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가 지하 격투장에 멈추자 반승제는 성혜인을 업고 7층으로 향했다.그의 어깨에 기댄 성혜인은 그가 유난히 저기압임을 알 수 있었다.침대에 성혜인을 눕힌 후, 반승제는 욕조에 물을 받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그러나 욕조에 온수가 가득 채워진 후에도 그는 옆에 쭈그리고 앉아 무념무상으로 있었다.그가 유난히 욕실에 오래 있는 것 같아 잠시 들어와 본 성혜인은 깜짝 놀랐다.욕조에 물이 넘치도록 반승제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제야 반승제는 꿈에서 깨어난 듯 황급히 일어나 수도꼭지를 잠갔다.욕실 문 앞에 선 성혜인이 입을 열었다.“임신하면 반신욕도 신중히 해야죠. 오늘은 안 할래요.”그가 멈칫하더니 다시 엉거주춤 욕조 물을 뺐다.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반승제를 더 긴장하게 했다.그러나 그는 무어라 먼저 말을 꺼낼 자격이 없었다. 그는 성혜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러나 아이가 찾아온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원했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었다.그가 다른 한쪽의 노즐을 열어 물의 온도를 조절했다.“가운은 선반 위에 있어. 먼저 씻고 있어. 난 다른 욕실에서 씻고 올게.”성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반승제가 가고 난 뒤, 성혜인은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그리고 욕조에 발을 담그고 반승우가 남긴 주소, BKS, 그리고 그들에게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연구기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그녀는 아직 임지연도 찾지 못했고 해야 할 일도 산더미였다. 그리고 미스터 K가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를 약점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성혜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수도꼭지를 잠갔다.한편 다른 욕실에 있는 반승제는 마음이 복잡했다. 성혜인이 아이를 없애겠다고 선언하면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막막했다.그가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니 성혜인은 이미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손에 책을 들고 대추를 입에 넣었다.“승제 씨, 제가 돌
끊임없이 울리던 휴대폰은 결국 배터리가 다 돼 전원이 꺼지고 말았다.설기웅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은 그는 7층과 가장 가까운 방에서 반승제를 기다렸다.반승제가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웃음기 가득한 그의 얼굴로부터 설우현은 성혜인의 선택을 예상할 수 있었다.그는 여전히 성혜인에게 어떻게 그녀의 신분을 밝힐지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활짝 웃는 반승제의 얼굴을 보니 아마 아이를 낳기로 말을 끝낸 것 같았다.“안 됩니다.”설우현이 분개하며 책상을 쾅 내리쳤다.“그렇게 어린애한테 아이를 낳을 고통까지 안겨줄 셈이에요? 아직 반 오십도 되지 않은 애한테, 결혼식도 없는 혼인에 이혼까지 했으면서 너무 생각 없는 거 아니에요? 게다가 반승제 씨 지금 지명수배 중이잖아요. 그런데 아이까지 낳아주길 원하다니 정말 무책임하네요.”반승제가 그의 옆 의자에 앉았다.“그럼 지금 바로 혜인이한테 가서 말해봐요. 네가 설씨 가문에서 잃어버린 딸이라고. 오빠를 알아보기나 하는지.”설우현은 말문이 턱 막혔다.가문이 성혜인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입을 뻐끔거리다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제가 오빠로서 잘한 일이 없다는 건 압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계속 찾으셨어요. 그리고 찾으면 집안의 주식을 다 넘기겠다고 하셨으니 한 번이라도 뵈었으면 해요.”그가 의기소침해져서 집안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동안 한 짓이 있으니 성혜인이 설씨 가문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반승제가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설씨 가문에서 설기웅과 설인아는 어떻게 할 생각이죠?”말 속의 뜻은 이러했다. 두 사람에 대한 처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성혜인을 보내주지 않겠다는.“아버지가 혼수상태입니다. 설씨 가문의 주식이 모두 혜인이에게 넘어가면 설씨 가문은 혜인이의 것이 되겠죠. 만일 혜인이가 싫다면 제가 대신해서 만족스러울 만한 결과로 보여줄 겁니다. 반승제 씨, 우리 아버지께서 혜인이 계속 찾고 있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 딸이 죽은
