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로 가서 하는 공연은 보름 전에 이미 결정한 사안이었다.이번에 가면 아마 진주에 3일에서 5일은 있어야 한다.곧 송재이의 생일도 다가온다.송재이는 혹시나 그때 돌아오지 못하면 엄마와 함께 따듯한 국수 한 사발도 먹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하여 생일을 미리 축하하기로 했다.올해는 엄마가 돌아가신 첫해였다.매년 엄마와 같이 생일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공원묘지로 향하는 날은 하늘이 씻은 듯이 파랬고 햇빛과 바람이 좋은 날이었다.송재이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오늘 집에서 나올 때 평소에 신던 하이힐을 신고 나온 게 실책이었다. 절반까지 갔는데 발이 아픈 것이었다.그때 머리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얼떨결에 고개를 들어보니 뒤에 선 남자가 보였다.송재이가 멈칫하더니 이렇게 불렀다.“도정원 씨?”도정원은 슈트를 차려입고 있었지만 표정이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송재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도정원 씨,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매달 도정원은 공원묘지에 하늘에 계신 어머니를 보러 왔다.하지만 방금 받은 전화에서 아버지가 차 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수술하고 있다고 했다.이렇게 급작스럽게 일이 터질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도정원은 얼른 돌아가려 했다. 그러다 중간에 송재이와 마주친 것이다.“혹시 송 선생님도 가족 보러 왔어요?”도정원이 물었다.송재이가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 손에 국화와 백합 꽃다발을 들고 다른 손에는 보온이 되는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엄마 보러 왔어요.”도정원에게 급한 일이 있어 보이니 송재이도 그를 잡고 더 얘기를 나눌 엄두를 내지 못했다.간단하게 몇 마디 주고받고는 각자 갈 길로 떠났다. 도정원은 밖으로, 송재이는 묘지를 향해 걸어갔다.한참을 더 걷고 나서야 도정원의 걸음이 서서히 멈췄다.도정원이 고개를 돌려 송재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마음속에 담아뒀던 의문이 송재이를 마주칠 때마다 점점 커지기만 했다.이게 과연 우연일까?
송재이는 저녁이 다 될 때까지 엄마의 묘소 앞에 앉아 있었다.해가 뉘엿뉘엿 지자 머리 위로 노을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바람이 불자 주위의 나뭇잎들이 바람을 따라 율동하며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마음은 조용하고 편안했다. 세상에 그녀와 엄마, 둘만 남은 듯한 느낌이었다....진주로 가기 전날, 유은정은 송재이에게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유중건이 지민건의 회사에 투자한 돈을 아직 회수하지는 못했지만 송재이 덕분에 유중건은 설영준이라는 인맥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유중건은 설영준과 일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오늘 이 밥은 아빠가 사주는 거야. 꼭 맛있는 거 사주라고 하셨어.”유은정은 감격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송재이에게 말했다.유중건의 회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설한 그룹과도 거래를 트게 되었기 때문이다.유은정의 약혼자도 요즘 다시 그녀를 살갑게 대했다. 선물도 주고 영화도 보자고 하는 것이 연애 초반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유은정의 마음은 예전 같지 않았다.이번 ‘시험’이 없었다면 약혼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을 수도 있다.유은정은 약혼자와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다.“재이야, 난 가끔 네가 쿨한 게 부러워. 시작도 쿨하고 끝도 쿨하잖아.”밥을 먹는데 유은정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송재이가 고개를 들자 유은정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너랑 설 대표님 말이야. 내가 너랑 알고 지낸 지가 벌써 몇 년인데, 너는 한 사람을 좋아하면 끝까지 그 사람이잖아. 그렇게 깊은 감정인데도 너는 단칼에 잘라냈으니까.”젓가락을 쥐고 있는 송재이의 손이 멈칫했다.송재이는 유은정의 부러움을 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정말 쿨한 게 맞을까?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며칠 전에도 설영준과 차에서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다. 당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전혀 쾌감을 얻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송재이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설영준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넋을 잃은 송재이를 바라봤다.