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가 고개를 돌리자 곱고 긴 치마를 입은 한 여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그녀의 옷은 명품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맞춤형인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토록 몸에 꼭 맞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서를 알아보았지만 이서는 그녀를 알아볼 수 없었다. ‘아까 사모님께서 여기에는 사모님의 옛 지인이 아주 많다고 하셨잖아. 이분도 사모님의 지인분이시지 않을까?’ 이서가 우호적인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심가은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하이먼 스웨이의 일로 이미 사이가 틀어진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은은 지엽이 좋아하는 사람이 이서라는 사실도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그래서 이서가 여기에 있는 것을 본 가은은 매우 놀랐으며, 첫 반응으로 트집을 잡으려던 것이었다. ‘왜 나한테 밝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는 거지?’ ‘미쳐버린 걸까?’‘아니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야?’가은이 이서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여긴 웬일이야?” “배미희 사모님의 초대를 받았어요.”이서가 대답했다. “배미희 사모님?”가은은 이서가 말하는 배미희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었다.그녀가 냉소를 지었다.“허, 우연의 일치라고? 우리 엄마의 심부름으로 온 건 아니고?” 이서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가은을 바라보았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우호적이지 않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무슨 말인지 몰라? 멍청한 척이라도 하는 거야?”심가은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를 도와 나를 찾아서 그 덕을 보려는 거잖아.” “외국까지 쫓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뭐야.” 이서의 안색이 변했다.“저기요, 아가씨, 도통 무슨 말씀인지…” 가은이 하찮다는 듯 말했다.“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아가씨.”그때 한 직원이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유람선이 준비되었습니다. 지금 바로 바다로 나가실 수 있습니다.”
가은은 처음 그 유람선을 보자마자 바로 매료되었으나, 애석하게도 그 유람선에 올라 진면목을 볼 기회는 얻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번이고 하이먼 스웨이에게 애원했었다.하이먼 스웨이는 기회가 된다면 가은과 함께 그 유람선에 오르겠다고 약속했으나, 그녀의 애원을 잦아들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가은의 억지에 화가 난 하이먼 스웨이는 그녀를 크게 꾸짖었었다. 물질적인 것은 중요치 않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하이먼 스웨이는 매우 완곡하게 말했으나, 가은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허영을 꿈꾸지 말라는 하이먼 스웨이의 분명한 뜻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은은 하이먼 스웨이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모든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는 하이먼 스웨이를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왜 저는 올라가면 안 된다는 거죠?” 짜증이 난 이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정말 이상한 분이시네요. 비켜주시겠어요?” “허, 내 앞에서 허풍이라도 떨어보려는 거야? 거기 올라갔다가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는 전혀 두렵지 않은가 봐?” ‘이씨 가문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이서가 가은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무슨 말씀인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네요.”말을 마친 이서가 유람선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가은은 팔짱을 낀 채 이서가 당할 망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유람선의 직원들은 이서를 쫓아내기는커녕 예의 바르게 손을 내밀어 그녀가 유람선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가은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가은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 또한 빠르게 달려가 유람선에 오르려 했지만 직원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아가씨, 아가씨는 이 유람선에 오르실 수 없습니다.” 가은이 이서를 가리켰다. “그럼 저 여자는 왜 된다는 거예요?” “이서 아가씨는 저희 가문의 사모님의 지인이십니다.” “뭐, 뭐라고요?”가은이 웅얼거렸다. “이서 아가씨는 저희 가문의 사모님의 지인이십니다.”다시 한번 반복한 직원이 예의 바르게 말했
“사모님, 저는 단지 선의로 저 여자한테 속지 말라고 당부드렸을 뿐인데, 교양 없는 막돼먹은 사람이라니... 말씀이 정말 지나치시네요.” 심가은은 큰 상처를 받은 듯했다. 하지만 배미희에게 이런 수법은 통하지 않았다. “내 앞에서 불쌍한 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감히 내가 특별히 초대한 이서 씨를 함부로 대하다니, 다시는 이 해역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만들어줄게요.”가은의 안색이 굳어져 갔다. “사모님, 안 돼요. 저희 엄마도 이곳의 지분을 가지고 계신다고요.” “허.”배미희가 말했다.“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이 가진 주식은 우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뿐이에요. 그리고, 그쪽이 한 일을 알게 된다면, 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은 내 조치에 백 번이고 찬성하실 분이시고요.” 배미희는 더 이상 가은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주변의 직원에게 말했다.“당장 여기서 내보내요. 더러운 물건은 보고 싶지 않네요.” “예.”직원은 즉시 동료를 불러 가은을 데리고 떠났다. 배미희는 가은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서야 유람선에 올랐다.이서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확인한 그녀가 얼른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내 지인의 딸이거든요.” “잃어버린 저 아이를 되찾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저 아이를 아주 보물처럼 여기고 특별히 총애한다더군요.” “그래서 저 아이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한 것 같아요.” “어머!”배미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서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놀란 배미희가 허둥지둥 이서를 붙잡았다. 큰 소리를 들은 유람선의 직원이 달려와 이서를 침대로 옮겼다. 다행히도 유람선에는 의사가 타고 있었다.하지만 그 의사는 간단한 검사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이서에게서 어떠한 이상도 찾아낼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배미희가 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상언이 긴장하며 물었다.[바다로 나간 거 아니었어요? 왜 갑자기 기절했
