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가 앞에서 걸고 설영준이 그 뒤를 따랐다.오늘은 송재이의 생일이었지만 설영준은 모를 것이다. 설영준은 송재이와 관련된 일을 기억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설영준은 1월 19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다. 그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뿐이다.그는 송재이가 허황한 꿈을 꾸는 게 싫었고 이걸로 기어오르는 것도 싫었다.설영준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을 가지고 놀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은 안 된다. 다른 사람이 그의 생각을 꿰뚫고 이를 약점으로 삼아 그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설영준은 다른 사람에게 그런 기회를 줄 사람이 아니었다.저번에 경주에서 쇼핑한 것 외에 처음으로 다른 도시에서 이렇게 길거리를 거닐었다.첫 만남부터 두 사람의 일상은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예전에 그는 침대 빼고는 그녀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다고 생각했다.설영준은 걸음을 재촉해 송재이와 나란히 걸었다.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보드를 탄 남자애가 질주해 오고 있었다. 설영준은 자기도 모르게 송재이를 옆으로 잡아당겼다.“조심해!”설영준의 말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송재이는 그런 설영준을 올려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자애가 지나가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진주 거리를 산책했다.설씨 집안과 주씨 집안의 약혼 취소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기에 설영준 옆에 나타나는 여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가 쉬웠다.송재이는 설영준과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행인이 그들을 향해 핸드폰을 들었다.이를 본 송재이가 얼른 설영준의 손을 뿌리치고 그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설영준은 핸드폰을 든 행인을 힐끔 쳐다봤다. 이에 그 행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더니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어색하게 웃었다.설영준은 걸음을 옮겨 그 행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 행인이 놀라서 뒤걸음질 쳤다.지금까지 쭉 높은 자리에 있었던 설영준은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었고 서 있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설영준은 일반인과는 비교도 안 될 정
지민건은 온몸으로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었다.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몸 사리기 마련인지라 저도 모르게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색을 드러낸다.마치 지금의 지민건처럼 악의에 찬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다.이내 등 뒤에 문을 닫으면서 말했다.“여태껏 너만 따라다녔어.”함께 밥을 먹는 설영준과 송재이, 그리고 식사 후에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산책로를 걸어가는 모습도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를 서서히 이 지경까지 몰아세운 범인이 다름 아닌 두 사람이었다.지민건은 설령 죽더라도 희생양은 데리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설영준을 차마 건드릴 수는 없으니 자연스럽게 송재이가 타깃이 되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가!”송재이는 비록 속으로 두려웠지만, 그래도 지민건 앞에서 겁먹은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애써 센 척했다.하지만 지민건은 성큼성큼 다가가 송재이를 바닥에서 일으키더니 침대 위로 던지고 바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송재이의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이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베개 밑에 마침 휴대폰이 있었는지라 그녀는 허우적거리는 와중에 급하게 키패드를 터치했다.급한 상황에서 따질 게 뭐 있겠는가? 비록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했다.반면 지민건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송재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벼랑 끝에 몰린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남자의 손은 마치 뱀처럼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갔다.송재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위기일발의 순간, 때마침 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서유리가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렸다.“문 열어! 열라고, 얼른!”이때, 설영준이 휴대폰을 손에 들고 복도를 따라 멀지 않은 곳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그는 오는 길에 이미 호텔 프런트와 현지 경찰서에 연락을 취했다.프런트 직원들은 설영준 대표님의 전화라는 소리를 듣자 감히 지체할 엄두도 못 내고 긴장한 탓에 자칫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송재이는 설영준과 같은 호텔,
