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 그룹의 재산을 빼앗아 올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었다.송지아가 부추겼다.“숙모님, 어떻게든 윤정재를 잡아야 해요. 황족을 암살하려 했으니 사형에 처해야 해요!”가연은 인상을 쓰고 송지아를 째려보았다. 사형 여부는 사법 기관이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벌써부터 사람들 앞에서 말조심을 하지 않는데, 군주가 되었다간 남양의 국격이 떨어질 게 뻔한 일이었다.가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차가운 목소리로 서지현에게 물었다.“지현 씨는 요새 계속 서궁에 있었는데, 별 이상한 점 못 느꼈어요?”서지현은 옷깃을 꼭 잡고 눈을 도르르 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이건 엉클이 가르쳐준 연기였다. 두렵고 초조한 사람은 이렇게 행동한다고 했다.나석진의 도움하에 열몇 번을 시도해서야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일 수 있었다.서지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횡설수설했다.“왕후마마, 전하... 저, 제가 임월 전하를 보살피긴 했지만, 윤 회장님이 오시면 저를 내전에서 쫓아냈어요! 저와 다른 시녀들을 모두 내쫓고 홀로 임월 전하를 치료했어요요.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이야... 오늘 전하께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잘못되는 줄 알고... ”송혁준이 그녀를 보고 인상을 썼다.‘나석진 이 자식, 대체 뭘 가르쳐준 거야? 저 표정이며 동작이며 너무 과장됐잖아, 연극 하는 거야?’하지만 서럽게 우는 서지현의 모습에 가연은 속아넘어간 듯했다. 가연이 명령했다.“윤정재가 확실해! 어서 궁전을 수색해서 증거를 찾아! 찾으면 바로 경찰에 넘기고.”증거란 주방 꼭대기 찬장에 있는 주사 한 병이었다.가연이 서늘하게 웃었다. 윤정재가 아무리 대단해도 이번엔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었다....강서연과 최연준은 최군형을 데리고 남양에 돌아왔다.전용기가 착륙하자마자 강서연은 윤정재가 잡혔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남양시의 유명인이었기에 이 소식은 금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각 포털사이트의 서버가 마비되었다.“윤제 그룹 회장 윤정재가 황실 사람을 해치려 했다는 소식
윤제 그룹이 금세 통제당했다. 그 산하의 공장과 약국이 모두 운영을 중단했다. 외국과의 무역도 모두 중단되었다. 심지어는 윤제 그룹 소유의 병원들도 환자를 받지 않았다.단 며칠 사이에 윤제 그룹이 통째로 흔들렸다.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초조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송이수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본 윤정재는 뛰어난 실력과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윤제 그룹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놨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공장이 약값을 올릴 때도 20년간 같은 가격을 고수하던 사람이었다.한두 번, 한두 달은 자선 사업을 할 수도 있지만, 20년씩이나 이런 일을 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송이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가연의 말이 그런 송이수의 생각을 억눌러놓았다.“폐하, 다른 사람이었다면 저도 폐하와 같은 생각이겠지만, 이번 일은 임월이에게 일어난 일이에요! 폐하가 가장 아끼는 동생 말이에요! 전에 저희 쪽 의사가 치료했을 땐 이런 일이 없었잖아요. 왜 윤정재의 치료를 받고 갑자기 쓰러진 걸까요? 폐하, 이번 일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다면, 임월이를 가장 아낀다고 할 자격도 없어요!”“내 동생을 해친 자는 엄하게 벌해야 해!”송이수가 고민하다 손을 저으며 왕후에게 일의 뒤처리를 남겼다. 가연이 집중한 얼굴로 천천히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토록 못된 짓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다. 송이수의 말 한마디에 가연은 한참을 기뻐했다.“이수 씨, 당신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날 너무 미워하지 마요, 네?”...윤상 빌라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윤제 그룹의 원로, 주주, 가문의 친척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거실의 식탁에 모여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누군가 참지 못하고 입을 뗐다.“회사는 어떻게 할까요?”“전 지분 0.5%를 가지고 있어요, 현금으로 바꿔줘요!”“제 지분도 1%가 채 안 돼요, 하지만 전 이외에도 배상금을 원해요!”“맞아요! 집이든 땅이든 나
