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나상준이 차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가 직접 왔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차우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같이 이동하겠다는 건가?“우미야, 왜 그래?”하선주는 그녀가 움직임이 없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직 주혜민이 찾아온 일도 마음에 내려가지 않았는데 제대로 이야기할 기회도 없어 딸이 안타깝기만 했다.애지중지 키운 딸이 다른 사람에게 그런 취급을 당했을 것을 생각하니 괴롭기 그지없었다.차우미는 정신을 차리고 여전히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별거 아니야.”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차에 올랐다.이 시점에서 부모님에게 나상준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담당자는 차 문을 닫아주고 하선주 부부에게 말했다.“두 분은 뒤에 타시면 됩니다.”하선주는 차우미와 같이 타고 싶었지만 도움 받는 입장에 뭐라고 하기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뒷차를 타고 온이샘은 자신의 차로 가서 시동을 걸었다.온이샘은 차를 운전해 벤츠가 가는 방향으로 차를 꺾었다.창 밖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출근 인파가 보였다. 창밖은 무척 시끄러웠지만 차우미가 탄 차량에는 무거운 정적만 흐를 뿐이었다.차우미는 여전히 서류에 파묻혀 있는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그는 이혼 전과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였다.여전히 일을 사랑하고 한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차우미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이혼한 뒤로 다시는 만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런 우연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 여자가 그를 따라왔을 줄은 더욱 예상 밖이었다.하지만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결혼하고 3년 동안 그들 사이에는 그 어떤 스킨십도 없었다.주혜민의 존재를 알기 전에는 그가 일을 사랑해서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그런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하지만 주혜민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는 생각이 바뀌었다.그는 사랑할 줄 모르는
긴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차우미의 모습은 생소하면서도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평소에 그녀는 머리를 깔끔하게 하나로 묶거나 올림 머리를 많이 했지 긴 머리를 그대로 풀어헤친 적은 별로 많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워낙 시간이 급박해서 머리를 묶는 대신 그대로 늘어뜨리는 스타일을 택했다. 귀로 빗어 넘긴 머리 사이로 그녀의 하얀 볼과 귀걸이 없는 작은 귓불이 보였다.그녀는 평소에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중요한 자리에 갈 때만 귀걸이를 착용하고는 했다.그녀에게서는 항상 샘물을 닮은 청량하고 수수한 향기가 풍기고는 했다.나상준은 잠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차우미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지금… 나랑 얘기한 건가?’나상준은 생후 한 병을 따서 마시려다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물었다.“목 말라? 물 마실래?”말을 마친 그는 생수병을 그녀에게 건넸다.차우미의 눈빛에는 의아함이 스쳤다.그녀가 기억하는 나상준은 자상한 사람은 아니었다.정확히 말하면 그는 자상함이나 섬세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그녀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한 뒤로 그에게 변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목 안 말라. 상준 씨 마셔.”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그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데 아무렇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누굴 좋아하든 그의 자유였고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그녀가 통제할 수는 없었다.변화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초라해지기 싫어서 신경 끄고 살았을 뿐이었다.누구에게나 각자의 인생이 있고 이혼한다고 꼭 슬픔에 빠져 살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그녀에게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있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나상준은 잔잔한 미소를 띤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고 물을 마셨다.청량감이 목을 적시자 기분이 조금 좋아진 것도 같았다.그렇게 둘은 아무런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손이 차우미의 손목을 잡았다.차우미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데도 피부가 맞닿은 부위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낯선 온기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며 고개를 저었다.“나 괜찮아.”운전기사가 차 문을 열고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차우미는 고개를 숙인 채, 차에서 내렸다.여가현은 차우미가 벤츠를 타고 온 줄 모르고 있었다. 온이샘의 차를 보고 다가온 것이었다.“가현아.”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여가현이 움찔하며 뒤돌아섰다.“우미야!”친구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고 친구에게 다가갔다.“상처는 좀 어때? 어디 봐봐!”여가현은 오자마자 차우미의 손부터 살피더니 인상을 찌푸렸다.“이 정도로 심각했어? 설마 흉터 남지는 않겠지?”그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흉터 지는 걸 달가워하는 여자는 없었다.차우미는 여가현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었다. 항상 일에 파묻혀 살던 친구가 드디어 휴가를 얻게 된 것 같아 더 기뻤다.“난 괜찮아.”의사는 흉터가 지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신경이 안 쓰이는 건 아니지만 이미 발생한 일이니 신경 쓴다고 해결될 것도 없었다.