송재이는 오늘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그녀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수록 왠지 모르게 더 불쌍해 보였다.설영준이 고개를 들었다.“유리 씨는 먼저 가서 쉬어요. 오늘 저녁은 내가 남아 있을 테니까.”“네.”남자의 품에 안겨 옴짝달싹 안 하는 송재이를 보자 서유리는 그녀가 설영준을 꽤 많이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생각에 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은 갔다.그러나 굳이 캐묻지는 않고 뒤돌아서 룸을 나섰다.방 안에는 송재이와 설영준만 남았다.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얼굴에 눈물 자국 범벅인 그녀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깨질듯한 유리처럼 위태위태했다.설영준은 단단한 팔로 송재이의 다리를 들어 자기 허벅지 위로 앉혔고, 마치 아이를 달래듯 넓은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넘겼다.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하는 남자에게 대부분 여자는 반하기 마련이다.이처럼 안정적인 느낌을 경험한 게 대체 얼마 만이지?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그녀는 유일한 정신적 지주마저 잃어버렸다.그동안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밤을 지새운 적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하고 싶은 말, 억울한 일을 당해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고, 이 세상에 오로지 그녀뿐이었다.마치 외딴섬 같은 무력감은 너무나도 두려운 경험이다.그녀는 설영준이 좋았다. 든든한 가슴도 그렇고, 더욱이 매일 아침 넓은 품에 안겨 눈을 뜨는 그 순간이 제일 행복했다.햇살, 연인, 모닝 키스.하지만 나중에 그가 결혼하게 되면서 더 이상 자신만의 남자가 아니었다.그녀는 홀로 제자리에 남겨져 또다시 버려질 운명에 직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결국 설영준이 자신을 버리기 전에 먼저 떠나가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하지만 사실 그녀를 좌지우지하는 버튼은 결국 설영준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다.송재이는 마치 밖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온몸이 다치고 진흙투성이가 된 아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남자의 따뜻한 품은 그녀에게 모든 위험과 혼란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쉼터였다.설령 찰나의 순간에
송재이는 정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지민건의 마수에서 벗어났더니 설영준에게 딱 걸릴 줄이야.심지어 맹수의 먹잇감이 된 느낌이었다.유난히 거칠고 난폭한 모습은 단순히 사랑을 나누는 게 아니라 뒤로 갈수록 일종의 증오를 표출하는 방식에 가까웠다.하지만 대체 왜 화가 났고, 또한 어떤 것에 대한 분풀이인지는 몰랐다.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헤어진 후에도 매달리지 않았다고 자부했다.심지어 실수로 임신했을 때도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주현아와 지민건만 아니었다면 끝까지 함구하고 홀로 아이를 낳고 키웠을 것이다.그녀는 결코 성가시게 구는 전 와이프는 아니라고 여겼다.격정의 순간이 지나고 송재이는 눈물을 흘렸다.옆으로 돌아누운 그녀는 어깨가 훤히 드러났고 이따금 부르르 떨렸다.단지 뒷모습만 보더라도 사뭇 불쌍하게 느껴졌다.그가 대체 왜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설영준은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결국 송재이는 울다가 지쳐서 곤히 잠들었다. 오늘은 경주로 돌아가는 날이며, 그녀는 오전 10시에 잠에서 깼다.눈을 떠보니 찬란한 햇살 아래 뒤돌아서서 넥타이를 매고 있는 설영준의 뒷모습이 보였다.하루아침에 3년 전으로 돌아간 듯싶었다. 마치 첫 관계를 가졌을 그때처럼...그날도 오늘처럼 햇살이 포근했다.침대에 돌아누워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그녀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등 뒤의 인기척을 느낀 설영준은 고개를 돌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깼어?”당분간 그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 송재이는 이불로 얼굴을 덮었다.그러나 남자는 억지로 이불을 젖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송재이는 눈살을 찌푸렸다.“뻔뻔한 자식!”“나도 어쩔 수 없었거든?”당시 치사하다는 둥, 나쁜 놈이라는 둥 끊임없이 욕설을 퍼붓던 그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났다.하지만 정작 본인은 너무 억울한 상황이었다.화가 난 그녀는 주먹을 쥐고 남자의 가슴을 마구 때렸지만 단번에 제압당했다.