“오빠... 이제 열두 시인데 왜 아직도 안 들어와? 나 버리는 건 아니지? 나 오빠 없이 못 살아...”설기웅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늦게 갈 거야. 아버지랑 조금 더 있다가.”이에 설인아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오빠, 작은 오빠가 혹시 무슨 말 했어요?”예를 들어 성혜인의 진짜 신분이랄까.설우현이 반승제와 함께 급히 성혜인을 구하러 왔다는 것은 성혜인의 정체를 이미 알게 되었단 말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설우현이 그렇게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설기웅이 알게 된다면 바로 저로부터 돌아서는 게 아닐까?“아무 말도 안 했어. 인아야. 너무 걱정하지 마.”“오빠, 오빠는 영원히 내 편이지?”설기웅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여동생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인아야. 너와 성혜인이 싸운다면 난 당연히 네 편이지. 네가 억울하고 화나는 것 잘 알아. 내가 나중에 다시 기회를 찾아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그러나 설인아는 여전히 불안했다.“알겠어. 믿고 있을게.”전화를 끊은 설인아는 망설임 없이 그 남성에게 전화를 걸었다.“설우현 혹시 성혜인 정체 안 거 아니에요?”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이 타이밍에 성혜인의 정체가 밝혀지고 설기웅도 그들 편에 선다면 그녀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알까. 이 남성의 눈에 자신은 그저 버려진 장기 말이라는 것을.그는 버려진 장기 말을 상대하는 것조차 귀찮았다.“아니에요.” 말을 마친 그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려다.그의 가면이 옆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그는 대리석 테이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서주혁의 회복이 너무나 빨랐다. 제원시는 거의 그의 손안에 있으니 성혜인의 신분을 밝히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었다.하지만 역시 너무 눈에 거슬렸다.그가 양미간을 짜증스레 문지르고 있을 때 진백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세운아, 우리가 의심받게 되면
사진 속의 그 여자는 나미선만큼 온화하지 않았다. 싸늘함을 내뿜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웃음기가 남아있었고 두 사람은 몇 센티미터 떨어져 다정하게 기대어 있었다.카메라를 바라보는 설의종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넘칠 것 같은 부드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두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 여자의 두 눈에서는 지혜로움이 느껴졌고 그 시선을 본 설기웅은 뭔가에 찔릴 듯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그는 몸을 추스른 후에야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설기웅은 그 눈이 매우 익숙하여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잠깐 밀려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사진 속의 여자는 지금의 어머니인 나미선과 전혀 닮지 않았다.나미선은 주부에 길들여진 여자처럼 평생 가족만을 바라보며 살았다.그러나 사진 속 여자의 눈에는 뭔가 아주 큰 것이 담겨 있었다. 야망이 느껴지면서도 포부도 보였고 마치 세상을 꿰뚫어 보는 듯한 통찰감도 느껴졌다.투명하면서도 세속적인 눈빛이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막상 만나보면 겁먹고 뒤로 물러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설기웅은 잠깐 바라보다가 천천히 사진을 설의종의 손바닥에 다시 올려놓았고 그렇게 사진은 그의 손에서 원래의 자연스러움을 되찾았다.설인아의 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 수 없는 괴로움이 밀려온 설기웅은 모든 걸 뒤로하고 설씨 가문에서 잠을 잤다.깨어났을 때 그의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30통 이상 있었는데 모두 설인아에게서 온 것이었다.그는 재빨리 전화를 걸었고,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설인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오빠, 어젯밤에 안 들어왔지? 난 눈을 감을 때마다 그 남자들의 얼굴이 아른거려. 예전에 알던 사람한테서도 그 영상들을 받았어. 흑흑... 왜 사람들 다 그 일을 알고 있는 거지? 도대체 영상은 누가 찍은 거야? 설마 성혜인 씨 아닐까? 플로리아에서 내쫓고 싶어서 일부러 날 망가뜨린 거잖아. 미워, 정말 미워죽겠어. 왜 아직도 안 죽는 거지? 저런 인간은 죽어도 싸다니까?”설기웅은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단호함이 박힌 그 말을 들은 설기웅은 꼼짝도 못 하고 문 앞에 서 있었다.