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흔은 전시회에 온 대중들의 반응을 보고 자신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하연이 압도하는 이 무대의 연출은 너무 완벽했다.반대쪽에서 무대를 보던 운석은 이때 그 누구보다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하연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한동안 온통 서글프고 실의에 빠져 지냈다. 운명의 장난이라 생각했다. 자기 손으로 너무나 완벽한 운명의 상대를 밀쳐낸 것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했다.운석은 한때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으로 생각하고 이제 하연을 잊기로 결정했다.그러나 하연이 등장하는 것을 본 후, 다시 참지 못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마치 그날 밤 건물 옥상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엄마, 저것 봐, 또 그 재수 없는 계집애야!” 구석에 앉아있던 서영이 이수애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며 말했다.이수애는 말투가 매우 좋지 않다.“네가 말 안 해줘도, 나도 다 보여.”“그래.” 서영은 입을 다물었다. 서영은 두번이나 감옥에 들어간 일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비참하게 욕을 먹었다. 지금은 가족들 앞에서 마음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이수애는 그 ‘바다의 눈물'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차라리 이를 악물고 이 목걸이를 사서 잃었던 명예를 되찾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최근 한씨 집안의 위상이 땅바닥에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수애는 명품 매장에서 하연의 VVIP카드로 한번 모욕을 당했고, 서영은 다이아몬드 팔찌 건으로 경찰서에 두 번이나 연행되었다.최근 B시 상류층 여성모임에서 이수애와 서영의 평판은 형편없었다. 사람들이 서영과 이수애 하면 돈도 없고, 부자인 척하며, 좀도둑질이나 한다는 몇 가지 단어를 떠올리는 상황이었다.마지막 전시품이라 최하연은 스탠드에서 내려온 후에도 푸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풀지 않았다.가흔은 총 디자이너로서 내빈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VERE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묵묵히 고생해 주신 스태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물론
“너 사람 잘 못 건드렸어!”이수애는 이를 악물고 이 한 마디를 하연에게 내뱉으며 서영을 끌고 사람이 적은 곳으로 몸을 피했다.하지만 기자들 무리가 두 사람의 뒤를 바짝 쫓았던 탓에 잠깐 동안은 관중석보다 두 사람의 주위가 더욱 시끄러웠다.쇼케이스가 끝났다.무대 뒤로 돌아온 하연이 ‘바다의 눈물'을 한쪽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았다.예나는 또 다른 분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하연은 앉아서 예나가 단체방에 공유한 쇼케이스 현장 사진을 보고 있었다.[나나양: 자기야, 봐봐! 우리 둘 다 너무 예쁘지?][이쁜이: 하트 뿅뿅! 너무 예쁘다!][여은이: 해외 출장 가는 것만 아니었으면 가서 꼭 보고 싶었는데. 이리 와, 안아줄게.][가으니: 오늘 수고했어! 저녁에 다 같이 모이자.][나나양: 오늘 정말 웃겨 죽을뻔했다니까?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VERE을 사버리겠다는 하연이 전 시어머니 태도에 웃겨서 눈물이 다 났어.] [이쁜이: 그 사람은 아직도 내가 자기 며느리인 줄 아나 봐.]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대기실 문이 열리고 잔뜩 화가 난 이수애와 서영이 들어왔다.하연은 입가에 경멸하는 웃음을 띠며 싸움에서 진 수탉 같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아까 들은 욕으로는 부족했나요? 그래서 욕을 더 들으려고 직접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너는 오늘 이 목걸이 꼭 나한테 팔아야 해!”이수애는 들어오자마자 최하연에 의해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인‘바다의 눈물’을 언뜻 보았다. 저렇게 비싸고 예쁜 것을 장난감처럼 대충 벗어던져 놓은 것을 보자 질투심이 폭발할 것 같았다.구겨진 체면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연의 목걸이를 자기가 사는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귀가 잘 안 들리면 병원에 가세요. 안 팔 거라고 했는데 잘 안 들리시나 보네요.” 하연은 휴대전화를 한쪽에 놓고 거울을 보면서 계속 귀걸이를 빼고 있었다.“목걸이 값이 얼마가 됐든 상관없어, 꼭 살 거야!”“그만하시죠.”하연이 여유롭게 말했다.이수애는 화가 나서 현기증이 몰
