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동건은 아직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사무실은 시계 초침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아,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면 굉장히 조용했다.진유라는 더욱 긴장했다. “지금 저한테……”생각해 보자.어쨌든 인생이랑 관련된 큰일이니, 비록 안 맞으면 헤어지면 되지만, 만약 운이 나빠서 떼려야 뗄 수도 없는 이상한 놈이면 어쩌지?곽동건의 최근 일 처리하는 스타일을 보면…… 그녀는 속으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조금 닮았다.“띠띠띠.”곽동건이 맞춰둔 알람이 울렸다. 회의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었다.“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생각이 끝나면 알려주시고요.”진유라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그에게 물었다. “그럼 제가 거절한다면 받아들이실 건가요?”“아니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럼 다 헛소리였군.그녀는 달게 받아들이거나, 계속 치근덕거려서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회의가 끝나고, 진유라는 정리한 회의 내용을 곽동건에게 건넸다.이 남자는 지금 다른 일 때문에 보지도 않고 그대로 한 쪽에 던졌다.“빨리 봐봐요.” 진유라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처음이어서 굉장히 들떠있었다.그녀는 기대하는 얼굴로 재촉하며 말했다. “정리한 거 어때요, 더 수정할 부분 있어요?”비록 그녀는 공부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있었기에,안 했으면 안 했지, 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하고 싶었다. 열심히 일한 대가가 엉망이라면 얼마나 억울한가!곽동건은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손에 들고 있던 서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차라리 정리한 내용을 대강 뒤적이고 말했다. “좋네요.”비록 몇 줄 밖에 쓰지 않았지만, 아주 진지하게 봐주니, 진유라도 만족스러워 두 손을 얼굴에 올리더니 말했다.“에휴, 난 정말 똑똑하고 예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매일 발전하는 착한 아이라니까.”“……”뻔뻔한 사람은 본 적 있지만,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처음이다.“곽 변호사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그녀는 두 손을
죽어도 괜찮은 박태준은 이때 집 문 앞에 도착했다. 그는 오늘 밤 접대로 몇 잔을 더 마셨다. 비록 취하진 않았지만, 취기가 올라왔다.문을 열자, 문 앞에 누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조금 긴 검정 머리가 이마를 가리고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눈과 비정상적으로 새빨간 입술만 보였다.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박태준은 갑자기 술이 깼다.그는 미간을 확 찌푸리고 말했다. “왜 불도 안 켜고 있어?”그가 손을 뻗어 벽에 달린 등을 누르자 거실이 환해졌고, 나무 송장처럼 서있던 기민욱도 밝은 빛에 모습이 드러났다. 비록 아직 음산한 기운은 남아있었지만, 최소한 귀신같지는 않았다.거실은 얼음장처럼 추웠고, 박태준이 난방을 켰다. “온 지 얼마나 됐어? 난방은 왜 안 켰어?”기민욱은 그의 몸에서 진동하는 술 냄새를 맡고 동문서답을 했다. “형, 술 마셨어?”“어, 거절할 수 없어서 몇 잔 마셨어.”“내가 꿀물 좀 타올게.” 그는 말이 끝나자 곧장 주방으로 갔다. 박태준은 밥을 해먹지 않지만, 도구는 다 갖추고 있었다.먹는 것에 있어서 기민욱은 유통기한을 지나지 않기 위해 일정 기간에 한 번씩 모두 새걸로 바꾸었다.박태준이 말했다. “됐어, 나 안 취했어.”“그럼 내가 물 좀 따라줄게.”“내가 알아서 해……”기민욱은 고개를 홱 돌리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약 탈까 봐 겁나?”그의 정신상태는 이상했고, 그 눈에서 사람을 불태워버릴 것 같은 불꽃이 희미하게 보였다.박태준은 오늘 재경의 일을 떠올리니, 기민욱이 왜 이러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나 목 안 말라.”기민욱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 그 안에 있는 것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오 박사가 얼마 전 해외 교류회에서 가져다준 신제품이었다.약이 독하고 효과가 빨라서 한 달이면 기억을 완전히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박태준이 소파 쪽으로 간 것을 본 기민욱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손을 빼고 뒤돌아 따라갔다.박태준은 두 다리를 벌리고 무릎에 팔꿈치