그렇게 몇 분 후,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하늘은 우중충하게 변했다.사람의 감정은 날씨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던 설기웅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차 한 대를 발견했다.차가 멈춘 후 설우현이 모습을 드러냈고 곧이어 반승제와 성혜인도 함께 내려왔다.성혜인을 본 설기웅은 온몸의 가시를 곤두세웠다.“여기가 어디라고 와? 죽고 싶어?”성혜인은 반승제 옆에 서 있었다. 우산을 들고 있던 반승제는 행여나 그녀가 비를 맞을까 봐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있었다.“형!”설우현은 혼자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이대로 떠날까 봐 걱정하는 듯 안절부절못했다.“형, 제발 그만 좀 해요!”설기웅의 얼굴은 매우 싸늘했다.“우현아, 넌 도대체 왜 저런 여자를 설씨 가문에 데려온 거니? 우리 집이 더러워져도 된다는 거야?”설우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해다.“일단 아버지 만나러 올라가요. 형, 아무리 이 상황이 불편하더라도 제가 아버지한테 말하려는 게 뭔지 듣고 가세요.”설기웅은 온몸으로 화를 내뿜었다. 그는 성혜인뿐만 아니라 반승제마저 원망하고 있었다.바람둥이 반승제 때문에 설인아가 이렇게 비참한 처지가 됐으니까.‘인아가 설마 반승제를 만나려고 그레이 지대에 갔던 건가? 빌어먹을! 쟤네가 우리 인아를 망쳐버렸어.’“아무 말도 안 듣고 간다면 전 이제부터 형이랑 연을 끊을 거예요.”예상치 못한 협박에 잔뜩 긴장한 설기웅은 어쩔 수 없이 분노를 억누르며 그들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성혜인도 설기웅이 짜증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반승제가 옆에 있어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됐지만 설기웅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한 무리의 사람이 설의종 옆으로 다가가자, 도우미들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반승제는 백발이 된 설의종을 보고 순간 깜짝 놀랐다.비록 설우현을 통해 들은 얘기였지만 직접 보니 더 충격적이었다.심지어 성혜인조차도 놀라서 눈살을 찌푸렸다
성혜인은 설기웅을 상대하지 않고 조용히 나미선을 바라봤다.닮았다. 성격은 다른 것 같지만 너무 닮았다.하지만 임지연이라면 절대 이런 말투로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고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을 것이다.임지연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항상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인생을 살면서 성혜인은 자신을 바라봤던 임지연의 눈빛을 수없이 떠올리며 힘을 받았고 그 힘으로 버티면서 살아왔다.그렇다면 눈앞의 이 여자는 누구일까?왜 설씨 가문 사모님인 임지연과 똑같이 생겼을까?설기웅은 두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는 걸 보고선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여기! 들어와서 당장 저 두 사람 끌어내. 우현아, 생각이 있다면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마.”참다못한 설우현은 옆에 있던 꽃병을 집어 들고 바닥으로 내리쳤다.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 퍼졌고,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소란 피우는 건 형이잖아요!”그는 성큼성큼 설기웅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설기웅, 너 지금 누굴 내쫓으려고 하는지 알아? 누구한테 독설을 퍼붓는지 알긴 하냐고! 어젯밤 누굴 때렸고 누굴 죽이려고 했는지 아냐고! 두 눈 뜨고 똑바로 봐. 이게 아버지랑 성혜인 씨 친자 확인서야. 설기웅, 정신 차려! 네가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게 누구인지 이제 알겠어?”설기웅은 머리에 친자 확인서를 맞고선 순간 넋을 잃었다.종이 쪼가리는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고 설우현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발로 걷어찼다.“혜인이가 살아온 인생은 임수랑 똑같았어. 누군가에게 이용당한 임수아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고. 어차피 죽었다면 더 이상 안 찾을 거잖아. 혜인이가 우리의 여동생이야. 살아있었다고. 형이 우리 동생을 죽이려고 했어. 어젯밤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어떻게 혜인에게 이 진실을 털어놓을까, 어떻게 하면 상처를 받지 않을까 계속 고민했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차마 용기가 안 나
