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로 돌아온 장하리는 피곤함을 느끼며 좌석에 기대었다. 어젯밤 잘 쉬지 못한데다가 볼까지 이따금 아팠다. 차창을 통해 가게를 들여다보면 돈뭉치를 세며 기뻐하는 노임향의 얼굴이 보였다. 눈에 희열이 가득한 모습. 잠시 후, 한 남성이 가게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장하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의붓 아버지였다. 처음엔 하마터면 어머니의 남자에게 당할 뻔했었지. 그때 노임향과 마주친 뒤에도 그는 얼굴에 당황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노임향이 절대적으로 딸을 불신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노임향은 장하리의 말따위 듣지 않고 매를 들었다. “이 천한 년. 어린 애가 어떻게 아버지를 꼬실 생각을 해? 당장 꺼져버려.”장하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이 그런 일을 겪고서도 어머니에게 뺨을 맞고 욕설을 들었어야 했는지.나중에 방우찬과 만나게 된 후 아버지는 더이상 자신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장하리는 두 손으로 운전대를꽉 잡았다. 아예 액셀을 밟아 지금 당장 차로 치어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생겼다. 그는 살이 더 찐 상태였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꿈틀거리는 벌레같았다. 왜 자신의 어머니가 저런 남자를 보물단지처럼 애지중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하리는 역겨워졌다. 서둘러 차에서 내려 한쪽에 있는 화단 앞으로 가 헛구역질을 했다. 그 사람의 등장에 어릴적의 트라우마가 다시 발작해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그녀는 심지어 방금 자리에 어머니가 저 사람까지 초대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더 메스꺼워져 두번이나 토했지만 나오는 것은 노란 액체 뿐이었다. 오늘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까. 장하리는 차에서 생수 한병을 꺼내 입을 헹구려고 했다. 그러나 정신이 혼미해졌을 무렵 귓가에 느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리? 하리 맞구나. 너무 멀어서 못 알아봤어.”살이 뒤룩뒤룩 찐 벌레가 장하리에게로 걸어온다. 장하리가 고개를 들자 기름진 턱과 번쩍이는 이
성혜인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던 반승제가 빠르게 뒷걸음치는 그녀를 보았다. 너무 갑작스레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하마터면 옆에 있는 큰 화분에 부딪힐 뻔했다.“혜인아!”다급히 성혜인을 부른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려 했다.성혜인은 몸을 움츠렸고 머릿속이 심하게 복잡해졌다.그녀는 더듬거리며 몸을 일으켰다.“승제 씨, 저 가서 쉴게요. 머리가 아파서.”손가락 끝이 벽에 닿자 곧바로 벽을 더듬으며 성혜인은 반승제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바로 떠났다.반승제가 얼른 쫓아 나왔다. 성혜인이 복도로 왔을 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반승제 씨 오늘은 있어요? 여러 번이나 왔는데 나와서 만나지도 않고. 제 물건이 아직도 네이처 빌리지에 있는걸요.”밖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임수아가 고개를 들어 성혜인을 보았다. 그녀는 단번에 자신과 비슷한 얼굴인 이 여인이 반승제가 좋아한다는 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성혜인은 그저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 없이 벽을 더듬으며 떠나려 했다.임수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생각했다.‘그래서, 그 좋아한다는 여자가 맹인인 건가?’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느껴졌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당연히 맹인보다는 정상인이 나지 않겠는가.그녀가 입꼬리를 반달처럼 예쁘게 접으며 그제야 성혜인을 발견한 듯 능청스럽게 말을 걸어왔다.“언니, 앞이 잘 안 보여요? 어디 가시려고요?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저 여기 잘 알아요.”성혜인이 대답도 하기 전에 임수아가 그녀의 팔뚝을 잡아 부축했다.이에 성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했다.“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놔주세요.”성혜인은 정말로 다른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게다가 낯선 사람에게 부축받는 건 더 익숙하지 않았다.