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봐봐. 여기 온 사람들 다 커플이지? 부럽지?’강연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수아는 몰래 인상을 찌푸렸다.‘우리 송이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걸까?’오빠들이 강연의 치료와 정서를 생각해 당분간만 이곳에서 머물겠다는 강연의 요청을 딱 잘라 거절하지는 않았으나, 강연은 한술 더 떠서 행동했다.그러나 수아는 별말 없이 강연이 이끄는 대로 좌석에 착석했다.품 안으로 거대 사이즈의 팝콘이 들어오고 수아는 자신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였다.영화 내용은 어느 남녀가 친구가 된 과정과 연인이 되기까지 겪은 일들, 그리고 결혼에 골인한 내용을 담았다.전체적인 스토리가 아주 현실적이라 공감이 많이 되었다.수아 역시 감동이 되긴 했으나 강연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우리 송이랑 전서안이 친구 사이는 아니지 않았나?’이어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었고 둘은 다른 상영관으로 자리를 옮겼다.스토리는 앞서 영화와 비슷했는데 사랑 없이 죽고 못 사는 영화를 보고 나니 사랑에 대한 환상이 절로 생겼다.강연은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수아에게 감상을 물었고 수아는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말했다.“둘째 오빠를 제외하고 너한테 어릴 때부터 함께 큰 친구가 있나 생각해봤는데 없는 것 같아.”[언니, 나한테만 집중하지 말고 언니 스스로를 생각해 봐요.]강연은 빠르게 타자를 해 수아에게 건넸다.그러나 수아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해 보였다.“네가 어릴 때부터 내가 옆에 있긴 했으나 우린 자매고 결혼할 수는 없잖아.”강연은 할 말이 없어 뒤통수를 잡았다.강연은 점점 안택의 기분이 어땠을지 이해가 되었다. 이 몇 년 동안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강연은 어쩔 수 없이 수아와 함께 세 번째 영화를 보러 갔다.이번 스토리는 우여곡절이 담긴 사랑 이야기였는데 한 번의 차 사고에 두 사람은 하마터면 생사가 갈라질 뻔했다.남자 주인공의 병실에서 여자 주인공은 고통에 잠겨 엉엉 울었고, 그동안 티격태격하느라 다정하게 대하지 못한 것에 후회했다.다행히 결말은 해피 엔딩이었다. 남자 주
달려온 안택이 바로 수아를 품에 넣었고,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똑바로 설 수 있겠어요?”안택의 질문에 수아가 시도했지만, 발목 쪽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수아는 인상을 찌푸렸다.안택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이어 안택은 수아를 가로로 안아 들고 곧장 출구로 걸어갔다.수아는 반사적으로 안택의 목을 끌어안았다.가까워진 거리에서 안택의 매끈한 턱선과 섹시한 목젖이 훤히 드러났다.아직 어린 줄 알았던 후배는 애티나는 소년에서 어느새 건장한 성인 남자로 성장했다.얼굴이 붉어진 수아는 쿵쿵대는 안택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본인 역시 심장이 콩닥거렸다.낯선 감정이 천천히 수아를 삼켰다.한참 품에 안겨있던 수아는 불현듯 동생 강연과 함께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조급해하며 수아가 말했다.“안택, 우리 송이는...”안택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고, 인파 속에 몸을 숨긴 강연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고개를 돌린 두 사람을 향해 강연은 눈을 깜빡이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손을 휘휘 젓는 모습이 먼저 가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안택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강연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 안택은 수아를 달래며 계속해서 밖으로 걸었다.“괜찮을 거예요. 사람을 시켜 데리러 가라고 할게요. 우린 일단 병원으로 가요.”“그럴 필요는 없어...”수아는 조금 쑥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품에 묻었다.“그냥 헛딛었을 뿐이야. 돌아가서 약 바르면 돼.”“안 돼요.”안택이 바로 거절하자 수아는 깜짝 놀란 눈치였다. 그러자 안택은 조바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선배, 제가 걱정되어서 그래요.”왠지 이 장면, 방금 본 영화에서 나온 장면 같았다.여자 주인공이 다치자 남자 주인공이 똑같은 얼굴과 말투로 이렇게 말했었다.“일단 병원으로 가요. 안 그러면 내가 너무 불안해서 안 돼요.”수아는 영화 속으로 들어간 기분에 심장이 짜릿해졌다.그래서 수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강연이 인파를 뚫고 영화관을 벗어났을 때 안택과 수아는 이
