱정은 하지 마! 지금 네가 제일 중요해. 너 어때? 선은 봤어? 두 번째 봄은 언제 오는 거야? 너 상준 씨랑 이혼한지 한 달 넘었지? 이젠 두 번째 봄이 슬슬 와야 해.”“나 있잖아, 반드시 그 사람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나서 아주 본때를 보여줄 거야! 소중함도 모르는 멍청한 자식!”차우미가 이혼하고 여가현은 늘 그녀에게 선을 보고 두 번째 사랑을 시작하라고 다그쳤고 매번 두 사람의 대화에는 이 화제가 떠나지 않을 정도이다.심지어 그녀에게 이혼서류를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하고 두 번째 봄을 맞으면 다시 다른 프로필 사진으로 바꾸라고 했다.차우미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것 또한 그녀의 관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가현은 그녀가 실패한 결혼에서 헤어나오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여가현은 목소리가 아주 높다. 차우미는 혹시라도 부모님이 그들의 통화를 들을까 봐 이어폰을 귀에 끼고 말했다.“너 안 바빠? 이 시간에 어떻게 내 생각이 났대?”여가현에게는 화제를 돌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하! 내가 안 바쁠 리가 있겠어?”여가현은 책상에서 서류 뭉치를 들어 카메라 앞으로 가져다 댔다. 서류 뭉치를 본 차우미는 걱정되는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너 또 밤 새우려고?”“당연하지! 난 부자가 될 거야!”여가현은 하루 빨리 많은 돈을 모아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꿈
“선배 이게 다 뭐야?”한가득 꺼내는 선물 꾸러미를 보고 차우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침을 먹으라고 했을 뿐인데 온이샘은 이렇게 많은 선물을 가져왔다. 비록 차우미도 온이샘의 예의를 지키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너무 과하다.온이샘의 양손 가득 들린 선물은 아무리 봐도 단순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차우미와 눈이 마주친 온이샘은 그제야 자기의 목적성이 너무 강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다급히 말했다.“아저씨, 아주머니가 뭐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그냥 여러 가지 사봤어. 좋아하실지 모르겠다.”차우미는 온이샘처럼 고작 아침 식사 한 끼에 이렇게 예의를 차리는 사람은 처음 봤다. 뭐라고 하기도, 안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그녀는 하는 수 없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선배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하하, 아니야. 무엇보다 나도 네 도움이 필요한데 미안해서 그러지.”차우미도 온이샘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더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그만 올라가자.”“그럴까.”두 사람은 위층으로 올라갔다.위층 베란다. 하선주와 차동수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특히 하선주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역시.”차동수도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는 애써 웃음을 절제하며 말했다.“애들 올라오니까 빨리 준비하자고.”“그래.”차우미는 온이샘과 함께 집으로 들어왔고, 인기척에 차동수와 하선주는 주방에서 즉시 나왔다.온이샘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고 차우미는 부모님에게 온이샘을 소개해 주었다. 이내 집안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가득 퍼졌다.“이샘 씨, 왜 이렇게 많이 사 들고 왔어? 미안하게.”“당연히 그래야죠.”“그건 아니지. 이샘 씨는 우리 우미 친구니까 내 집처럼 생각해도 좋아. 다음에는 이런 거 사 들고 오지 마.”“하하, 아니에요. 작은 성의예요. 두 분이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요.”“그럼, 좋아하고 말고. 젊은 사람들은 안목이 뛰어나서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지.”“......”차우
발신인이 강서흔이라는 것을 확인한 온이샘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나 잠시 전화 좀 받을게.”“그래, 앞에서 기다릴게.”차우미는 휴대폰을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휴대폰에는 온이샘이 찾는 식물이 있는데 그들은 지금 산간의 돌길을 걷고 있으며 양쪽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가득했다.그녀는 계속 찾아보았다.차우미가 멀어지자 온이샘은 그제야 전화를 받았다.“그래.”“어때? 미래의 장인 장모님 너 마음에 들어 하셨어?”진지한 듯한 말투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질투가 느껴졌다.온이샘은 강서흔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웃으며 말했다.“아마도?”“하하.”“하긴, 잘생긴 온이샘을 누가 마다하겠어. 특히 어르신들은 더 좋아하시겠지.”강서흔의 말은 정확한 말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온이샘은 늘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강서흔은 여가현 집에 갔다가 좌절을 겪고 한이 서려 있었다. 온이샘이 화제를 돌렸다.“벌써 일어난거야?”“흥!”“네가 새벽부터 깨워놓고 벌써라니.”“빨리 잡아. 이 형님이 네 결혼식을 고되게 기다린다! 아니지, 나 부케 받을래!”“부케 받고 여가현 그 나쁜 년이랑 결혼할 거야!”온이샘은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날이 오기를 기다릴게.”두 사람은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온이샘이 앞을 보니 차우미는 보이지 않았다.그는 멈칫하더니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그림자를 찾았다. 그녀는 돌계단 옆에 쭈그리고 앉아 휴대폰과 눈앞의 식물을 번갈아 보았다.그녀는 어느새 포니테일을 묶었다.살랑살랑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치며 그녀의 흘러내린 잔머리와 속눈썹을 가볍게 날렸다.온이샘은 저도 몰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그는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이고 물었다.“왜 그러고 있어?”온이샘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청초한 눈매를 보았다. 그녀의 외모는 이 산의 수려함보다 더 매혹적이었다.차우미는 그제야 온이샘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이것 좀 봐봐. 이거 아니야?”그녀는 발아래의 푸른 식물을 가리키며 휴
똑...... 똑......물방울이 나상준의 머리카락을 타고 바닥에 떨어져 맑은 소리를 냈다.물줄기는 그의 몸을 따라 매끄러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다시 하수구로 흘러가더니 가느다란 물 흐름소리가 들려왔다.모든 것이 이토록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나상준은 아무런 기척도 없는 샤워기를 한참 바라보더니 가운을 입고 욕실을 나섰다.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 바깥의 등불은 모두 밝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침실도 마찬가지다.나상준은 어두운 바깥을 보며 휴대폰을 들어 허영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정전이야.”허영우는 멈칫하더니 모처럼 멍해졌다.정전?대체 무슨 말씀일까?허영우가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나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집안 전기요금은 누가 냈었지?”이 말에 허영우는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차우미와 나상준이 이혼하던 그날, 그녀는 허영우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차우미는 집안의 주의 사항과 해야 할 일, 그리고 세부 사항들을 꼼꼼히 메일로 작성해 보냈다.허영우는 메일을 확인했고 또 알고 있었지만 너무 바쁜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메일 속의 여러 사항은 그녀가 이미 다 처리해 두었으니 허영우는 그저 기억만 하면 된다.그러다 보니 잊고 있었다.허영우가 다급히 말했다.“사모님이 냈었어요. 전에 사모님이 메일로 알려주셨는데, 제가 깜빡했어요.”“죄송합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처리할게요.”“그래.”통화가 종료되었다.나상준은 휴대폰을 던져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날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진 것은 아니다. 집안의 모든 것이 아직 마지막 빛에 비추어져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나상준은 바에 있는 냉장고를 열었다.그는 목이 말라서 물을 좀 마시려고 했다.하지만 열어보니 냉장고는 텅 비어있었다.그는 멍하니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냉장고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 부엌으로 향했다.부엌에도 냉장고가 있었다. 차우미가 이 집에 있을 때, 그 냉장고는 항상 꽉 차 있었다.하지만 열어보니 역시나 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