지금 성혜인은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후각과 청각은 매우 영민해진 상태였다. 슬쩍 다가오는 여인의 향기를 맡아보니 전에 반승제에게서 맡았던 냄새와 같았다.성혜인은 배현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실천에 옮길 용기는 없었기에 그저 눈물이 나왔다.“대표님 분명 저 좋아한다고, 절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었으면서... 다 거짓말이었어.”그 목소리가 매우 컸기 때문에 침실 안에 있는 성혜인은 듣지 못했을 리 만무했다.성혜인은 그제야 제가 사라졌던 그 시간 동안 확실히 반승제가 다른 여자에게 곁을 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 배현우는 성혜인을 속이지 않았다.여자아이의 울음소리에 성혜인이 벌컥 문을 열었다.반승제는 짜증이 나던 터였다. 이미 저에게서 몇억이나 가져가 놓고 이런 행패를 부리고 있으니.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뒤돌아보았고 문 앞에 서 있는 성혜인을 발견했다.성혜인은 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한 손으로 담담히 문틀을 잡고 있었다.“승제 씨.”성혜인의 부름에 반승제가 우물쭈물 대답하며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 혜인아, 일단 좀 더 자는 건 어때? 안색이 안 좋아 보여.”“승제 씨, 이 여자애는 누구죠?”반승제는 시원히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성혜인의 손을 꼭 잡을 뿐이었다.오히려 곁에 있던 임수아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저는 반 대표님 여자 친구예요. 얼마 전에 사귀게 되어서 저 때문에 회사도 여러 개 인수했는데 이제 와서 헤어지자네요... 언니, 혹시 제 존재가 언니한테 위협이 되는 거예요? 전 대표님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다른 명분은 다 필요 없고 전 그냥 대표님이 정말 좋아서 곁에 있고 싶은 것뿐이에요. 용서해주세요...”임수아가 무릎을 꿇었다.성혜인은 그저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었다.잠시 멍해 있다가 성혜인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 아이는 용서를 구하는 방법으로 오히려 자신을 순진한 동생 하나 품어주지 못하는 나쁜 언니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성혜인은 아무 말 없이 차갑게 서 있었다.그리고 그녀가 말이 없자 반승제는 더 조급해졌다.결국 반승제가 잘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얼른 심인우와 경호원을 불러왔다
반승제가 성혜인의 손을 부드럽게 문지르다 품에 안고 가볍게 토닥였다.“일단 들어가서 좀 자.”성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향기가 또 코끝에 퍼지는 것이 느껴져 짜증이 났다.더 이상 임수아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이 훈향 진세운에게서 가져온 거예요?”“승제 씨, 이 훈향 좀 전문 기관에 가져가서 검사해 보면 안 돼요? 냄새가 너무 불편해요.”그녀는 K 씨에게서 맡았던 향기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었다. 어쨌든 진세운은 자신을 도와주었고 이 일로 인해 반승제가 또 자신에게 의심을 품는다면 앞으로 그들의 관계는 절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그녀는 천하의 죄인이 될 것이다.성혜인은 터질 듯이 아픈 머리를 어루만지며 또 화가 치밀어올랐다.“그냥, 훈향의 성분이 궁금해서 그러는 거예요.”그녀가 특정 성분에 알레르기가 있을까 걱정되었던 반승제는 얼른 심인우를 시켜 검사해 보도록 했다.한 시간 후 기관의 검사 보고서가 왔는데 훈향의 모든 성분은 안전하며 건강에 좋은 것들이었다.반승제는 특별히 이 검사 보고서를 성혜인에게 읽어주었다.“이 재료 중에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어? 세운이한테 제거해달라고 하면 돼.”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확인된 다음에야 널뛰기하던 심장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그러나 성혜인은 여전히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과하게 화를 내고 의심이 많아졌다.반승제를 다치게 한데다가 지금은 뺨까지 때렸다.심지어 임수아가 구구절절 반승제가 자신을 얼마나 아꼈었는지 설명할 때, 포커페이스조차 되지 않았다.그녀는 반승제에게 가차 없이 심한 욕설을 퍼붓고 싶어졌고, 이른바 그의 호감까지 비웃고 싶었다.이는 평소의 감정 컨트롤을 잘하던 그녀와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람을 이렇게 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던가.성혜인이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뺨... 부었어요?”“아니, 걱정 안 해도 돼.”임수아는 이미 끌려간 뒤였고 짐도 보이지 않았다
