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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나상준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차우미는 거의 통화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가 바쁘다는 걸 알기에 무슨 일이 생겨도 그녀는 스스로 해결하는 편이었다.

그 역시 용건 없이는 그녀를 찾지 않았고 출장이 잦았기에 그들 사이에는 최소한의 소통도 별로 없었다.

같이 3년을 살았지만 그는 차우미에게 별다른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날 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이혼 얘기를 꺼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그렇게 부드러웠다는 것도 그때 처음 느꼈다.

그녀는 그가 아는 다른 여자들과 조금 달랐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진 그녀의 목소리는 그와 평소에 대화하던 톤과 많이 달랐다.

어딘가 생기가 넘치면서도 달콤한 목소리였다.

마지막 날 차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창 집중하고 있던 찰나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전해졌다.

그 목소리에서 그녀를 향한 걱정과 애정이 느껴졌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그런 감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예은의 손에 있는 스마트워치를 노려보았다. 꽃이 만개하던 날 출장 갔다온 자신을 기다리던 그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날도 그랬었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예은이마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독 이혜정 여사만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계속해서 걸었다.

예은이는 큰 눈을 깜빡이며 큰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다가 수화기에 대고 물었다.

“큰엄마, 지금 누구랑 있어요? 어떤 아저씨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누구예요?”

아이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귀에 전해지자 가족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온이샘의 품에 안긴 차우미도 인상을 찌푸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의 가슴에 코를 부딪히면서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다.

온이샘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고마워.”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큰엄마 친구야. 예은아, 큰엄마가 요즘은 일 때문에 정말 시간이 안 나서 갈 수가 없어. 하지만 예은이랑 약속한 건 꼭 지킬게. 나중에 시간 괜찮을 때 예은이 보러 갈게.”

차우미의 목소리에서는 더 이상 당황하거나 난감해하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와 한 약속은 지킬 것이다.

그녀는 온이샘의 과제를 해결하면 청주로 가서 예은이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하루이틀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정말요? 거짓말하면 삐질 거예요? 예은이 기억하고 있을게요!”

“당연하지. 바쁜 일만 처리하고 연락할게. 그리고 시간 잡고 놀러 가는 거야. 어때?”

“좋아요!”

“그럼 큰엄마는 바빠서 먼저 끊을게. 엄마 말 잘 듣고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해.”

“당연하죠!”

아이의 기뻐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차우미는 시간 날 때 쿠키라도 만들어서 택배로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거리가 좀 멀어서 걱정이긴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온이샘은 조용히 그녀가 통화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아까 그와 부딪혔던 코끝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 모습조차도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그녀가 통화를 마치자 그는 느긋하게 다가가며 사과했다.

“미안해. 너무 급한 상황이라 내가 실수했네.”

차우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괜찮아. 덕분에 안 다쳤어.”

말을 마친 그녀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럼 선배는 안평 시내에 살아?”

온이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돌아가야지. 일정을 맞춰보고 연락할게.”

“알았어.”

온이샘은 길에서 택시를 잡아 돌아갔다.

차우미는 가로등 아래에 서서 통화내용을 곱씹었다.

‘벌써 한 달이 흘렀네. 내가 안 보이니까 전화했던 거구나.’

예은이의 말투로 보아 아직 그들이 이혼한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었다.

이혼한 게 무슨 좋은 일도 아니고 어린애에게까지 알릴 필요는 없으니까.

양가의 관계도 있는데 이혼했다고 인연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차우미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혼하면 다시는 엮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한편, 온이샘은 백미러로 그녀의 모습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조금 전 통화내용으로 보아 발신자는 전 시댁의 친척 아이인 것 같았다.

사실 NS그룹은 그의 가문과도 인연이 있어서 이혜정 여사의 환갑잔치에 참석한 적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의 남편도 만났다.

성격이 좀 싸늘해서 그렇지 사람은 좋은 사람 같았다.

어른들의 말과 세간의 평가를 들어보면 꽤 훌륭한 인물이었다.

차우미와의 이혼은 예상밖의 일이었지만 오히려 그에게 고마웠다.

그가 이혼을 허락했기에 그에게 기회가 돌아온 것이다.

온이샘은 시선을 거두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해가 지고 드디어 어둠이 찾아왔다.

한편, 산책을 즐기던 사람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나상준은 이혜정의 부름을 받고 서재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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