송재이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설영준은 일부러 그녀와 맞서려는 듯 작정하고 뽀뽀하려고 했다.놀란 송재이는 이리저리 피하기 바빴다.결국 그녀는 설영준이 진짜 무서워서 우물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가도 돼요. 그 전에 먼저 샤워해야 해요.”말을 마친 후 호텔 슬리퍼를 신고 욕실로 쪼르르 달려갔다.설영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여기서 마린 월드까지 차로 한 시간 거리이다.아니나 다를까 이런 곳에 놀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 가족 세 식구였다.그밖엔 젊은 커플들이 전부였다.한 여자애가 티켓팅 게이트에서 고양이 귀 머리띠를 사고 손에는 솜사탕을 들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신이 나서 퐁퐁 뛰는 모습이 유난히 귀여웠다.설영준과 송재이는 이곳을 지나갈 때 무심코 한 번 훑어봤다.그는 점포 매대에 놓인 머리띠를 보다가 앞에서 걸어가는 송재이를 바라봤다.그녀가 별 흥미가 없는 것 같아 설영준도 더 말하지 않았다.이리로 올 때만 해도 송재이는 억지로 끌려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하지만 정작 놀기 시작하니 그녀는 곧장 심취했다.이곳은 대형 놀이공원에 가까웠다.인파들과 함께 걷다 보니 진주에서 가장 유명한 바다 세계로 들어갔다.설영준이 입구에서 두 사람 티켓을 구매했다.전동 스쿠터를 타면 터널 안으로 들어가 구경할 수 있다.십여 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린 후에야 그들 차례가 됐다.작은 차 한 대에 관광객 스무 명 좌우가 앉을 수 있었다. 설영준과 송재이는 나란히 차에 올라탔다.차에 탈 때 송재이는 잔뜩 흥분하여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그녀 옆엔 또 다른 부부가 앉았는데 엄마가 남자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있었다.송재이가 자리에 앉을 때부터 남자아이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송재이도 꽤 재미있어서 고개 돌려 아이를 바라봤다.“너 나 알아?”송재이가 웃으며 물었다.남자아이는 머리를 내저으며 손에 쥔 막대사탕을 먹었다.“누나 너무 예
설영준은 그녀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그 눈빛에 송재이는 온몸이 불편했다.그는 차가운 미소를 날리며 손을 저었다.“아니야, 아무것도.”송재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설영준의 속마음을 좀처럼 알아맞힐 수가 없다.한편 송재이는 그가 진주에 출장 온 줄로 줄곧 여겼었다.하여 진주에 며칠이나 더 머무를 거냐고 무심코 물었다.설영준은 말을 얼버무리며 사나흘 정도 있을 거라고 했다.다만 송재이가 티켓을 끊고 돌아간 다음 날, 그도 잇따라 돌아갔다.설영준은 진주에 업무가 있어서 온 게 아니지만 그렇다고 절대 그녀의 생일을 함께하려고 일부러 온 것도 아니다.최근 1년간 그는 거의 매일 업무에 절어있어 가끔 휴식도 필요했다.이번에 진주로 온 것도 저 자신에게 휴가를 내준 셈이었다.하지만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것들은 결국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일 뿐, 마린 월드 같은 곳은 한 번이면 족했지 두 번은 절대 갈 일이 없다....송재이는 진주에서 돌아온 후 민효연한테서 카톡을 받았다.[송 선생님, 오늘 있을 피아노 수업 다른 날로 변경해야 할 것 같아요. 연우 할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거든요. 오늘 연우 아빠가 연우 데리고 할아버지 뵈러 갔어요.]민효연이 말끝마다 ‘연우 아빠’라고 호칭하는 걸 보니 도정원과 사이가 좋아진 듯싶었다. 송재이가 처음 봤을 때처럼 살벌한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그녀가 답장했다.[네, 그럼 다음에 다시 수업 시간 정해요.]문자를 보낸 후 송재이는 문득 지난번에 묘원에 가서 엄마에게 제사를 지낼 때 마침 제사를 마치고 나오는 도정원과 마주쳤던 일이 떠올랐다.그때 도정원은 황급히 움직이며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이제 막 도정원 아버지의 상황이 어떤지 여쭈려고 머뭇거릴 때 휴대폰이 대뜸 울렸다.뜻밖에도 도정원에게 걸려온 전화였다.송재이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송 선생님, 저희 아버지가 병원에 있는데 흉터가 갑자기 감염돼서 오늘 밤에 아버지 옆을 지켜드려야 할 것 같아요. 연우가 줄곧 제