“오, 이분이 최씨 가문 도련님?”한 중년 남성이 핸드폰의 동영상을 보며 말했다. 특히 마지막의 ‘우리 윤씨 가문을 무시하는 거냐’는 말을 듣고는 더욱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윤정재는 눈을 바둑판에 고정한 채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툴툴거렸다.“내 말을 듣긴 하는 거야?”윤정재가 바둑돌 하나를 꽝 하고 바둑판에 내려놓았다.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자네...”“그러게 집중했어야지, 누가 내 사위를 연구하랬어?”남자가 야비한 눈빛으로 윤정재를 째려보았다. 윤정재는 피식 웃고는 남자가 가지고 온 차를 음미했다. 다음에 올 때에는 의학 서적 몇 권을 가져오라고 부탁까지 했다.이는 독채였다. 정교하게 지어진 화원에서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사처의 경비들이 없었다면 이곳이 남양 교도소의 한 부분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윤정재와 바둑을 둔 사람은 명성이 자자한 대장군, 나도훈이었다.윤정재는 잠시 남양 교도소에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훈은 인맥을 동원해 그를 이곳에 배정한 뒤 종종 그를 보러 왔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고 바둑을 두며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어느날 윤정재와 영상통화를 하던 강서연이 깜짝 놀라 말했다.“아빠, 감옥에도 특실이 있어요?”“왜, 최연준 그 자식이 네게 얘기해주지 않았어?”강서연이 입을 삐죽하며 통화를 끊어버렸다. 그곳에 가보지도 않은 최연준이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어이, 뭐 해?”나도훈이 윤정재의 눈앞에서 손을 휘적거렸다. 정신을 차린 윤정재가 바둑판을 치웠다.“안 해.”나도훈은 신경 쓰지 않고 시선을 핸드폰에 고정한 채 최연준이 장모를 돕는 장면을 반복해 보고 있었다.“자네 데릴사위를 정말 잘 들였어.”“데릴사위는 무슨! 내 딸이 최씨 가문에 시집간 거야.”“오, 그래? 꽤 마음에 드나 보네? 전엔 마음에 안 들어 했잖아.”“누가 그래? 우리 사위가 최고야! 다시 한번 함부로 말했다간 침으로 찔러버릴 거야!”두 사람이 티격태격했다. 마침
가연의 짓이 분명했다. 이 한 달 사이에 송임월에게 계속 이전의 약물을 주사해 영원히 깨지 못하게 하려는 모양이었다.윤정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석진아, 지금은 누가 임월 전하를 치료하고 있어?”“예전의 의사요. 이모부께서 감옥에 들어오자마자 가연 왕후가 예전의 의사들을 모두 불러왔어요.”윤정재의 판단이 맞았다. 송임월에게 주사한 약물이 만악의 근원이었다!“서지현더러 그 약을 가져오라고 해!”“이모부, 그건...”나석진이 인상을 썼다. 그 혼자서 모험을 하더라도 서지현이 이 일에 휘말리는 건 싫었다.“꼭 서지현이 해야 해.”“왜요?”“그건...”윤정재가 말하려다 말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찬이한테 가서 검사지를 달라고 해, 그리고 서연이와 연준이가 네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줄 거야. 그걸 들으면 알 수 있어.”나석진과 나도훈은 모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나도훈이 나석진을 떠밀었다.“됐어, 이모부가 시키는 대로 해. 이 자식 이상한 짓 많이 하잖아.”“뭐라고?”“너 이상하다고!”“나도훈!”두 사람이 한데 엉겨 붙었다. 나석진이 다시 둘을 뜯어말렸다.......서지현이 꽃에 물을 주러 가려는데, 먼 곳에서 몇 사람이 걸어왔다. 그녀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서궁은 경비가 삼엄해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데, 저 사람들은...서지현이 물통을 내려놓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가장 앞에 선 사람은 송혁준이었다. 그는 서지현을 보고 살짝 웃었다. 그의 눈이 많은 말을 전달하고 있었다.“고모는 좀 어때요?”“똑같아요, 생명에 지장은 없는데, 더 안 좋아진 것 같아요.”“여긴 예전에 고모를 치료했던 의사들이에요. 숙모님이 소개해 주셨어요.”송혁준이 낮은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서지현이 뭔가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몇몇 의사들이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서지현에게 제지당했다.“황실 규칙에 따라, 임월 전하의 내전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요.”