“오빠, 나 믿지? 나랑 엄마 지금 이 모양 이 꼴 된 거, 다 저 여자가 한 짓이야.”서영은 서준이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이수애도 일어나서 계속 말하려다, 갑자기 흥분하면서 쓰러졌다. 옆에 있던 서영이 이수애를 얼른 부축했다.하연은 오래전부터 이수애와 서영의 이런 속임수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상대를 비웃는 하연의 말투에는 당당함이 배어 있었다.“맞아, 내가 그랬어.”하연은 이 사람들과는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다. 몸을 돌려 대기실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서준이 문 앞을 가로막았다.하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떨어져서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비켜.”초주검이 된 이수애와 서영의 모습을 본 서준은 하연에게 기울었던 마음의 저울추가 다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언제까지 화만 내고 있을 거야?”서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연은 이것이 근래에 들은 것 중 가장 웃긴 농담이라고 느꼈다.“내가 무슨 화를 냈다고 그래?”“내가 당신 여동생과 어머니한테 손찌검을 당한 거, 이혼 전에 당신 집에서 괴롭힘당했던 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고?”“정말 다정한 효자 나셨네.” 하연은 어이없어 고개를 저었다.“내가 뭐 하러 저런 더럽고 역겨운 사람들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겠어?”“그렇게 고상하신 분이 손버릇은 아주 나쁘네!”서영은 또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가 기절한 이수애를 일으켜 세웠다.“당신들 스스로 이렇게 화를 자초하잖아, 더러운 파리처럼 계속 내 주변을 맴돌면서 괴롭히는데, 내가 당신들 마음까지 헤아려줘야 하는 거야?”“식구들 단속 잘 해. 동네 창피하게 나와서 웃음거리 되지 말고.”하연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동자로 서준을 째려보았다.“다시 한번 이렇게 제멋대로 무례하게 행동하면, 그때는 변기 물 세례로 끝나지 않을 거야.”서준은 여전히 커다란 돌부처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차가운 눈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그래도 한때는 부부 사이였는데, 이렇게까지 듣기 거북하게 말해
운석은 이전에 껄렁껄렁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하연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보아하니 손수건이 필요 없을 것 같네요.”하연이 정색하며 말했다.“물론이죠, 울지도 않았으니까요.”“지난번처럼 예쁘게 우는 모습일 것 같아 오늘은 특별히 손수건 두 장 준비했는데.”운석은 손수건을 하나 더 꺼내며 눈웃음을 지었다.“어때요, 나 배려심 끝판왕입니다.”하연은 D국 옥상에서 있었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자신이‘원수' 앞에서 운 거였다. 그렇게 다른 사람 앞에서 우는 게 거의 없는 일이라 그 날의 기억이 몹시 불편했다.“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세요? 운석 씨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운석은 하연과 다투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내가 잘못 안 거 맞아요.”운석은 하연의 불편한 얼굴을 보면서 이전에 울었던 것도 서준 때문이었을 거라고 추측했다.“내가 가서 한 대 때려줄까요?” 운석이 이 말을 물었을 때 그 눈빛은 보기 드물게 진지했다. 심지어 허공에 주먹질까지 했다.“말만 하세요, 뭐든 가서 시키는 대로 다 할 거니까.”“한서준이랑 친구겠지만, 한서준 편만 안 들면 돼요.” 하연은 운석의 말을 믿지 않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운석은 자신을 믿으라며 가슴을 힘껏 두드렸다. 그 진동 때문에 두 번이나 헛기침을 했다.“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내가 명색이 정의의 사도인데, 내 친구라고 편들 수는 없습니다!”하연을 보는 운석의 눈빛에는 마치 여왕을 위해 전쟁에 나가는 기사 같은 비장감이 돌았다.하연의 아름다움은 장미처럼 가시가 돋혀 있다. 운석은 하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기로 했다.정색을 하는 운석이 너무 웃겨서 하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정말 아무 말 대잔치네요.”“원하는 거 저한테 말만 하세요.”운석이 발걸음을 내디디며 하연의 곁에 섰다.“말만 번지르르하긴.”하연은 계속 운석을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전과 다른 점은 이번에는 미간에 웃음기가 있다는 것이다.‘오늘 내 편을 드는 걸 보니 눈이 삔 한서준보다 백배 낫네
