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늦지만 않았더라면, 이상언은 곧바로 시작하려는 듯했다. “네.”이서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은 굿나잇 인사를 나누었고, 상언은 그제야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아래층에서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배미희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지엽 도련님이 오셨다는 걸 지환이한테 알려야 할까?’방으로 들어간 상언이 고민을 하던 바로 그때,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지환이었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전화를 거는구나.’상언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 씨를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까 봐 정말 두려운가 봐.’상언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으나,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졸고 있던 지환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이서는 집에 돌아왔어?]“응, 진작에 왔지. 근데 이서 씨만 온 게 아니라, 지엽 도련님도...” 수화기 너머의 숨죽인 호흡을 느낀 상언의 얼굴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져 갔다.“지엽 도련님도 오셨어. 이서 씨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오셨더라고.” [그거 말고 다른 일은 없었어?] 지환은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었으나, 전혀 졸리지 않은 듯했다. “내일 이서 씨가 직접 준비하는 요리를 먹으러 또 오신다더라. 지환아, 너도 긴장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지환이 미간을 찌푸렸다.[너는 이 상황이 즐거운가 봐?]“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네가 무슨 긴장할 필요가 있겠어. 너는 목소리만으로 이서 씨를 구했잖아.” ‘하나 씨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지환은 상언처럼 낙관할 수 없는 듯했다. “너 지금 어디야? 왜 이렇게 조용해?”상언은 처음부터 묻고 싶었다.[비행기 안이야.]지환이 눈을 감았다. “정말 오는 거야?”상언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응.]“아니, 그쪽 일은 아직 다 처리하지도 않았잖아?” [이천이 있잖아.]지환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아무래도 피곤한 것 같아. 더는 방해하지 말자.’“그래, 좀 쉬어
“길고양이? 대체 언제 길고양이한테 먹이를 주러 간다는 거니?” 이상함을 감지한 배미희가 물었다. 하지만 상언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려는 듯했다.“엄마, 신경 쓰지 마시고 5인분을 준비해 주세요.” 아들의 요구를 들은 배미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1인분은 많은 양도 아니니까.’ 오히려 이서는 흥미를 느낀 듯했다.“이 선생님께서 이렇게 정이 많으신 분인 줄은 몰랐네요.” 상언이 무슨 우스운 일이 생각난 듯했다.“길고양이를 잘 먹이지 않으면 우리 집 지붕을 뒤집어 놓을지도 모르거든요.” 놀란 이서가 물었다.“그렇게 사나운 고양이예요?”미소를 지어 보인 상언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를 떠났다. 이서는 오후가 되어서야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아요?”“괜찮습니다, 사모님.”이서의 대답을 들은 배미희가 부엌을 떠났다. 부엌을 나선 그녀는 목을 길게 뺀 상언이 문 앞을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안이 벙벙했던 그녀는 상언의 뒤로 걸어가 그를 따라 목을 길게 빼고 밖을 보았다.“아들아, 뭘 보는 거니?” “길고양이요.”상언이 대답했다. 지금쯤이면 지환이 비행기에서 내리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나, 그는 시간을 질질 끌며 나타나지 않았다. 상언은 지환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서 씨에 관한 일이라면 평소의 지환이를 생각해서는 안 돼.’ 그러나 지환은 이서가 요리를 완성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식탁에 앉은 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고도 남았을 시간이야.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설마... 이서 씨가 자극받을까 봐 참고 있는 걸까?’ “이 선생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맞은편에 앉은 지엽이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제가 이서를 빼앗아 갈까 봐 걱정되시는 거예요?”상언은 고개를 들어 다소 악랄하게 웃는 지엽을 바라보았으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엽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이미 말씀드렸지만, 하 대표님은 쉽게 이서 앞에 나타날 수
이서의 요리 솜씨를 칭찬하던 배미희가 이내 식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들 왜 그래요?”“잠시 나갔다 올게요.”상언은 문밖의 지환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마중 나올 필요 없어.” 바로 이때, 문어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이서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 문어귀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문어귀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한 지엽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 사람은 바로 지환이었다. 다만, 그의 얼굴에는 은색 가면이 씌워져 있었으며, 정교한 그 가면 위에는 생동감 넘치는 용이 조각되어 있었다. 지환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과 같은 고귀함과 신비로움을 내뿜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이서를 본 그는 인내심을 잃을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자석과 같아서, 지환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서를 끌어당길 수 있는 듯했다. ‘이럴 수가!’지엽의 심장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됐다. “H 선생님? H 선생님 맞죠?”지환의 앞에 선 이서는 온몸의 피가 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내가 왜 이러지?’ 지환은 마음이 복잡해졌다.‘드디어 이서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그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이서를 쓰다듬으려 했으나, 이내 마이클 천의 경고를 떠올렸고 손을 거두었다. “그래요, 나예요.”그의 낮은 목소리는 아주 섹시했다. “정말 H선생님이세요? 제가 상상했던 모습이랑... 정말 똑같으세요.” 이서가 떨리는 손으로 지환의 가면을 벗겨 얼굴을 확인하려 했으나, 그가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어머, 내가 무슨 짓을!’이서는 난감해졌다.“죄송해요, 얼굴이 너무 궁금해서 그만...” “내가 더 미안해요. 난 아직 Y양에게 내 얼굴을 보여줄 수 없어요.” “왜요?”“Y양은 아직 내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요.”“저 때문이라는 거예요?”지환이 이서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그럼 언제쯤 얼굴을 보여주실 수 있는 거예요?