왕지석의 앞에 놓은 건 오늘 재경그룹에서 해고당한 인원의 리스트였다.“이 사람들, 왕 부사장 사람들이지? 회사 기밀을 빼돌린 혐의로 해고되었어. 앞으로도 아마 경인에서는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걸?”고연우의 목소리가 어두운 지하실에서 싸늘하게 울려퍼졌다.“이건 오늘 분량이고. 아마 내일에 2차 리스트가 올 거야.”왕지석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리스트를 꽉 붙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희미한 광선을 통해 리스트에 쓰인 명단이 한눈에 들어왔다.“말했잖습니까. 다 돈 때문에 한 일이라고요. 누군가가 저에게 새 프로젝트에 장난질 좀 쳐주면 10억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재경에서 평생 일했지만 보지도 못했던 금액이었어요. 하늘에서 떡이 떨어졌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지요.”그는 리스트에서 시선을 돌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이 사람들은 제 직장 동료일 뿐이고 회사에서 그들을 해고한다고 해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그래. 왕 부사장 말을 믿을게. 그래서 이들을 재경에서 쫓아낼 때 이들에게 말했어. 왕 부사장 당신이 돈을 받고 이들을 배신한 뒤에 가족들이랑 해외로 도주했다고.”왕지석은 분노한 눈으로 고연우를 힘껏 노려보았다. 극도의 분노 때문인지 기름기 좔좔 흐르는 그의 얼굴이 더 흉하게 일그러졌다.“제 집사람은요? 아들은요? 그들을 어디로 보낸 겁니까?”박태준은 집사람이라는 단어를 듣고 신은지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녀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왕지석은 온몸을 비틀며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의자에 손발이 꽁꽁 묶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음이 잘 되어 있는 별장 지하실이었기에 소리가 새어 나갈 걱정도 필요 없었다.고연우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박태준이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는데 여전히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멍청한 웃음을 짓고 있는 박태준을 볼 수 있었다.고연우는 욕설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그는 소매를 걷고
깊게 잠들었던 강혜정이 눈을 떴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누가 있는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비명을 질렀다.신은지는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하고 다시 강혜정을 불렀다.“어머님.”다행히 그녀를 알아본 강혜정이 한숨을 쉬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하구나. 금방 눈을 떴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그만… 많이 놀랐지?”신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비명소리를 듣고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박용선이 안으로 들어왔다.“무슨 일이야?”강혜정은 긴 악몽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별장에 있었는데 봄 향기가 가득한 정원 흔들의자에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주변에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중에 있는 별장이었는데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강혜정이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 한 사내가 별장에서 밖으로 나왔다. 편안한 복장을 입은 사내는 흔들의자 옆으로 천천히 다가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혜정아.”분명 목소리는 자상하고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광기와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관자 시선으로 바라본 그는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다.사내는 흔들의자에 누운 여자의 손을 잡고 천천히 그녀를 잡아당겼다. 여자는 힘없이 사내에게 이끌려 몸을 일으켰다.그 순간 방관자인 강혜정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그것은 그녀의 어릴 적 얼굴이었다.놀란 강혜정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분명히 꿈이고 방관자 시선이었는데 갑자기 사내가 고개를 들리더니 음침한 눈을 하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놀란 강혜정은 그대로 눈을 떴다.잠에서 깬 강혜정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것은 꿈이 아니라 그녀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이었다. 강혜정이 꿈에서 본 사내는 기재욱, 기민욱의 아버지이자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경쟁사와 결탁하여 재경그룹을 위기로 몰아넣은 인물이었다.박용선의 손에 충분한 증거가 있었기에 기재욱은 발뺌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 미친놈은 그때 강혜정을 납치하여 그