“바빴어요.” 하연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조진숙과 하연의 어머니는 매우 사이좋은 친구였다. 하연의 부모가 사망한 후부터 줄곧 조진숙과 부동건 부부가 하연 남매들을 돌보았다. 하연이 성인이 되고 나서야 조진숙은 비로소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났다.조진숙은 하연의 어린 시절 내내 엄마 역할을 대신해왔다. 하연은 일찍이 조진숙을 진짜 가족처럼 생각했다.하연은 사방을 바라보며 조진숙을 향해 음흉하게 웃었다.“이모, 동건 삼촌은 왜 안 오셨어요?”“오거나 말거나!”조진숙은 화가 난 척했다.“그 사람 얘기는 하지도 마.”“오.” 하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웃음을 참았다.조진숙과 부동건 부부는 애증의 관계이다. 같이 있을 때는 싸우고, 떨어져 있으면 상대방을 걱정했다. 젊었을 때 화가 나서 잠시 이혼한 적이 있었다. 부동건은 이혼한지 얼마 안되어 바로 후회하고, 아내만 생각하고 아내만 쫓아다니는 아내 바라기 생활을 시작했다.DL그룹 사업도 내버려두고 이제 갓 성년이 된 아들 부상혁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그러고 나서 세계일주 여행을 하는 와이프를 쫓아다니게 되었다.“이것아, 너 이혼한 거 하민이한테 다 들었어. 이렇게 나이를 먹고도 결혼을 장난으로 여기다니.” 조진숙은 하연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따뜻한 눈빛으로 하연의 작은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이모가 애초에 어떻게 너를 가르쳤지? 괴롭힘을 당하면 반드시 받은 만큼 되돌려줘야 해. 너는 이 조진숙의 보물이야. 네 뒤에 DL 그룹과 최씨 집안이 있다는 걸 잊지 마.“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말 안 한 거예요.”하연은 조진숙의 팔을 좀 더 꼭 껴안고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제가 잘못했다는 거 이제 알아요.”하연은 약한 모습이 없는 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가족 앞에서 이런 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었다.조진숙은 하연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모, 왜 그래요?”조진숙은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 당시 NW그룹이
‘어디서든 마주친다니...’“서준 씨, 이번에 나를 보러 와줘서 정말 기뻐.”혜경이 부드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서준은 자신의 손을 잡고 싶다는 혜경의 말을 피했다. “저쪽에 사업 파트너가 있는데, 가서 얘기 좀 하고 올게.” 서준은 차가운 말투로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혜경은 기분이 나빠졌다. F국으로 온지 이미 두 달이 지나가지만 서준은 좀처럼 혜경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어려운 기회를 얻은만큼 서준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아이를 위해서라도 좀 더 가까워지면 좋잖아!’혜경은 달갑지 않은 얼굴로 서준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뜻밖에도 하연이 맞은편에서 우아한 자태의 중년 여성과 동행하고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혜경은 입꼬리를 구부리고 웃으며 배를 일부러 내밀어 황후마마처럼 하연 앞으로 왔다.“어떻게 어딜 가도 네가 꼭 있냐?”하연은 혜경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사돈 남 말 하시네.”혜경이 이를 악물었다.“나는 정말 너를 이해할 수 없어. 이혼할 때는 그렇게 쿨한 척해놓고, 지금은 또 우연히 만난 척하면서 서준 씨를 귀찮게 하고 있잖아, 정말 끈질기네.”조진숙은 둘의 대화를 듣자마자 고개를 돌려 하연에게 물었다.“하연아, 이 사람이 네 결혼 파토낸 세컨드야?”“이봐요, 아줌마, 말 참 고약하게 하시네.”조진숙은 처음으로 아줌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하연아, 이모가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니?”조진숙은 고급 화장품 ME그룹의 창업자로, 안티에이징 비법으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평소에 나가면 모두 누나라고 부를 정도로 젊은 미모의 소유자인데 오늘 뜻밖에도 이런 소리를 듣게 되었다.“이모가 제일 예뻐요. 쟤 입이 너무 구리네.”하연은 혜경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고 웃었다.“나에게 한서준은 쓰레기보다도 못한 물건이야.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르겠네.”“너!” 혜경의 목소리가 살벌해졌다.하연의 시선은 여전히 그림을 향해 있었다.“보는 사람이 많아. 망신당하지 않