[알겠어요.]강연은 얌전히 답장하다가 물었다.[전정해 쪽 일은 어떻게 진행됐어요?][걱정하지 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강연은 더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전서안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호텔에 도착했다.강연은 핸드폰을 내려두고 샤워 후 잠에 들었으나 서안은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다.서안 쪽 시간은 새벽 5시였다.그러나 전씨 저택은 불빛이 환했다.전체 전씨 가문 친척 일가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가장 중간 자리의 전서훈은 검은색 재킷을 걸치고 차가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오늘 이 자리로 여러분을 모이라고 한 건 중요한 할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대체 누가 전정해를 돕고 있었던 겁니까?”“어떤 형태의 도움을 줬든, 아니면 단지 연락을 했던 것도...”“지금 당장 사실대로 밝히면 잘못을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조사를 거쳐 드러나게 된다면...”서훈의 얼굴에 냉기가 돌았다.“그 사람의 모든 걸 파괴할 겁니다.”현장 모든 사람이 식은땀을 흘렸다.비록 나이로는 서훈보다 한참 위였지만, 서훈이 전씨 가문 가주로 된 이후 권력은 모두 서훈에게로 돌아갔다.전임 가주 전정민과 전정해처럼, 세력을 둘로 갈라 분열시키려는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서훈과 서안은 늘 같은 편에 섰었다. 심지어 서안은 서훈보다 더 상대하기 어려웠다.서훈은 가주로서 자제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면, 서안은 정신을 놓았다고 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다행히 지금 이 자리에 서안이 함께 하지는 않았다.그들은 서훈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분위기는 점점 긴장해지고, 사람들은 땀으로 등을 적셨다. 서훈의 질문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직계 가족들은 방계 가족이 눈에 거슬린 지 이미 오래되었었다.또한 솔직하게 인정한다고 해서 서훈이 책임을 정말 묻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서훈이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아직 서안이라는 산이 남아 있지 않는가?서안 그 미친 녀석이 과연 어떤 일을 벌일지 아무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모두 걱정이 가
“저 녀석이! 저 미친 녀석이 여길!”“전서안이 대체 왜 여길 온 거야? 손에 뭘 질질 끌고 있는 거지?”사람들은 그제야 서안의 손에 끌려온 건 다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정확히 말한다면 거의 죽어가는 사람.“전... 전사안!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은 또 누구고?”서안이 냉소를 터뜨리며 손에 쥔 머리채를 휙 끌어 사람들 앞에 내던졌다. 그 사람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바닥을 뒹굴다가 얼굴이 드러났다.“전재석이잖아!”전재석은 전씨 가문 방계의 후손으로 실력이 좋은 사람이었다.적계 가족은 수가 적고, 가주인 전서훈은 나이가 서른이 되도록 자식이 없었다.그러다 보니 방계 후손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전재석은 계속해서 간을 보며 가끔 서안을 도발했고 서안은 크게 한 번씩 되갚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사적인 원한이 존재했다.하지만 결국에는 가족 성원이었으므로 사적인 원한으로 이렇게 사람을 죽도록 팰 수는 없었다.나이가 지긋한 친척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서안에게 물었다.“감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아무리 그래도 전재석은 전씨 가문의 후손이거늘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사람을 만들면 어떻게 하는가!”“가주님, 이번에도 전서안 저 미친 녀석을 감싼다면 우리 전체 전씨 가문 사람들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분노를 터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침묵으로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서훈과 서안 형제가 이 기회를 통해 전정해와 연관이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는 수단으로 보였다.두 사람 모두 천부적인 두뇌를 가졌으니 지금 이 상황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방계 가족에게 원한을 살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렇다면 전재석에게 반드시 문제가 있음을 예기했다.