“대체 내가 박용선보다 못한 게 뭐야?”강혜정은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기에 절망적인 얼굴로 눈을 감았다.당장이라도 넌 미친놈이고 네 주제에 누구랑 비교하냐고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더 이상 이 미치광이를 자극할 수는 없었다.대답을 듣지 못한 기재욱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핸드폰을 집어들더니 말했다.“자, 박용선한테 전화해. 요 며칠 지방 출장 나갈 거고 5일 뒤에 돌아간다고 말이야.”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처롭게 말했다.“혜정아, 나랑 5일만 같이 있자. 응?”애원에 가까운 말투였지만 모든 게 자신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기에 강혜정은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가서 자수해요. 자수하고 합의까지 하면 양형을 좋게 받을 수 있잖아요. 어린 아들까지 있는데 아들을 생각해야죠. 엄마까지 잃은 아이인데 아빠까지 잃으면 애는 어떡해요?”“그럼 죽으라지. 어차피 나중에 커도 큰일을 못할 놈이야. 난 자수 따위 안 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경찰에 잡히지 않을 거야.”그의 손길이 강혜정의 옷섶에 닿았다. 강혜정은 바짝 긴장하며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기재욱은 흥미롭다는 듯이 겁에 질린 그 모습을 감상하더니 말했다.“내 말을 안 들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내 말만 잘 들으면 5일 지나고 풀어줄게. 사실 나 정사에 딱히 관심이 없어. 사랑이 없는 정사는 재미가 없거든. 그러니까 내 신경만 자극하지 않으면 무사할 거라는 얘기야.”섬뜩한 협박이 담긴 말에 강혜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박용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재욱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그녀는 납치에 관한 그 어떤 얘기도 꺼낼 수 없었다.물론 이 미친놈이 하는 말을 믿는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핸드폰에 대고 섣불리 구조요청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 갇힌 건지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박용선이 오기 전에 미친놈이 발작을 일으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일단은 지켜보며 기회를 기다리기로
창문을 두드린 자는 키 큰 남자였다. 그의 굴곡진 몸 선으로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는데 모자로 윗머리를 가렸고 검은색 마스크로 아래 얼굴까지 가렸다.신은지의 차는 가로등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었는데 그 사람이 허리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보는 바람에 불빛을 등지고 있어 그의 얼굴이 더욱 검게 보였다.정말... 귀신같았다.신은지는 손을 뻗어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를 더듬거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사물함에 넣어둔 망치를 꺼내 날이 선 쪽을 위로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재빨리 라이터 키를 눌렀다.“작은 사모님, 접니다. 겁먹지 마세요.”남자는 서둘러 마스크를 벗었다. 그는 신은지가 얼굴을 더 똑똑히 확인할 수 있도록 심지어 유리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먼저 가지 마세요. 보스께서 보내셨습니다.”“...”저번 주차장에서 그녀의 입을 막았었던 남자였다. 박태준의 사람이었지만 정확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지인인 것을 발견한 신은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창문을 내렸지만 여전히 망치를 꼭 움켜잡고 있었다.“사장님은요?”그녀가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박태준은 아직 그녀의 문자에 답장하지 않은 상태였다.남자가 대답했다.“보스께서 저더러 이사를 도우라고 분부하셨습니다.”“어디로요?”그녀는 박태준이 이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남자의 어깨를 넘어 뒤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옆에 주차된 차에 시야가 완벽히 차단되었다.“혼자 왔어요?”“신당동이요. 보스는 급한 일이 있으셔서 미처 오지 못했고 저 혼자 왔습니다.”신은지는 차에서 내리더니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주위를 둘러보더니 옷깃을 여미며 물었다.“차는 어디에 있어요?”“네? 저... 저 운전하지 않고 택시로...”신은지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그녀는 휴대폰 플래시를 켠 채 차의 뒷좌석을 꼼꼼히 체크했다.남자는 그녀의 뒤를 꼭 붙어 다녔지만 한참 지나도 이상한 점을 눈