너무 급하게 걸다 보니 숨이 차오른 송재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지금 여자의 성숙함과 소녀의 억울함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모습이었다.설영준은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가 제일 역겨워하는 느낌이었다.그는 아무 표정 없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이렇게 물었다.“왜? 못 알아보겠어?”송재이는 설영준이 진주로 내려온 걸 모르고 있었다.진주처럼 작은 도시에 설한 그룹이 확장할 업무가 있을까?“나는...”송재이가 말끝을 맺기도 전에 설영준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이렇게 말했다.“이렇게 마주쳤으니 가자. 나랑 밥 먹어.”발버둥 치던 송재이가 아까 스쳐 지나갔던 사람을 생각하고는 다시 마음이 불안해졌다.설영준 옆에 있으면 그래도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송재이도 배고프긴 했다.설영준은 송재이를 차에 태우고 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웨이터가 설영준에게 메뉴를 건넸다.“캐비어, 성게, 스테이크, 전복죽, 이렇게 주세요.”메뉴를 정하고 설영준은 메뉴판을 웨이터에게 넘겨주었다.맞은편에 앉은 송재이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설영준은 늘 그랬듯 송재이의 의견은 묻지 않고 혼자 결정했다. 3년 동안 만나면서 외식한 적이 별로 없긴 했지만 가끔 나갈 때도 메뉴는 설영준이 결정했고 송재이는 그 메뉴에 따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는 참 비굴했던 것 같았다.이런 생각에 송재이는 몸을 뒤로 살짝 뺐다.송재이는 모르고 있어도 설영준의 눈빛은 지금 송재이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그날 그러고 약은 먹었어?”설영준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잠깐 넋을 잃었던 송재이가 이내 반응하고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먹었어!”송재이는 똑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설영준이 이 질문을 한 목적을 곱씹어봤다. 설마 다시 애라도 가질까 봐 그러는 건가?설영준은 두 사람의 관계를 그저 살을 섞는 사이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송재이가 앞에서 걸고 설영준이 그 뒤를 따랐다.오늘은 송재이의 생일이었지만 설영준은 모를 것이다. 설영준은 송재이와 관련된 일을 기억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설영준은 1월 19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다. 그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뿐이다.그는 송재이가 허황한 꿈을 꾸는 게 싫었고 이걸로 기어오르는 것도 싫었다.설영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을 가지고 놀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은 안 된다. 다른 사람이 그의 생각을 꿰뚫고 이를 약점으로 삼아 그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설영준은 다른 사람에게 그런 기회를 줄 사람이 아니었다.저번에 경주에서 쇼핑한 것 외에 처음으로 다른 도시에서 이렇게 길거리를 거닐었다.첫 만남부터 두 사람의 일상은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예전에 그는 침대 빼고는 그녀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다고 생각했다.설영준은 걸음을 재촉해 송재이와 나란히 걸었다.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보드를 탄 남자애가 질주해 오고 있었다. 설영준은 자기도 모르게 송재이를 옆으로 잡아당겼다.“조심해!”설영준의 말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송재이는 그런 설영준을 올려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자애가 지나가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진주 거리를 산책했다.설씨 집안과 주씨 집안의 약혼 취소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기에 설영준 옆에 나타나는 여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가 쉬웠다.송재이는 설영준과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행인이 그들을 향해 핸드폰을 들었다.이를 본 송재이가 얼른 설영준의 손을 뿌리치고 그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설영준은 핸드폰을 든 행인을 힐끔 쳐다봤다. 이에 그 행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더니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어색하게 웃었다.설영준은 걸음을 옮겨 그 행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 행인이 놀라서 뒤걸음질 쳤다.지금까지 쭉 높은 자리에 있었던 설영준은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었고 서 있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설영준은 일반인과는 비교도 안 될 정