“사과하라고요!”“헛소리 그만 하라고요!” 혜경은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나는 명문가 집안 사람이에요, 내가 왜 당신 같은 아줌마에게 사과해야 하죠? 미쳤어요?”“팍!”조진숙은 참을 수 없었다. 조진숙이 혜경에게 달려 들었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혜경의 따귀를 세게 걷어 올렸다.“교양 없긴!”조진숙은 혜경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났다. 한 대 때리고 난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한번 더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혜경은 이번에는 재빨리 피했다.하연은 조용히 조진숙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작은 소리로 조진숙에게 말했다. “이모, 완전 멋있어요.”“그럼, 이런 거 치우는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조진숙이 웃으며 말했다.“이모가 있으니까 너는 가만히 내 옆에 서 있기만 하면 돼.”조진숙이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보고, 하연은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눈동자 속에 조진숙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다. 굳이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조진숙은 어려운 상황에서 아무 이유 없이 기꺼이 하연을 위해 나섰다.조진숙의 손아귀 힘이 매우 세서 혜경은 넘어지려던 몸을 한쪽의 기둥을 짚고서야 지탱할 수 있었다.따귀 소리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혜경은 얼굴을 가리고 그 자리에 있던 큰오빠 민우진을 불렀다. 혜경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조진숙을 가리키며 울며불며 하소연했다.“큰오빠, 이 사람이 나를 때렸어!”우진은 여동생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혜경을 도와 나서려 했다. 우진은 자신의 여동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상대가 누군지 똑똑히 보았다. 우진의 노기등등한 얼굴은 순식간에 알랑거리는 웃음으로 바뀌었다.‘이런 거물의 미움을 살 수 없지.’“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한 것 같네요. 당장 나가겠습니다. 기분 푸시고요!”우진은 조진숙에게 코가 땅에 닿도록 바짝 엎드려 사과했다.“오빠가 무슨 사과를 해! 저 사람
혜경은 한번도 우진에게 이렇게 큰소리로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었다. 갑자기 난처한 얼굴로 불쌍하게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자세는 여전히 뻣뻣했다.다른 사람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싶지 않은데, 하물며 그 상대는 하연이었다.지금 F국에 머물러 B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직 이 여자의 하사를 받은 것이 아니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혜경은 서준을 발견하고 서준 쪽으로 다가왔다.혜경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 하연을 향해 걸어갔다가 아주 가까이 가서 멈춰 섰다.하연은 혜경을 위아래로 한 번 보고 경계했다.“또 뭘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반짝이는 눈동자를 한 혜경이 마치 배수진을 친 듯 모질고 차가운 소리로 웃었다.“최하연, 이건 다 네가 나를 괴롭히려고...”“아...”혜경이 비명을 지르며 갑자기 뒤로 넘어져 옆에 있는 꽃병에 부딪혔다.사람 키 절반 정도 높이의 거대한 꽃병이 쓰러지면서 혜경과 함께 넘어졌다. 그 틈을 타 혜경은 기둥에 부딪힌 뒤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하연은 눈앞의 이 장면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여전하네, 민혜경...’서준은 앞으로 나아가서 혜경을 일으켜 세우고 차가운 목소리로 우진을 책망했다.“왜 혜경이 옆에서 혜경이를 보호하지 않으신 겁니까?” 우진은 안색이 어두워서 혜경을 보았다.어릴 때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일단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부딪히면 단지 이런 식으로 속이는 가식적인 행동은 식구들끼리는 잘 알고 있지만, 밖에서 직접 거짓말이라고 폭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서준은 차가운 눈으로 하연을 흘겨보았다.“어떻게 지금 임산부에게 손을 댈 수 있지?”서준은 하연을 대할 때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분노와 복잡한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하연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하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비록 한걸음 물러 서서 자기 가족을 대신해 사과한다 하더라도 하연은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을 기세였다.조진숙은 서준을 알아보고, 서준이 혜경을 보호하려는 것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목소리 톤도 점차 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