일부분 사람들은 침묵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언성을 높이고 잘잘못을 갈랐다.그들의 질타에 서훈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가장 사납게 덤벼드는 몇몇 사람을 묵묵히 기억했다.“아무런 이유가 없다고요?”서훈이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전재석은 전씨 가문을 흠집 내고 더럽혔습니다!”사람들은 증거를 손에 펼치며 경악을 숨기지 못했고 볼수록 섬뜩해짐을 느꼈다.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던 전재석이 사적으로는 이렇게 추잡하고 위법 행위를 벌였다니.하지만 더 놀랐던 건 전서안의 수법이었다.이런 비밀은 깊숙이 숨겨져 있고 절대 쉽게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하지만 서안은 손쉽게 모든 일을 탈탈 털어냈다.심지어 전씨 가문의 힘을 빌리지도 않았다. 혼자의 힘으로 아무런 내색 없이 방계 후손이자 유력한 경쟁자를 무참히 무너뜨렸다.정말 대단하다고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어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이제 아무도 감히 면전에 서안을 미친 녀석이라고 질타하지 못했다.대체 어느 미친 녀석이 아무 말도 없이 사람의 비밀을 까밝히고 모든 증거를 찾아 입증할 수 있겠는가?퇴로 하나 남기지 않은 서안의 수법에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서훈도 서안이 왜 전재석을 끌고 나왔는지 그 뜻을 알아차렸다.살계경후. 한 사람을 벌하여 본보기로 삼는다.이 자리의 가문 어르신들은 보기에는 다 점잖아 보여도 사적으로는 입에 담지 못할 일들을 많이도 했었다.감히 몰래 전정해와 연락을 주고받더니.서훈은 사람들이 먼저 솔직하게 고백하고 차차 잘못을 묻자고 했으나, 일단 전정해의 모든 지원을 끊어 고립되게 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현재 서안의 행동에 계획은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전재석을 끌고 가 가법대로 처리하세요.”서훈이 차갑게 지시했다.전씨 가문의 집행 인원은 한참 전부터 대기를 하고 있었다.명령을 받은 집행 인원은 바로 전재석을 밖으로 끌었다.위기의 상황에서 전재석은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여기가 어디고, 무슨 상황인지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전재석이 겁에 질려 애걸복걸했으나 서훈과 서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집행 인원은 문밖 멀지 않은 곳에서 처형을 했다.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명은 모든 이의 귀에 생생하게 울렸다.가문 사람들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짙은 어둠이 서서히 가시고 날이 서서히 밝아졌다.시간은 천천히 흘렀다.모든 사람의 자백을 받고 나니 어느새 날은 밝았다.가문 사람들이 저택을 떠나며 멀지 않은 곳의 선명한 핏자국에 질겁했다.그러나 전서안이 자기 목을 겨누지 않은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어젯밤 처형을 당한 사람이 자신이거나, 제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다행히 그들은 잘못을 되돌릴 기회가 주어졌다. 자신의 사리사욕과 반역에 가족들이 다칠 일은 막을 수 있었다.모든 사람이 저택을 떠나고 전씨 저택은 텅텅 비워졌다.부하들이 정리해 낸 기록을 확인한 전서훈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이것들이 감히 우리 몰래 이딴 짓이나 벌이고 있었다니!”서안도 빠르게 자료를 훑었다. 잔뜩 찌푸린 인상이 드디어 조금 풀어졌다.“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를 건 없네. 우리가 모든 증거를 찾는 것보다는 그래도 당사자의 자백을 받아내는 게 사건을 더 전면적으로 알 수 있으니.”이게 바로 오늘 자리를 만든 이유였다.전정해는 전씨 가문에 뿌리를 깊게 박고 있었고, 그동안 전씨 가문 사람들과 많은 거래를 해오며 이득을 취했다.하지만 전정해는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도 절대 제 실력과 행적을 밝히지 않았다.그렇다면 전정해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의 자백을 통해 전정해의 행방을 추적해야 했다.서안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하루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프랑스로 가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었다.한참 동안의 분석 끝에 둘은 전쟁해가 몸을 숨길 장소를 몇 곳으로 추려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빠르게 조사를 시작했다.몇몇 지점 중 강씨 가문 구역에 속한 곳은 바로 세훈에게 전송했다.세훈은 알겠다고 깔끔하게 대답했고, 필요 없는 말은 하나도 붙이지 않았다.이에 서훈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서안아 처남들을 아직도 설득하지 못한 거야?”그 말에 서안은 바로 인상을 쓰고 짜증을 드러냈다.“아직도 노력 중이에요.”이런 서안의 모습에 서훈은