“새로 온 시녀인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서지현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벽에 기대 머리카락을 만지작대고 있었다.얼마 뒤 맨 앞에 선 의사가 조용히 서지현에게 말했다.“임월 전하에게 약물을 주사하려고요.”“어떤 약이죠?”“당연히 병을 고치는 약이죠, 전부터 써왔어요. 진정 효과가 뛰어나서요.”“아, 네... 그럼 주사기는 어디 있나요?”의사가 가방 속에서 약물이 든 주사기를 꺼냈다. 서지현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주세요!”“네?”“임월 전하는 누구든 가까이 오지 말라 하세요, 주사를 놓는다 해도 말이에요. 전에 윤 회장님이 침을 놓았는데, 그때도 너무 무서워 오열했어요! 그러니 제게 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거예요. 이건 정맥주사죠? 저도 놓을 줄 알아요.”송혁준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이분에게 주면 돼요. 임월 전하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바로 이분이에요.”“하지만...”“제 말도 못 믿겠다 이거에요?”송혁준이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의사들은 몇 번이나 황궁을 드나들었지만 이런 모습의 송혁준은 처음 본 지라 모두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서있었다.“이분에게 주지 않아도 돼요, 스스로에게 주사를 놓거나, 모두 버려도 안 되는 건 없어요. 하지만 당신들이 돌아가면 숙모님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을 텐데...”“하, 할 줄 안다니 잘됐네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의사가 주사기를 서지현에게 돌려주었다. 서지현은 웃으며 송혁준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내전으로 달려갔다. 내전을 지나 바깥의 작은 화원으로 들어가자 풀숲에 엎드린 윤찬이 보였다.“자, 여기요! 그들이 임월 전하에게 주사하려던 약이에요.”윤찬이 조심히 약물을 건네받아 시약병에 담은 뒤 뚜껑을 닫았다.“이게 뭔지 정말 알아낼 수 있어요?”“당연하죠! 이건 제 전문인데요.”“얼마나 걸려요?”“내일이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너무 잘됐네요!”“벌써부터 기뻐하지 마요. 아빠가 말했어요, 이건 그저 추측일 뿐, 약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몰라요.”
강서연이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내 생각도 그래요, 매일 집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는 사람 같지는 않아요. 보미 씨가 그러는데, 덕수 아저씨의 책을 최근에야 주목받기 시작했대요. 그런데 이야기도 참신하고 논리 있고,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숨어있잖아요. 내 생각엔...”“내 생각엔 모두 실제로 벌어진 일 같아.”최연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머리맡에는 항상 변덕수의 작품이 있었다. 그의 추리소설 몇 부는 모두 탐정의 시점에서 써 내려간 것이었다. 그저 소설의 특징으로만 생각했는데, 지금은...그 탐정은 변덕수 본인일 가능성이 컸다!강서연이 시계를 보고는 부드럽게 말했다.“됐어요, 이 얘긴 그만해요. 시간도 이른데, 야시장에라도 갈까요?”최연준은 귀를 의심했다. 아들이 생긴 뒤로 강서연은 자신과 데이트를 나간 적이 없었다. 아들이 집에 있으면 그녀도 집에서 아들을 보살폈다.‘웬일이지?’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최연준의 반응을 본 강서연은 그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아들에게만 신경 쓰다 보니 남편을 잊었다.그래서 그녀는 최연준에게 그동안의 시간을 보상해 주고 싶었다.“왜요? 나가서 음식도 먹고, 물건도 사고 싶은데... 전에 강주에 있을 때처럼요. 그래도 돼요?”“당연하지!”최연준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오늘은 그녀와의 데이트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나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최연준과 강서연이 손을 꼭 맞잡고 떠나려는데, 최군형의 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강서연이 급히 달려가 보니 최군형이 칭얼거리며 엄마를 찾고 있었다.보모가 멋쩍게 웃었다.“죄송해요, 도련님을 목욕시키려던 참이었어요.”최군형이 손에 든 고무 오리를 휘두르며 말했다.“싫어! 싫어! 엄마가!”강서연은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는 최연준과의 데이트를 저 멀리 뒷전으로 던져버렸다.“좋아, 엄마가 씻겨줄게!”강서연이 최군형을 안아 들고 목욕시키러 가는데, 마침 최연준과 딱 마주쳤다.“서연아...”“오늘은 나가지 말죠? 군형이를 두고 가려니...”최연준의 표