반승제의 손에 이끌려 침대에 누웠지만 심한 두통 때문인지 졸리지도 않았다.“혹시 세운 씨 제 두통의 원인에 대해서 말한 적 없어요?”“그때 머리 부상 때문에 아직도 피가 고여있어서 가끔 어지럼증을 느낄 거라 했어. 그러니까 많이 쉬어야지.”성혜인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품에 안겼다. 고작 십몇분의 시간이었는데 이마는 이미 두통으로 인해 땀이 맺혔다.반승제가 끊임없이 성혜인의 등을 토닥이며 책을 읽어주었다.“읽어줄게.”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특히나 책을 읽어줄 때.반승제의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씩 졸음이 몰려왔다.졸리면서 행복하기도 했다.꿈과 현실 그 사이의 흐린 의식 속에서 또 K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그날 서재 밖에서 몰래 들은 대화처럼 말이다.목소리는 마치 귓가에서 울리는 듯 가까웠다.성혜인은 문득 겁이 나며 불안해졌다. 처음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성혜인은 며칠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했다.그럼 이번엔 또 얼마나 혼수상태에 빠지려는 건가.성혜인의 몸은 석상처럼 딱딱히 굳어있었다. 옆에선 그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어떻게 성혜인을 자기 뜻대로 조종할지 의논 중이었다.그 말들을 들으면서도 성혜인은 가위에 눌린 듯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군가 손으로 그녀의 몸을 쓰다듬을 때까지.성혜인은 깜짝 놀라며 손을 피하려 했다. 숨을 가쁘게 쉬며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몸은 중력을 10배로 받은 듯 무거웠고 손가락조차 들 수 없었다.“놔! 놔요!”성혜인이 손을 뿌리치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이때 K 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혜인 씨, 이건 혜인 씨가 제 말을 듣지 않은 대가예요. 누가 혜인 씨더러 그 피어싱을 빼라고 했죠? 저 지금 너무 화나는데요?”“우리가 다시 협력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당신에게 달려있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요. 혜인 씨는 오늘 확실히 절 실망하게 했어요.”K 씨의 목소리는 전과 다름없이 온화하고 부드러웠지만 여전히 웃음 속에 칼
네이처 빌리지에 들어선 배현우가 사방을 둘러보았다.이 별장은 확실히 성혜인이 좋아하는 인테리어이다.문득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한 생각에 놀라 온몸이 굳었다. 성혜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그가 어떻게 이 인테리어가 그녀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이렇게 확신하는 건가.양미간을 찌푸리며 둘러보던 그가 반승제의 외침을 들었다.“혜인이 봐줘요.”배현우는 가소롭게 생각했다. 이 여자가 죽든 말든 자신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혹시 죽으면, 반승우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르는데?반승제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그는 다가갈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러나 그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소파에 누워있는 성혜인을 향했다. 성혜인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린 채였고 이마가 땀으로 젖어있었다.반승제는 한 손으로는 성혜인의 손을 다정히 잡고, 한 손으로는 부지런히 땀을 닦아주었다.배현우는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와 성혜인을 관찰했다.“혜인이 최근에 뭐 먹은 거 없어?”반승제가 얼른 성혜인에게 물었다.“혜인아, K 씨가 혹시 뭐 먹였어?”성혜인은 자신이 먹었던 이상한 약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약은 여러 번 먹었는데 성분은 잘 몰라요. 그저 그중 하나가 한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만 알아요.”성혜인은 고통에 시달리며 맥없이 반승제의 손을 잡았다.반승제가 배현우를 바라보았다.“채혈이라도 해볼까요? 혹시 아직 약물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요.”이때 배현우가 옆에 앉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나한테 보여줘서 뭐 해. 내가 의학을 아는 것도 아닌데.”말실수한 것을 자각한 그가 어깨를 약간 으쓱했다.“네 의학 잘 안다는 친구 오면 다시 보지 뭐.”배현우의 말이 끝나자 머릿속에 반승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신체에 아직 약물이 남아있다면 해독제는 내가 빠르게 만들 수 있어. 약물이 남아있지 않다면 해결하기 어려울 거야.”“얼마나 어려운데?”그러나 반승우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혜인이한테 지금 느낌이 어떤지 물어봐 줘. 혹시