신은지와 어렵게 단둘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박태준은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민우더러 이삿짐 옮기라고 하자.”그는 사실 그녀에게 중요한 물건만 챙기고 나머지 물건들은 죄다 버리고 새로 사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혹여나 여지라도 남겼다가 후에 그녀가 이 핑계로 다시 집을 나오려고 할까 걱정되었던 것이다.신은지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더니 입을 열었다.“응.”어차피 그녀는 현재 휴가를 신청한 상태라 재경그룹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 비좁아 죽을 지경인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되고, 운수 좋게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쇼핑센터를 드나들지 않아도 되며 박태준이 그녀 때문에 가슴을 썩히지 않아도 된다.아내를 달랬다는 건 재혼에 관한 희망도 높아졌다는 것이었다. 기민욱이란 변태만 해결하면 곧바로 그녀를 데라고 구청으로 가 재혼 증명을 뗄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뒤로 또 다른 요소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참에 아이도 다시 돌려받을 계획이었다.그러나 임신 중이라 또 한동안 참아야 한다.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 그보다 더 처참한 유부남은 없을 것이다. 알고 지낸 지 10여 년, 결혼한 지 3년, 이혼한 지 1년이 되면서 정작 행복한 식사 자리를 가진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하지만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신은지가 어느날 갑자기 후회하여 도망치면 어떡하나.만약 고연우의 그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분명 대놓고 그를 놀렸겠지? 그녀는 남편을 버린 채 아이만 데리고 도망칠 수도 있고 임신한 채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수도 있다. 심하면 아이에게 남편을 아저씨라 각인시키고 세 가족끼리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데 슬픔에 잠긴 그에게 아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아저씨, 왜 울어요?”박태준은 이토록 다채로운 인생을 경험한 적이 없었고 더우기는 이런 추잡한 상상마저 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현재 기분이 아주 좋았고 기운이 넘쳤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먼저 고개를 먹을 것인지 먼
신은지가 신당동으로 이사왔을 때 거실에 있던 꽃은 이미 진영웅에 의해 영생화로 뒤바뀌었다. 혹여나 그녀의 심기를 자극할까 봐 걱정되어 2층 손님방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그녀가 올 거란 소식에 가사 도우미들은 서둘러 집안 곳곳을 청소했고 심지어 침대 시트까지 바꾸었다.너무 늦은 탓에 신은지는 아파트에서 가지고 온 트렁크를 정리할 힘도 없었다. 원래는 신당동에 옷도 있기 때문에 간단히 일상용품만 챙기려고 했으나 민우는 한사코 짐을 몽땅 옮기자며 우겼다.멀쩡한 아파트는 마치 메뚜기 떼가 지나간 것처럼 원래 있던 가구들을 제외하고 죄다 신당동으로 옮겨졌다. 심지어 쓰레기까지 알뜰히 챙겨서 집 밖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렸다.신은지는 대충 샤워를 마친 뒤 곧바로 취침했다.이튿날.그녀는 휴대폰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저녁에 너무 늦게 잠든 탓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고 의식도 엉망진창이었다.“여보세요, 누구시죠?”“아직 안 일어났어?”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잠깐 곰곰히 생각해 보더니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챘다...“아빠.”신은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 때마침 9시였다.강태민이 입을 열었다.“강이연 출소했어.”“네? 강이연... 2년 선고받지 않았어요?”바다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이연은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예전에 괴롭혔던 친구가 법원에 기소하는 바람에 각종 죄목까지 추가되어 2년 형을 선고받은 것이었다.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재판도 급급히 마쳤다. 그 과정이 강태민의 손을 거쳤는지 아닌지는 그녀도 몰랐고 그리고 묻지도 않았다.“출소했단 소식은 나도 오늘에 알았어. 정상 절차를 밟고 감형으로 출소한 게 아니야. 아무래도 뒷문을 쓴 게 분명해. 파출소장 말로는 출소한 강이연을 데리러 온 게 강태석의 비서래. 그자도 배에 있었던 것 같아.”“...”신은지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강태석이 죽었는데 그가 아직 살아있다니, 게다가 이젠 감옥에서 강이연을 석방시켜 데려갈 수도 있다니.강태민은 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