배미희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기에, 상언이 아침에 말한 길고양이가 지환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잔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상언은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런 수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그가 얼른 지환을 향해 말했다. ”형님, 형님, 제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식사를 마친 후에 사죄드리겠습니다.”“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보세요, 이서 씨가 정성껏 요리한 음식인데, 어서 드셔보고 싶지 않으세요?” ‘역시 이서를 빼돌리는 건 명확한 해결 방법이 아니었나 봐.’ 지환은 걸음을 옮겨 식탁으로 향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지엽을 쳐다보지 않았다.무시당한 지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는 지환과 경쟁 관계였으나, 은철처럼 이서가 보는 앞에서 지환을 언급할 사람이 아니었으며, 이서를 부추겨 지환의 가면을 벗기는 일을 더더욱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것만이 지환의 유일한 약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그 덕에 저녁 식사는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끝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지엽이 SNS를 게시했다. [식사를 대접해 줘서 고마워, 이서야.]게시한 사진은 이서가 준비한 풍성한 만찬을 찍은 것이었다.지엽은 하은철의 절친한 친구 중의 하나였다.‘어차피 은철이도 이 게시글을 보게 될 거야.’ 그가 일부러 은철에게 게시글을 공유했다. ‘어차피 M국까지 쫓아오지도 못할 텐데, 뭐.’ ‘설령 온다고 하더라도 하 대표님이면 은철이를 상대할 수 있으실 거야.’“H선생님.”이서가 과일 한 접시를 들고 나왔다. “과일 좀 드세요.”이 장면을 본 지엽은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지환이 나타난 후, 이서의 시선이 줄곧 그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녀가 다른 사람들을 모두 배려한다고 할지라도, 지환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더욱 다정했다. 그녀의 두 눈은 별이 박히기라도 한 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질투하시는 겁니까?” 상언이 갑자기 다가와 지엽의 귓가에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엽은 즉시 눈길을 피
비록 심가은은 이미 지엽과의 SNS 친구를 삭제한 상황이었으나, 그녀의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지엽과의 SNS 친구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은과 지엽 사이의 사랑과 증오, 그리고 원수를 모르던 그 친구가 휴대전화를 든 채 가은에게 물은 것이 화근이었다. “지엽 씨가 절친이라고 말하는 이서 씨가 누구야?”‘이서?’심가은은 머리가 윙윙거리는 듯했다. SNS 게시글을 확인한 그녀는 곧바로 이성을 잃고 술상을 엎어버렸다.그녀의 행동은 자연히 다른 손님들의 이목을 끌었다. “뭘 봐? 구경 났어?!” 상황을 지켜보던 손님들은 놀라서 모두 뛰어나갔고, 술집은 순식간에 매우 조용해졌다. 바로 이때, 술집에 깨진 유리 조각을 밟는 하이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날카롭고 귀를 찌르는 듯한 소리는 심가은을 더욱 미치게 했다. “구경 났느냐니까?!”“발버둥 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에요, 현실을 바꾸고 싶다면 행동 해야죠.” 차가운 목소리가 술집에 울려 퍼졌다.가은이 고개를 들어 올렸으나, 불빛이 희미한 탓에, 상대가 여자라는 것 외에는 뚜렷한 이목구비를 볼 수 없었다. “누구세요?”가은이 경계하며 물었다. 하이힐을 신은 그 여자가 서서히 가은을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마침내 희미한 빛의 힘을 빌려 상대방이 매우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자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여자는 가은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또박또박 말했다.“박예솔이라고 해요, 심가은 씨를 도와 윤이서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죠.”가은은 살짝 동요하는 듯했으나, 이내 경계하며 물었다.“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날 믿을 필요는 없어요. 단지 내 말이 일리가 있는지 없는지만 판단하면 될 뿐이죠.”가은이 멍하니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소지엽 씨, 갖고 싶지 않아요?” 가은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심가은 씨가 소지엽 씨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말을 들은 가은이 눈
심가은이 떠난 후, 술집에 낮고 자성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여기에 한참이나 서 있었는데도, 저 여자는 날 발견하지 못했어. 정말 저렇게 멍청한 사람이 널 도와 제수씨를 죽이는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말하는 사람은 바로 하지호였다. 그는 박예솔과 함께 술집으로 들어왔으나, 검은 양복을 입은 탓인지 완벽하게 어둠으로 녹아들 수 있었다. 어쩌면 가은이 그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호의 말을 들은 예솔이 냉소하며 고개를 들었다.“저 여자는 시작에 지나지 않아. 아직 도구라고 할 수도 없는 존재라고.” ‘진정한 도구는 내가 끌어들인 그 사람이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지호가 물었다.“하은철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걔는 제수씨를 아주 소중히 여기잖아. 네가 제수씨를 죽였다는 걸 알면, 널 가만히 두려고 하지 않을 거야.” “허.” 예솔이 비꼬았다.“오빠, 하은철은 장난감을 얻지 못한 어린아이일 뿐이야. 윤이서를 소중히 여기면 뭐 해? 윤이서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걸 걸고 하씨 가문에 덤빌 용기는 없는 사람인데.”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어떠한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예솔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지호를 바라보았다.