“지능 높은 사람들을 통제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지능 높은 사람들은 이 약물을 먹으면 초반에는 마음이 더 굳세어지지만 며칠 더 지나면 아예 무너져버려. 최대 열흘이면 정신 나간 미치광이가 돼. 만약 이 약물이 맞다면 연구기지 사람이 혜인이 쪽에 붙은 거야.”배현우가 눈에 빛을 내며 씩 웃었다.그는 반승우가 연구기지를 언급할 때 목소리가 가라앉아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두려움이 아니다. 반승우는 복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 기지에서 당했던 모든 일에 대한 복수.“배현우, 내가 말한 거 그대로 전달해 줘.”“아니, 싫어. 너나 반승제나 다 멍청이야? 내가 왜 너흴 도와줘?”배현우는 득의양양하게 대답하며 옆에 있는 컵의 물을 마시려 했다.그러나 물이 아직 입에 들어오기도 전에 반승제가 컵을 쳐냈다.“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으면서 왜 마셔요. 물은 돈 안 내요?”그의 차가운 말투 속에 독기가 서렸다.“계속 봐줘야죠.”배현우: “...”제원에서 반승제를 이길만한 뒷배만 있었다면 배현우는 진작 그를 죽여버렸을 것이다.배현우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치료 못 해. 아마 연구기지의 약일 거고 혜인이처럼 마음이 굳센 사람들 의지를 꺾기 위해 만든 약이야. 길어야 10일 버틸 수 있고 그 이후엔 정신이상자, 미치광이가 될 거야. 약 만든 사람이라야 해결할 방법을 알겠지. 연구기지는 세계의 의학 천재들이 모인 곳이야. 그 사람들이 연구해 낸 약물인데 고작 엘리트 하나가 어떻게 해독제를 만들어.그럼 혜인이 데려가서 가서 정밀검사 시킬 테니 신체에 남은 약물이라도 대조하면서 해독제 만들어요.”“내가 말했지. 엘리트 한 명 혼자서 절대 못 한다고. 게다가 이미 약물이 사라진 지 오래일 텐데. 이래서 그 무리가 무섭다는 거야. 보아하니 너흴 견제하는 사람들이 꽤 대답한 신분인 것 같은데. 연구기지에서도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적어도 관리계층 급이야.”반승제의 안색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사업으로 돈을 버는
고통 때문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어도 성혜인은 반승제가 한 말을 똑똑히 들었다.무엇을 알겠다는 거야?성혜인이 그의 소매를 꽉 쥐었지만 그는 묵묵히 성혜인을 껴안을 뿐이었다.성혜인은 그저 자신이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들고 귓가가 윙윙거렸다.반승제가 옆의 두 사람에게 물었다.“고통을 줄이는 약은 없나요? 진통제는요?”진세운이 성혜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대답했다.“나한테 진통제가 있긴 한데. 효과는 겨우 3일이야. 게다가 3일이 지나면 고통이 배가 돼.”배현우가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연구기지에서 만들어낸 약물에 대응할 수 있는 진통제, 그 진통제가 있는 사람 역시 보통이 아니다.“그럼 먹게 해줘. 힘들어하는 거 더는 못 보겠어.”잠긴 목소리로 어렵게 대답한 반승제가 진세운이 바늘을 꺼내 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이때, 성혜인이 어디서 힘이 솟구친 건지 반승제의 손목을 움켜쥐었다.“주사 안 맞을래요. 승제 씨 마음 다 이해하는데 그래도 전 가고 싶지 않아요. 승제 씨 곁에 있을래요.”성혜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한자 한자 어렵게 말하고 있었다. 안색은 백지장같이 창백했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얼굴에 아무런 핏기가 보이지 않았고, 게다가 눈앞도 보이지 않으니 말로써 그 초췌함을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그런데 반승제가 어떻게 제 애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혜인아, 일단 진통제만.”“싫어요.”그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진세운도 동작을 멈추고 반승제에게 다시 물었다.“정말 맞힐 거야? 설마 3일째 되는 날 효과가 사라지면 바로 보낼 생각인 거야?”반승제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별다른 방법이 없다.전에 성혜인이 K 씨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든 적어도 성혜인의 목숨을 살려둘 것이다. 또 수령에 대해 말하기도 했었다. 지금 상황도 말을 듣지 않아 복수 당한 것이라고 했다.반승제가 한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