설기웅은 아직도 친자확인서를 보고 있었는데, 마치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설우현이 했던 모든 말이 귀에 박혔고 고막이 아팠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이는 설우현이 밤새 부탁하여 간신히 얻어낸 친자확인서일 뿐만 아니라 결과가 나올 때까지 두 눈 부릅뜨고 자리를 지켰던 터라 조작할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성혜인은 명실상부 설씨 가문의 아가씨이자 그들의 친동생이다.설기웅의 손끝은 마치 종이를 파고드는 것처럼 천천히 조여졌다.눈앞은 캄캄해졌고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설우현은 심호흡 하고선 잔뜩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래도 인아가 나쁜 짓하는 걸 감싸줄 생각이라면 더 이상 저도 할 말이 없네요. 이게 우리의 업보겠죠? 승제 씨랑 잘 만나고 있는 걸 빤히 알면서도 망치려고 했었는데 참 아이러니하네요. 혜인이가 우리 동생이라는 게. 안 그래요?”설우현은 이 상황이 그저 우스웠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스스로를 억제했지만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제원에 있을 때 한 짓만으로도 충분히 어리석었는데, 설우현은 플로리아에 와서도 성혜인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미쳐있었다.어젯밤 만약 그들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했더라면 설기웅은 자기 여동생을 익사하게 만든 장본인이 된다. 즉 성혜인이 영원히 눈을 감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그가 한 이 모든 것들이 그저 가짜 여동생을 위한 일이라니 얼마나 우스운가.설우현은 심호흡하고 핸드폰을 꺼내 설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설인아는 설우현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보고 몇 초 동안 망설였지만, 끝내 전화를 받았다.“인아야, 너 도대체 형한테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거지?”설인아는 아직 그들이 성혜인의 신분을 알아냈는지 몰랐기에 말 한마디가 아주 조심스러웠다.“오빠, 사과하려고 연락한 거 아니야? 어젯밤에 오빠 때문에 하마터면 죽을뻔했는데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가 그동안 오빠를 얼마나 좋아했는데...”“혜인의
몸을 돌린 설우현은 마침 넋을 잃은 성혜인과 눈이 마주쳤다.성혜인은 이제 방금 자신의 신분을 알았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반승제를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비록 손이 꽉 조여 아픈 느낌이 들었지만 반승제는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그녀를 품에 안고선 가볍게 등을 토닥여주었다.성혜인의 머릿속은 마치 온 세상이 뒤집어진 듯 뒤죽박죽이 되었다.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설우현은 잔뜩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혜인아, 이제야 말해줘서 미안해.”성혜인은 사실을 부정하며 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섰고 그 모습을 본 설우현은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아버지랑 몇 마디 얘기해. 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하룻밤 새에 백발이 되셨거든. 그리고 인아 일로 충격을 받아서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성혜인의 발은 마치 무언가에 의해 바닥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그동안 설의종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기에 더군다나 ‘아버지’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백발이 가득한 설의종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혈연관계는 참 묘한 것이다. 순간 가슴에 불을 지른 듯 뜨거워진 성혜인은 다른 걸 고민할 겨를도 없이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설의종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놀랍게도 설의종은 이때 다시 눈을 떴다.설우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랴부랴 눈물을 닦고선 입을 열었다.“아버지, 임수아는 가짜였어요. 혜인이가 진짜 딸이에요. 진실을 밝혀냈고 드디어 여동생을 찾았어요.”설의종은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성혜인의 얼굴을 보려고 있는 힘껏 눈동자를 움직였다.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의 의식이 남아있어 설우현이 하는 말을 똑똑히 듣기에 충분했다.딸, 그의 딸이 돌아왔다.설의종은 감격에 겨운지 안면근육이 덜덜 떨렸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한마디를 할 수 없었다.한때 수백 명을 휘두르던 사람이 오랫동안 찾고 있던 딸아이 앞에서 이렇게 무력하다니.설우현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