아니나 다를까 도경욱은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하지만 그는 최대한 담담한 척하며 몸을 등받이 쿠션에 기댔다.“그래요? 올해 있은 일이에요?”송재이는 비록 처음 도경욱을 만났지만 왠지 모르게 오랜 지인처럼 익숙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하여 엄마에 관한 일도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네, 돌아가신 지 반년 정도 됐어요. 편히 가셨어요.”“그렇군요... 송 선생님 어머님은 저랑 나이가 비슷할 것 같군요. 이 나이가 되면 생사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어요.”도경욱은 감개무량한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저희 엄마는 토끼띠에요. 아저씨보다 조금 어리실 겁니다.”도경욱은 반듯하게 누워있다가 송재이가 토끼띠라고 말하는 순간 침대 시트를 꽉 잡았다.“송 선생님 어머님 사진을 한 번 봐도 될까요?”도경욱은 끝내 차분함을 잊고 불쑥 질문했다.그의 요구에 송재이도 마냥 놀랄 따름이었다.‘사진을 보겠다고?’그녀는 의아한 눈길로 도정원을 쳐다봤다.도정원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빠에게 되물었다.“아빠, 대체 왜 이러세요?”한편 도경욱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사코 고집했다.“송 선생님 휴대폰에 어머님 사진 있죠?”송재이는 입을 살짝 벌렸다. 도경욱이 처음부터 친근하게 느껴져서 그런 건지, 또 혹은 그의 눈빛이 너무 진실되고 절절해서 그런 건지 그녀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그녀는 확실히 휴대폰 갤러리에 엄마 사진을 많이 저장해두고 있다.벚꽃나무 아래 앉아 그네를 타는 독사진도 있고 모녀가 함께 찍은 사진도 있으며 물론 그녀가 아주 어릴 때 한 가족 세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그때 송재이는 지금 이 아빠가 친아빠가 아니란 걸 전혀 몰랐다.그렇다면 그녀의 친아빠는 대체 누구일까?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송재이는 끝내 휴대폰 갤러리를 도경욱에게 보여줬다.도경욱은 송재이 엄마의 사진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그는 꼭 마치 마약 중독자처럼 화면 속 온화한 여자에게 빨
송재이는 자신의 친아빠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은 게 결코 아니다.단지 엄마가 남겨준 단서가 너무 적어 도통 조사를 시작할 수가 없었다.그녀 엄마는 일부러 숨기는 게 뻔했다. 송재이가 그 남자의 정체를 아는 걸 정말 원치 않은 듯싶었다.‘어쩌면 엄마는 엄마만의 고려가 있었겠지.’송재이가 단순한 삶을 살길 바라신 듯싶다.그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되면 오히려 송재이에게 번거로움만 안겨준다.만약 송재이의 친아빠가 바로...그렇다면 그녀와 도정원의 관계 또한...송재이는 식당에 앉아서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상상력이 너무 풍부하다고 생각됐다.도경욱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스스로 이렇게 많은 연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송재이는 참지 못하고 고개 숙여 피식 웃었다.지금 그녀는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하다.식당 조명이 너무 눈부셔 그녀의 머리가 지끈거렸다.도정원은 연우와 함께 맞은 편에 나란히 앉았다.연우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송재이를 한참 쳐다보더니 그녀에게 작은 손을 내밀었다.송재이는 흠칫 놀랐다.“연우 선생님이랑 같이 앉고 싶어?”아이는 아무 말 없이 의자에서 뛰어내려 제멋대로 송재이 옆에 다가왔다.여태껏 그 누구도 송재이에게 이토록 기댄 적이 없다.작고 귀여운 아이가 이토록 순수하게 다가오다니.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계략 없이 온전히 그녀에게 기대고 있다.순간 송재이의 마음은 얼음이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그녀는 연우를 안아서 옆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두 사람의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죄송해요, 선생님. 이 아이가 이렇게까지 선생님을 따를 줄은 몰랐어요.”도정원이 그녀에게 사과하며 가볍게 웃었다.송재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도 연우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특히 오늘 도경욱을 만난 이후로 아이가 더 소중해졌다.만약 그녀의 추측이 다 맞아떨어진다면 도정원과 연우와의 관계도 더 가깝고 친근해질 것이다.송재이는 연우를 보다가 맞은 편에 앉은 도정원도 살펴보았다.나 홀로 외딴섬에서 이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