[이미 엉망진창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왜 손을 놓지 않느냐고요?] [왜 그런 것 같으세요?] 배미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설마, 이서 씨 때문에?” [맞아요, 이서 씨가 혼자 여기 있는데 어떻게 지환이가 안심할 수 있겠어요.] 배미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지환이의 인생에 꽃이 피었구나.”“아들아, 언제쯤이면 엄마도 네 인생에 꽃이 피는 걸 볼 수 있겠니?” 결혼을 재촉하는 배미희의 말을 들은 상언은 대충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곧 다시 전화가 걸려 왔으나, 그 전화는 배미희가 아닌 지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었다. “너구나.”상언이 전화를 받았다.“이서 씨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한 거지? 이서 씨는 잘 지내. 오늘은 우리 엄마랑 바다도 갔어.” 지환이 대답했다.[고마워.]“고맙긴 뭘. 누군가가 그러더라? 우리가 형제 같다고.” 상언이 물었다.“정확히 언제 올 생각이야?”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좀 있어서 이틀 정도 늦어질 것 같아.]지환이 말했다. “아, 맞다. 너한테 알려준다는 걸 깜빡했는데, 지엽 도련님이 이서 씨가 외국에 가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하시더라. 그리고 너한테는 몸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전하라고 하셨어.” 지환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내일 바로 갈게.] “이틀 더 걸린다면서?”[중요한 일은 아니거든.]말을 마친 지환이 곧장 전화를 끊었다. 상언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지엽 도련님이 이서 씨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운 게 분명해.’ 같은 시각.해변에서 쫓겨난 가은은 겨우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윤이서라는 여자를 좀 알아봐 주세요.”가은이 수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이서의 상세한 상황을 알렸다.“그 여자가 왜 갑자기 외국으로 나온 건지 알고 싶어요.” ‘분명 며칠 전에 하은철이랑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왜 갑자기 여기에 나타난 거지? 아무리 생
그렇다. 지엽은 이씨 가문의 고택에 있었다. 다만, 그의 방문 목적은 이씨 가문의 가족을 방문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이서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상언을 마주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이서는요?”상언이 소파를 가리켰다.“그렇지 않아도 방금 물어보니까 바다로 나갔다더군요. 오후는 되어야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지엽이 소파에 앉자, 상언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엽의 물 한 잔을 따르게 했다. “오후에 다시 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지엽이 미소를 지었다.“오후에 다시 왔는데, 또 저녁에 오라고 하실까 봐 두려워서요.”상언이 물었다.“제가 도련님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지엽이 하인이 들고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이 선생님은 하 대표님의 친구시잖아요. 마냥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죠.” 상언이 차분히 대답했다.“마음대로 하시죠. 저는 다른 일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기다리세요.” “네.”상황을 지켜본 상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위층으로 올라가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그는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는데,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앉은 지엽의 모습이 보였다. 지엽의 끈기에 탄복한 상언이 말했다. “이서 씨가 도련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찾아오시다니, 왜 본인을 궁지로 모시는 겁니까?” 상언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지엽에게 물었다. 지엽이 고개를 들어 상언을 보며 웃었다.“기억을 잃은 이서가 저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상언이 대답했다. “하은철이 아주 적절한 예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지엽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저는 은철이랑 달라요. 은철이는 이서에게 큰 상처를 줬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지엽이 자신 있게 말했다.“저는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해요.”“이 선생님도 보셨겠지만