지민건은 온몸으로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었다.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몸 사리기 마련인지라 저도 모르게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색을 드러낸다.마치 지금의 지민건처럼 악의에 찬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다.이내 등 뒤에 문을 닫으면서 말했다.“여태껏 너만 따라다녔어.”함께 밥을 먹는 설영준과 송재이, 그리고 식사 후에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산책로를 걸어가는 모습도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를 서서히 이 지경까지 몰아세운 범인이 다름 아닌 두 사람이었다.지민건은 설령 죽더라도 희생양은 데리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설영준을 차마 건드릴 수는 없으니 자연스럽게 송재이가 타깃이 되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가!”송재이는 비록 속으로 두려웠지만, 그래도 지민건 앞에서 겁먹은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애써 센 척했다.하지만 지민건은 성큼성큼 다가가 송재이를 바닥에서 일으키더니 침대 위로 던지고 바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송재이의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이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베개 밑에 마침 휴대폰이 있었는지라 그녀는 허우적거리는 와중에 급하게 키패드를 터치했다.급한 상황에서 따질 게 뭐 있겠는가? 비록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했다.반면 지민건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송재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벼랑 끝에 몰린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남자의 손은 마치 뱀처럼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갔다.송재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위기일발의 순간, 때마침 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서유리가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렸다.“문 열어! 열라고, 얼른!”이때, 설영준이 휴대폰을 손에 들고 복도를 따라 멀지 않은 곳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그는 오는 길에 이미 호텔 프런트와 현지 경찰서에 연락을 취했다.프런트 직원들은 설영준 대표님의 전화라는 소리를 듣자 감히 지체할 엄두도 못 내고 긴장한 탓에 자칫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송재이는 설영준과 같은 호텔,
송재이는 오늘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그녀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수록 왠지 모르게 더 불쌍해 보였다.설영준이 고개를 들었다.“유리 씨는 먼저 가서 쉬어요. 오늘 저녁은 내가 남아 있을 테니까.”“네.”남자의 품에 안겨 옴짝달싹 안 하는 송재이를 보자 서유리는 그녀가 설영준을 꽤 많이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생각에 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은 갔다.그러나 굳이 캐묻지는 않고 뒤돌아서 룸을 나섰다.방 안에는 송재이와 설영준만 남았다.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얼굴에 눈물 자국 범벅인 그녀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깨질듯한 유리처럼 위태위태했다.설영준은 단단한 팔로 송재이의 다리를 들어 자기 허벅지 위로 앉혔고, 마치 아이를 달래듯 넓은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넘겼다.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하는 남자에게 대부분 여자는 반하기 마련이다.이처럼 안정적인 느낌을 경험한 게 대체 얼마 만이지?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그녀는 유일한 정신적 지주마저 잃어버렸다.그동안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밤을 지새운 적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하고 싶은 말, 억울한 일을 당해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고, 이 세상에 오로지 그녀뿐이었다.마치 외딴섬 같은 무력감은 너무나도 두려운 경험이다.그녀는 설영준이 좋았다. 든든한 가슴도 그렇고, 더욱이 매일 아침 넓은 품에 안겨 눈을 뜨는 그 순간이 제일 행복했다.햇살, 연인, 모닝 키스.하지만 나중에 그가 결혼하게 되면서 더 이상 자신만의 남자가 아니었다.그녀는 홀로 제자리에 남겨져 또다시 버려질 운명에 직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결국 설영준이 자신을 버리기 전에 먼저 떠나가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하지만 사실 그녀를 좌지우지하는 버튼은 결국 설영준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다.송재이는 마치 밖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온몸이 다치고 진흙투성이가 된 아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남자의 따뜻한 품은 그녀에게 모든 위험과 혼란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쉼터였다.설령 찰나의 순간에