“어떻게 괜찮아? 그 예쁜 손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 흉 지면 어떡하려고….”“안 되겠다. 무슨 방법을 써서든 내가 흉 안 지게 해줄게. 흉터는 절대 용납할 수 없어!”여가현이 목청을 높여 말했다.차우미는 빙그레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너 언제 왔어?”“온지 좀 됐지. 너무 배고파서 아침까지 먹고 왔는걸?”“잘했어.”차우미가 활짝 웃었다.나상준과 차우미의 부모님, 그리고 온이샘까지 차에서 내렸다.차우미와 여가현을 제외하고 모두의 시선이 나상준에게로 쏠렸다.딸이 나상준과 같이 차를 타고 온 줄 몰랐던 하선주 부부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맨 뒤에 선 온이샘은 싸늘한 인상을 하고 차에서 내린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여긴 왜 왔어요?”여가현이 팔짱을 끼고 불쾌한 표정으로 나상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차우미의 가장 친한 친구이지만 그녀는 한 번도 나상준을 정식으로 소개받은 적 없었다. 차우미가 소개해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도 바쁜 사람이라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여서였다.정확히 말하면 나상준은 차우미의 개인적인 일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예전에는 둘이 부부니까 참고 넘어갔지만 이제 이혼했으니 더 이상 참아줄 수 없었다.나상준은 조롱과 적의가 가득 담긴 여가현의 눈빛을 지그시 바라보았다.그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친구의 돌발행동에 차우미 역시 당황했다. 여가현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아서 일부러 자신이 구한 사람이 나상준 조카라는 사실을 숨겼던 건데 지금 사실을 말해주면 상황만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차우미는 다급히 다가가서 여가현을 말렸다.“가현아,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여가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친구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차우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들어가서 얘기할게.”여가현은 친구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하선주 부부에게 말했다.“아저씨, 아줌마, 우미랑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는 좀 있다가 들어갈게요.”부부는 여가현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지만 그들도 나상준에게 안 좋은 감정이 많지만 여기서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차동수가 다가오며 말했다.“가현아, 일단 들어가자.”“아저씨, 걱정 마세요. 사고 치려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말을 마친 그녀는 뒤에 있는 온이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선배, 오랜만이야.”“인사는 나중에 다시 하고, 선배는 일단 우미랑 아저씨, 아줌마 모시고 들어가. 상처부터 치료해야 할 거 아니야. 난 이따가 들어갈게.”온이샘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아는 여가현은 비록 여장부처럼 할 말은 다하는 성격이었지만 선은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온이샘은 다가가서 차우미 부모님에게 말했다.“아저씨, 아줌마, 가현이 한번 믿어봐요.”그제야 하선주
여가현은 차우미 일가가 병원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나상준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당신 같이 존귀하신 분이 안평 같은 시골에는 왜 왔을까? 우미가 나한테 얘기를 안 해주기도 하고 나도 딱히 신경 쓰고 싶지는 않지만, 내 친구와 연관된 일이니까 불편해도 들어.”여가현은 키가 큰 편이 아니었다. 하이힐을 신어도 170이 안 되는 작은 키에 나상준과 키 차이가 많이 났지만 그녀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나상준은 여전히 담담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 여가현은 더 화가 났다.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이혼했으면 우미 옆에서 멀리 떨어져. 자꾸 엮이지 말란 말이야. 여자한테 3년은 아주 귀중한 시간이야.”“우미는 당신한테 3년이나 낭비했어. 그 정도면 됐잖아. 당신에게도 당신 가문에도 우미는 최선을 다했어.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마음 잡고 잘 사는 애 마음 헤집어 놓지 마. 각자 삶을 살아가라고.”여가현이 나상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적대심을 품게 된 건 오로지 차우미 때문이었다.3년 동안 친구가 얼마나 외로운 삶을 살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서 친구가 안쓰럽고 가슴이 아팠다.여가현은 경고의 눈빛을 보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거기 더 있었다가는 주먹이라도 나갈 것 같았다.아무런 감정이 없는 바위 같은 무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이 더 불쾌했다.나상준은 멀어지는 여가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3년이 시간 낭비라고 했다라….남자의 눈빛이 점차 차갑게 식어갔다.한편 차우미는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친구의 마음을 누구보다 알기에 더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으로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그녀는 이런저런 고민을 하느라 병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준우를 보지 못했다.나준우가 먼저 그녀와 온이샘을 발견했다.온이샘도 나준우를 알아보았다.이쪽으로 병원을 옮길 때, 안평 병원 주치의 명단에서 이미 나준우