“이씨 가문은 모든 식사 준비를 집에서 하는 편이에요.” 말을 마친 배미희가 이서에게 물었다.“이서 씨, 이서 씨의 요리 솜씨는 좀 어때요?” “뛰어나지는 않은 것 같아요.”이서가 겸손하게 말했다.“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상당히 뛰어난 실력을 갖췄나 보군요. 이서 씨, 이서 씨가 직접 지엽 씨에게 밥을 한 끼 해주면 어떻겠어요? 나도 이서 씨의 요리 솜씨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배미희가 이서의 귓가에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셰프들이 준비한 식사는 질렸거든요.” 배미희가 이렇게 말하니, 이서는 그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좋아요, 그럼 제가 내일 모두에게 밥을 대접해 드릴게요. 하지만 맛은 보장할 수 없어요.” 배미희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감히 싫은 소리를 하겠어요. 한 달 동안 같은 셰프가 같은 방식으로 만든 식사는 징벌, 그 자체였다고요.”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지엽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서야 이씨 가문의 고택을 떠나려 했고, 이서는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특별히 그를 문어귀까지 데려다주었다. “여기까지 발걸음해 줘서 정말 고마워.” 지엽이 손을 내저었다.“이서야, 오늘 저녁에만 해도 이미 10번 이상 고맙다고 했잖아. 내가 널 위한 선물을 준비한 건 너의 감사를 얻기 위한 게 아니었어.” “그럼?”이서의 맑고 청아한 눈동자를 본 지엽은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만 같았다. “왜 그래,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거야?”이서가 이해되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지엽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인제 그만 가볼게. 너도 어서 들어가.” “그래, 알았어.”이서는 곧장 몸을 돌려 장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엽은 제 자리에 선 채 그녀의 뒷모습이 검은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고서야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바로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미친 듯이 달려온 차 한 대가 그의 차를 들이받았다. ‘음주 운전인가?’안색이 변한 지엽이 사고 운전자를 확인하려던 찰나, 차에서 내린 묘령의 여인이 자신을
남녀 힘의 차이는 대단히 컸기에, 가은은 지엽이 차에 오르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지엽의 차량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앞을 휙 지나쳐 버렸다. 가은은 차의 후미등을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차의 후미등 불빛이 사라지자, 가은이 원망스럽다는 듯 눈앞의 장원을 바라보았다. ‘너무 짜증 나.’‘윤이서가 어떻게 이씨 가문을 꼬드긴 거지?’ ‘그 여자, 운도 좋다니까.’ 장원 안.배미희와 잠시 대화를 나눈 이서는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위층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리를 떠나기 전, 상언을 흘끗 바라보았다. 배미희가 이 디테일을 놓칠 리가 없었다. 이서가 방에 들어서자 배미희가 지체 없이 상언에게 말했다.“상언아, 이서 씨가 너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더구나.” 상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받침대를 내려놓았다. “됐어요.”“가서 한번 물어봐, 방금 보니까 이서 씨가 너를 여러 번 쳐다보더라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상언이 몸을 일으켰다. “아마 지환이의 일을 묻고 싶은 것 같아요. 제가 한번 올라가 볼게요.” 상언이 예상이 적중했다.이서는 지환의 일을 너무도 알고 싶어 했다. 다만, 지금의 그녀에게 지환은 ‘H선생님’이었다. “H선생님을 만날 기회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이서가 긴장한 듯 물었다. “그건...”상언 역시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H선생님께서 저를 만나는 걸 원치 않으시는 거죠, 그렇죠?” 이서의 눈동자는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상언이 급히 부인했다.“그런 건 아니에요. H선생님도 이서 씨를 정말 만나고 싶어 하세요.” “정말요?”이서가 물었다.“그러면 왜 저를 보러 오지 않으시는 거예요?” “일이 좀 복잡해서 저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서 씨,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이곳의 생활을 좀 더 즐기는 건 어떨까요?” 실망한 이서가 대답했다.“네, 알겠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정신을 차린 이서가 상언에게 말했다.“정말 감사해요, 이 선생
시간이 늦지만 않았더라면, 이상언은 곧바로 시작하려는 듯했다. “네.”이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은 굿나잇 인사를 나누었고, 상언은 그제야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아래층에서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배미희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지엽 도련님이 오셨다는 걸 지환이한테 알려야 할까?’방으로 들어간 상언이 고민을 하던 바로 그때,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지환이었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전화를 거는구나.’상언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 씨를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까 봐 정말 두려운가 봐.’상언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으나,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졸고 있던 지환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이서는 집에 돌아왔어?]“응, 진작에 왔지. 근데 이서 씨만 온 게 아니라, 지엽 도련님도...” 수화기 너머의 숨죽인 호흡을 느낀 상언의 얼굴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져 갔다.“지엽 도련님도 오셨어. 이서 씨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오셨더라고.” [그거 말고 다른 일은 없었어?] 지환은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었으나, 전혀 졸리지 않은 듯했다. “내일 이서 씨가 직접 준비하는 요리를 먹으러 또 오신다더라. 지환아, 너도 긴장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지환이 미간을 찌푸렸다.[너는 이 상황이 즐거운가 봐?]“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네가 무슨 긴장할 필요가 있겠어. 너는 목소리만으로 이서 씨를 구했잖아.” ‘하나 씨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지환은 상언처럼 낙관할 수 없는 듯했다. “너 지금 어디야? 왜 이렇게 조용해?”상언은 처음부터 묻고 싶었다.[비행기 안이야.]지환이 눈을 감았다. “정말 오는 거야?”상언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아니, 그쪽 일은 아직 다 처리하지도 않았잖아?” [이천이 있잖아.]지환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아무래도 피곤한 것 같아. 더는 방해하지 말자.’“그래, 좀 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