송재이는 정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지민건의 마수에서 벗어났더니 설영준에게 딱 걸릴 줄이야.심지어 맹수의 먹잇감이 된 느낌이었다.유난히 거칠고 난폭한 모습은 단순히 사랑을 나누는 게 아니라 뒤로 갈수록 일종의 증오를 표출하는 방식에 가까웠다.하지만 대체 왜 화가 났고, 또한 어떤 것에 대한 분풀이인지는 몰랐다.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헤어진 후에도 매달리지 않았다고 자부했다.심지어 실수로 임신했을 때도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주현아와 지민건만 아니었다면 끝까지 함구하고 홀로 아이를 낳고 키웠을 것이다.그녀는 결코 성가시게 구는 전 와이프는 아니라고 여겼다.격정의 순간이 지나고 송재이는 눈물을 흘렸다.옆으로 돌아누운 그녀는 어깨가 훤히 드러났고 이따금 부르르 떨렸다.단지 뒷모습만 보더라도 사뭇 불쌍하게 느껴졌다.그가 대체 왜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설영준은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결국 송재이는 울다가 지쳐서 곤히 잠들었다. 오늘은 경주로 돌아가는 날이며, 그녀는 오전 10시에 잠에서 깼다.눈을 떠보니 찬란한 햇살 아래 뒤돌아서서 넥타이를 매고 있는 설영준의 뒷모습이 보였다.하루아침에 3년 전으로 돌아간 듯싶었다. 마치 첫 관계를 가졌을 그때처럼...그날도 오늘처럼 햇살이 포근했다.침대에 돌아누워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그녀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등 뒤의 인기척을 느낀 설영준은 고개를 돌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깼어?”당분간 그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 송재이는 이불로 얼굴을 덮었다.그러나 남자는 억지로 이불을 젖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송재이는 눈살을 찌푸렸다.“뻔뻔한 자식!”“나도 어쩔 수 없었거든?”당시 치사하다는 둥, 나쁜 놈이라는 둥 끊임없이 욕설을 퍼붓던 그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났다.하지만 정작 본인은 너무 억울한 상황이었다.화가 난 그녀는 주먹을 쥐고 남자의 가슴을 마구 때렸지만 단번에 제압당했다.
송재이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설영준은 일부러 그녀와 맞서려는 듯 작정하고 뽀뽀하려고 했다.놀란 송재이는 이리저리 피하기 바빴다.결국 그녀는 설영준이 진짜 무서워서 우물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가도 돼요. 그 전에 먼저 샤워해야 해요.”말을 마친 후 호텔 슬리퍼를 신고 욕실로 쪼르르 달려갔다.설영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여기서 마린 월드까지 차로 한 시간 거리이다.아니나 다를까 이런 곳에 놀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 가족 세 식구였다.그밖엔 젊은 커플들이 전부였다.한 여자애가 티켓팅 게이트에서 고양이 귀 머리띠를 사고 손에는 솜사탕을 들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신이 나서 퐁퐁 뛰는 모습이 유난히 귀여웠다.설영준과 송재이는 이곳을 지나갈 때 무심코 한 번 훑어봤다.그는 점포 매대에 놓인 머리띠를 보다가 앞에서 걸어가는 송재이를 바라봤다.그녀가 별 흥미가 없는 것 같아 설영준도 더 말하지 않았다.이리로 올 때만 해도 송재이는 억지로 끌려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하지만 정작 놀기 시작하니 그녀는 곧장 심취했다.이곳은 대형 놀이공원에 가까웠다.인파들과 함께 걷다 보니 진주에서 가장 유명한 바다 세계로 들어갔다.설영준이 입구에서 두 사람 티켓을 구매했다.전동 스쿠터를 타면 터널 안으로 들어가 구경할 수 있다.십여 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린 후에야 그들 차례가 됐다.작은 차 한 대에 관광객 스무 명 좌우가 앉을 수 있었다. 설영준과 송재이는 나란히 차에 올라탔다.차에 탈 때 송재이는 잔뜩 흥분하여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그녀 옆엔 또 다른 부부가 앉았는데 엄마가 남자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있었다.송재이가 자리에 앉을 때부터 남자아이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송재이도 꽤 재미있어서 고개 돌려 아이를 바라봤다.“너 나 알아?”송재이가 웃으며 물었다.남자아이는 머리를 내저으며 손에 쥔 막대사탕을 먹었다.“누나 너무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