최군형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오늘은 아빠랑 같이 씻자, 앉지 말고, 서서!”“응? 그러면 안 돼요. 그럼...”강서연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녀가 말릴 틈도 없이 최연준은 아들을 데리고 샤워실로 들어가 문을 철컥 잠가버렸다.강서연은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얼마 뒤 물소리가 들려왔다. 최군형이 칭얼댔지만 최연준은 엄격한 아버지의 방식으로 그를 위로했다.“사나이가 이 정도로 무서워하면 어떡해? 머리 감는 거잖아! 왜 우는 거야? 최군형! 다시 한번 울었다가는 우유 없을 줄 알아!”강서연은 문을 따지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최군형은 이내 적응한 듯 깔깔 웃어댔다.얼마 후...“악!”최연준의 비명에 강서연이 깜짝 놀랐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문을 두드렸다.“왜 그래요? 넘어졌어요?”그 말이 끝나자 욕실 문이 열리더니 최연준이 수건을 두르고 굳은 얼굴로 걸어 나왔다.“여보? 왜 그래요?”“괜찮아, 이 자식이 날 꼬집어!”“네? 어디를요?”최연준이 입을 꾹 다물고는 허리에 두른 수건을 꼭 잡고 있었다.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이때 최군형이 거품도 닦지 않은 채 흥분해 달려 나왔다.“응가, 응가! 가지고 놀래!”최연준이 최군형을 흘겨보고는 도망갔다. 강서연은 이제야 상황을 깨닫고는 웃으며 아들을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잘 씻기기나 하지, 왜 같이 씻겠다고 해서는!사실은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군형이 손힘이 센데, 다친 건 아니겠지?......늦은 밤, 황궁에는 온통 불이 켜져 있었다.옥이는 특제 복숭아 향 향초를 켰다. 가연은 이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송이수가 이를 좋아했기에 계속 켜두고 있었다.향이 온 궁전에 퍼졌다. 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마마, 이제 쉬시지요.”옥이가 천천히 말했다. 가연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맨체스터 시티의 일은 잘 해결된 거야?”“네, 그 둘을 찾아냈습니다. 서지현의 양부모더군요.”“어떻게
가연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뭔데?”옥이가 침을 삼켰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열여덟 살부터 가연을 모셨기에 그녀에 대한 감정이 깊었다. 하지만 가연에게 그녀는 중요한 사람이 아닌 듯싶었다.“제 아들 학교 말인데요...”“이미 해결해 줬잖아?”“마마, 그 학교는 꼴통 학교에요! 학생들은 패싸움하고, 선생들도 제대로 일하지 않고, 아무것도 배울 수 없어요!”“하지만 호적이 필요 없는 건 거기뿐이잖아. 옥아, 네 아들은 사생아야. 호적도 없는 애가 어떻게 공립학교를 다녀?”옥이가 멍해졌다. 그녀는 조용히 가연의 비웃음 어린 눈길을 쳐다보았다. 십여 년의 충성이 한낱 종이조각이 된 기분이었다.호적?왕후의 시녀가 제 아들의 호적도 만들지 못한다니,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가연이 입만 열면 해결될 문제였다.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하지만 가연은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가연에게 옥이는 딱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옥이는 맨체스터 시티에 있을 때 강서연에게 똑같이 말했었다.“제 아들은 사생아라서 호적에 없어요. 그래서 공립 학교를 못 다니는데, 사립 학교를 보내려니 학비가 너무 비싸네요.”“걱정 마요, 제가 해결해 줄게요.”강서연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저 해보는 말인 줄 알았는데, 사흘 뒤 남양 최고의 공립학교 교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었다.......“멍하니 뭐 해?”가연의 질책에 옥이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숙여 붉어진 눈시울을 가렸다.“옥아, 만족하지 못하는 건 알겠지만, 이게 내 최선이야. 내가 왜 한낱 시녀 때문에 학교 교장에게 부탁해야 해? 심지어 사생아잖아. 치욕스러운 사생아 말이야!”“마마! 사생아가 뭐 어때서요? 사생아는 이 세상에 살아갈 자격도 없는 거예요? 교육받을 권리도 없는 건가요?”가연은 서지현만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흥분했다.“사생아는 방해만 되는 존재야. 됐어, 여기까지 하자. 경고하는데, 여기저기 내 이름 대고 다니지 마. 들켰다가는 너고 네 아들이고 모두 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