도우미들은 일찌감치 당부받고 절대 전서안을 방해하지 않았다.전서훈은 서안의 방문 앞을 여러 번 서성거렸으나 절대 문을 열지 않았다.방안에서 이따금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서안이 급한 일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먹지도 쉬지도 않다니...’서훈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인상을 찌푸렸다.‘계속 이러다가는 몸이 견딜 수 있겠어?’서훈이 참지 못하고 문을 열려는데 방안의 키보드 소리가 뚝 멈춰 섰다.어리둥절해하던 서훈이 바로 기쁜 표정으로 얌전히 방문 앞에서 서안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그리고 예상대로 서안의 방문이 열리고 피곤함에 찌든 서안이 걸어 나왔다.서훈을 보고 조금 놀란 서안이 물었다.“형? 형이 왜 여기 있어요?”“네가 죽지는 않았을지 걱정돼서 지키고 있었다, 왜!”서훈은 화를 쏟아내며 손목 시계를 척 보이며 말했다.“네가 직접 봐봐. 지금이 대체 몇 시야? 너 거의 8시간 동안 방안에 콕 박혀있었다고!”“8시간?”서안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더니 헛웃음을 지었다.“역시 해커의 제왕다워.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니까.”“해커 제왕이라니? 혹시 강제훈을 말하는 거야?”서훈은 얻어낸 정보로 빠르게 추리했다.“혹시 강제훈이랑 경기한 거야?”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먼저 내기를 신청했고 내가 이기면 나와 강연의 교제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어요.”“결과는?”서안의 얼굴에는 기대와 긴장이 담겼다.제훈의 간섭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서안이 제훈을 이긴다면 서안의 명성이 한층 더 높아지는 게 더 중요했다.그렇다면 잘난척하는 세훈도 코가 납작해질 것이다.제 동생이 세훈의 동생보다 더 대단하니!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서훈이 다그쳤다.‘잘난 동생 하나 열 동생 부럽지 않다고!’서훈의 뜨거운 시선에 서안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맞춰보던가.”“...”서안은 결과를 알려주는 대신 바로 계단을 내려가며 외쳤다.“이모, 먹을 것 있어요? 배고파요.”“네! 있어요. 챙겨두고 있었어요!”
제훈과 서안의 대결 승부는 아무도 몰랐다.장장 8시간이 넘도록 대결을 펼쳤음에도 두 사람은 표정 변화도 없었다.하지만 제훈은 서안과 강연의 관계에 가입하지 않기로 다짐했다.이번 대결은 해커 대결 역사상 가장 신비로운 수수께끼로 남겨졌다.세월이 많이 흐르고 제훈의 아들이 이 길을 계속해서 걸게 되고, 4살이던 아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존경을 담은 표정으로 제훈에게 물었다.“아빠는 대결에서 져본 적 있어요?”“져본 적 있어.”제훈이 한참 침묵하다가 대답했다.“무승부였지만 나보다 어린 나이의 상대였으니 내가 졌다고 할 수 있지.”“누구데요?”제훈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 말을 아꼈다.송예은이 몰래 다가와 그 사람이 왜 서안이라고 알려주지 않냐고 묻자 제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 굳은 얼굴로 말했다.“우리 아들이 서안이 뒤꽁무니만 쫓아다닌 것도 넘쳐서, 아버지가 대결에서 졌다고 하면 아버지의 위신은 어떻게 되겠어?”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제훈의 모습은 어딘가 귀여워 보였다.예은은 아직도 아이처럼 구는 제훈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첫 만남에서 얼음처럼 차갑던 남자가 이런 모습을 여태껏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하지만 지금 후회하기는 너무 늦어버렸다.이번 생은 저기 부자와 끈질기게 엮여 버렸다.하지만 이건 먼 훗날의 이야기이고, 다시 현재.프랑스의 강연은 제훈을 이미 접수했다는 서안의 연락을 전해 받았다.너무 기쁘기도 놀랍기도 한 강연은 옆의 수아와 세윤을 바라보았다.어젯밤 나이란이 세윤을 찾아간 뒤로 두 사람 사이 미묘한 기운이 감돌았다.늘 털털하던 나이란이 갑자기 몰래 몸을 숨기지 않나 세윤과 시선을 마주하기 부끄러워했다.평소 건들건들하던 세윤도 갑자기 한껏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식사 자리에서 몰래 나이란을 훔쳐보기도 했는데, 시선이 오래 가지 못하고 자꾸 힐끔힐끔 훔쳐보았다.강연과 수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새로운 가십을 발견한 듯 웃어 보였다.세윤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을 보러 밖으로 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