“일이 성사되면, 누가 하은철을 신경 쓰겠어?” 옅은 미소를 띤 지호가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보기라도 하는 듯 입을 열었다.“혹시라도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화려한 불빛이 비치던 박예솔이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녀가 몸을 돌려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말했다.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이번에는 절대 도망가지 못할 테니까.’ ...10시가 되자, 지엽이 아쉬워하며 이씨 가문의 고택을 떠났다. 그는 계속해서 이서와 함께하고 싶었지만, 이서와 지환이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자 하니, 마음이 초조해지는 듯했다. 차에 오른 지엽이 또 한 번 상언의 말을 떠올렸다. ‘설마, 정말 포기하려는 건 아니겠지?’그가 고
그는 이서의 모든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작은 숨결만으로도 쉽게 흥분할 수 있었다.그가 등을 꼿꼿이 펴며 말했다.“이서야, 조금만 뒤로 물러나 줄래?” 한 글자 한 글자를 뱉는 그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이서는 그제야 지환과의 거리가 너무도 좁혀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볼이 새빨갛게 변한 그녀가 얼른 뒤로 물러났다.공기 중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이서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죄송해요, H선생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단지 선생님의 눈이 너무 예쁘고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아서...” 이 말을 들은 지환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인제 그만 가볼게.”“이렇게 갑자기요?”‘내가 너무 무례하게 행동한 걸까?’ “갑작스러운 건 아니야.”이서의 걱정을 눈치챈 지환이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으나, 몸을 돌린 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자신의 눈을 보여주지 않았다.“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이렇게 늦었는데 또 일을 하신다고요?” “응.”지환이 이서를 등진 채 손을 흔들었다.“다음에 또 보러 올게.” “그게 언젠데요?”이서가 지환을 따라나섰으나,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고, 성큼성큼 이씨 가문의 고택을 떠났다. 차에 다다른 지환이 문을 닫고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젖혔다. ‘내 눈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니... 앞으로 이서를 보러 오려면 눈까지 가려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다시는 이서를 마주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불이 환하게 켜진 장원을 바라보던 지환이 매섭게 미간을 찌푸린 채 마이클 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환이 가면을 쓰고 이서를 만났으며, 그녀가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마이클 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이서 아가씨의 곁에 머물 생각이신 겁니까?] ‘여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현상이긴 해.’‘하지만 비운의 하 대표님에게는 정말 좋은 일인 것 같아.’ “그런데...” “내 눈이 낯이 익다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선선한 저녁 바람이 부는 강변에 앉은 심가은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시계를 바라보던 그녀는 분침이 12에 떨어지자 고개를 들었다. 가은이 고개를 드는 순간, 키가 크고 장대한 덩치의 한 남자가 가은의 맞은편에 앉는 것이 보였다. 그는 행동이 거칠었으며 몸에서도 역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덥수룩한 그의 머리는 몇 년간 감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가은을 가장 불쾌하게 한 것은 그 사람이 가은의 면전에서 발을 후벼 파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이서만 아니었어도...’ 가은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간신히 혐오감을 억눌렀으나, 표정을 풀 수는 없는 듯했다. 그녀가 한 묶음의 사진을 꺼내어 그 남자에게 건넸다. 그 남자의 탁한 눈이 곧 번쩍이기 시작했다. 마치 사냥감을 정한 짐승처럼 매서운 눈빛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사진 속의 여자를 처리해 주기만 한다면, 사례금은 두둑하게 챙겨 드릴게요.” 가은은 외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M국에서 유학한 적이 있었다. 비록 외국어 성적이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 남자는 가은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눈동자에 가득한 욕정은 곧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가은은 그의 눈빛을 보기만 해도 오한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가 이서를 상대할 것이라 생각하자, 그녀의 마음은 이내 후련해지는 듯했다. “알겠어요.”마침내 탐욕스러운 눈빛을 거둔 남자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그런데, 이 여자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는 겁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제가 알려드릴 테니까요.” 가은의 말을 들은 남자가 아쉽다는 듯 입을 열었다.“더 기다리라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그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혹시라도 연락을 주지 않는다면...” 그가 거리낌 없는 눈빛으로 가은을 훑어보았는데, 방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