나준우는 놀란 표정을 수습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차우미를 보자 저도 모르게 형수라고 부를 뻔했지만 꾹 참았다.이제는 이혼했으니 형수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그는 호칭을 잠시 고민하다가 이름을 불렀다.“차우미 씨.”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부탁 드릴게요.”“손부터 볼까요?”차우미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이렇게 된 거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싶었다.나준우는 붕대를 풀지 않고 대충 겉면만 확인하고 그녀에게 일련의 질문을 한 뒤, 말했다.“일단 올라가죠. 올라가서 붕대를 풀어봐야 할 것 같아요.”“그래요.”그렇게 그들은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리 심각한 정도는 아니네요. 흉터는 안 남을 거예요.”사무실로 간 나준우는 붕대를 풀고 상처를 자세히 살핀 뒤, 말했다.하선주는 그제야 안심한 미소를 지었다.“정말 다행이네요. 감사해요, 선생님.”부부는 지금도 나준우가 누군지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다.나준우가 웃으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제가 흉터 남지 않게 신경 써서 치료할게요.”“그럼 저희는 안심이네요. 정말 감사해요.”온이샘은 나준우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벌써 교수 명함을 단 그는 청주 대학병원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외과 의사였다.나준우가 이렇게까지 자신감을 보였다는 건 확실히 흉터가 안 남을 거라는 뜻이기에 온이샘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차우미는 고열에 시달린 정황이 있었기에 입원해서 며칠 지켜보는 거로 했다.모두가 의견에 동의하자 차우미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차우미는 VIP 병실로 옮겨졌다.여가현이 병실로 돌아오자 다른 사람들은 둘에게 시간을 주려고 밖으로 나갔다.온이샘은 마트에 다녀온다며 병원을 나섰다. 마트 다녀오는 길에 호텔로 가서 입주 절차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하선주와 차동수는 그를 따라나서기로 했다. 뭐나 온이샘에게 맡기려니 미안한 마음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마침 병원에는 여가현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부
차우미는 어쩌다가 나상준 조카를 구하게 되고 주혜민이 나상준을 따라 안평에 왔다가 자신의 병실까지 찾아온 이야기를 숨김없이 말해주었다.이야기를 할 때 차우미의 표정은 차분했다.지나간 건 지나간 거고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기에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하! 얼마나 자신 없으면 병실까지 찾아와서 그딴 소리를 지껄여?”“이혼한 전처한테 찾아와서 그게 할 소리야? 나상준은 그런 여자를 뭘 보고 좋아한대?”이야기를 다 들은 여가현이 기가 차다는 듯이 욕설을 퍼부었다.차우미는 여전히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건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기도 하고.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어. 그 사람한테 미련도 없어. 그들이 내 앞에서 뭐라고 하든 나한테는 전혀 타격이 되지 않는다고.”짝짝!여가현은 큰 소리를 내며 박수를 치더니 감탄하는 표정으로 차우미를 바라보았다.“왜 그렇게 봐?”차우미의 질문에 여가현은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난 네가 그 나쁜 놈 때문에 속상해하고 아파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잘 생각했어! 역시 넌 최고야.”차우미는 과장된 친구의 표정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그럼 어떡해? 드라마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하루종일 울기만 해?”차우미가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난 아주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역시! 당연히 이래야지! 나상준 배 좀 아플 거다!”“그 인간들한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더 잘 살아야지!”아까까지 씩씩거리던 여가현은 어디로 가고 만면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그녀는 그 뒤에도 한참이나 나상준과 주혜민에게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차우미는 말려도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그녀가 흥이 깨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하! 이제 좀 기분이 나아졌어. 그럼 이제 온 선배 얘기 좀 해볼까?”여가현은 얼굴을 차우미의 코앞으로 가까이 붙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봤지? 온
그녀가 원했던 것은 평범하지만 화목한 가정이었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나상준과 끝까지 가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렇다고 미련이 남지도 않았다.그것은 그녀가 이 관계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차우미는 이혼한 뒤에도 맞는 사람을 만나면 시도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어제 그녀는 여가현의 말을 듣고 밤새 생각해 보았다. 만약 온이샘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천천히 교제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선택이었다.만약 둘이 마음이 맞아서 결혼까지 갈 수 있다면 그것도 인연인 것이다.“잘 생각했어! 역시 내 친구야. 냉철하고 현명해!”여가현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엄지손가락을 내흔들었다. 차우미의 말을 들어보니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나상준만 떠올리면 왠지 복수의 쾌감도 느껴졌다.두 사람은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의사 사무실.나준우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차우미의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설명을 다 들은 나상준이 물었다.“바쁜 사람 갑자기 불러서 미안해.”나준우는 청주 대학병원의 에이스로서 아무나 부른다고 안평까지 외래 진료를 보지는 않는다.나준우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마침 은사님도 만나고 난 오히려 좋아. 걱정 마.”말은 그렇게 해도 차우미가 다 나을 때까지 그가 여기 있어주기를 바란다는 건 알고 있었다.“곤란하면 나한테 얘기해. 다른 의사 알아볼 테니까.”“그래, 알았어.”용건을 끝낸 나상준은 별다른 이야기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나준우도 그와 함께 사무실을 나서며 물었다.“상희는 좀 어때?”“괜찮아.”나상준은 높낮이 없는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나준우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온이샘이 떠올랐다.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다 같이 산책하러 나갔던 날 예은이 핸드폰에서 들려온 목소리도 아마 온이샘이었을 것이다.‘형도 이샘 형을 봤을 텐데….’“문제 생기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엘리베이터에 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