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면 강이한은 스캔들이 나기 전까지는 꽤 모범적인 남편이었던 것 같았다. 저녁에 중요한 미팅이 있지 않은 이상은 꼬박꼬박 집에 돌아왔고 술자리가 있다고 해도 밤 열한 시를 넘기지 않았다.그래서 유영도 그의 시간에 맞추다 보니 항상 열한 시 전에는 잠을 잤던 것 같았다.그러다가 갑자기 밤을 새우니 몸이 적응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삐걱거렸다.휴식실로 들어온 유영은 담요를 몸에 두르고 의자에 허리를 기댔다.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조민정이 넌지시 말했다.“소은지 씨네 집에서 빨리 나오는 게 좋겠어요.”“알아요.”조민정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이미 소은지에게 신세를 많이 지고 있었고 그녀의 생활에도 엄중한 피해를 끼치게 되었다. 3개월 전에 바로 소은지네로 가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데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저쪽에서 끈질기게 공격해올 줄은 몰랐다.강이한에게서 전화가 왔다.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남자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도 집에 안 들어갔어?”“돌아간다고 한 적도 없잖아.”“소은지가 언제까지 당신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혼자서 그 많은 여론과 악플러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장 집으로 들어가!”남자가 협박 조로 말했다.아마 소은지네 집으로 택배가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하는 얘기 같았다.유영은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3개월 전에 내가 경찰에 신고해서 그 사람들을 다 잡아넣었더니 그들과 합의를 보고 풀어준 사람이 당신이야. 지금 나랑 그런 얘기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 또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우길 거야?”“이유영!”“시끄러워. 소리 그만 질러.”유영도 같이 짜증을 냈다.강이한이 그들을 풀어준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고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정말 걱정해서 전화했을까?그건 아닐 것이다.“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닌 거 알잖아.”남자가 구슬리듯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얌전히 집으로 돌아가. 조 비서 그쪽으로 보낼게.”“나 지금 회사에서 야근 중이야.
여직원은 바로 유영을 안으로 안내하고 따뜻한 차를 끓여 대접했다.“이거라도 마시고 몸 좀 녹여요.”“감사해요.”유영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조민정의 차를 타고 미리 왔는데 임시로 일이 생겨 조민정 먼저 가버리고 그녀만 남아서 기다리게 된 것이다.오래 기다린 건 아닌데 너무 얇게 입고 온 탓인지 추위에 온몸이 떨렸다.강이한과 함께 생활하며 겨울에 바깥 출입이 적어서 밖에 얼마나 추운지 몰라서 생긴 해프닝이었다.유영은 다음에는 꼭 두껍게 입고 나와야겠다며 스스로 다짐했다.“사실 이렇게 일찍 올 필요가 없어요. 대표님은 아홉 시 다 돼서 나오시거든요. 가끔 일정이 틀어지면 더 늦어질 때도 있어요.”“쿨럭!”차를 마시고 있던 유영이 화들짝 놀라며 기침했다.“괜찮으세요?”직원이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아… 괜찮아요.”그녀가 기억하는 기업인들은 아주 일찍 출근했다. 강이한은 매일 아침 여덟 시 전에 집에서 출발하고는 했다.그래서 그와 함께 생활하는 동안은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해야 했다.강성건설 대표가 아홉 시가 넘어서 출근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와 결혼한 여자는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한 시간 정도 더 기다릴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박연준은 여덟 시 반이 되어 회사로 나왔다. 상사를 마주한 여직원은 바로 공손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대표님, 나오셨어요?”“이유영 씨?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박연준의 뒤를 따르던 문 비서가 그녀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유영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박연준은 서늘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냉랭한 분위기에 유영은 준비했던 멘트조차 잊어버리고 우물쭈물했다.조금 전까지 그와 결혼한 여자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표정을 보니 생각이 바뀔 것 같았다.너무 진지하고 냉랭해서 평소에도 잘 웃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아니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유영은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유영 씨? 이유
잠시 후, 유영은 다시 대표사무실을 찾았다.그녀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전에 강이한이 직원들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많이 봤기에 그런 기분을 충분히 이해했다.물론 박 대표와는 직장 상사와 직원으로 만난 건 아니지만 첫 거래부터 퇴짜를 놓으면 많이 속상할 것 같았다.남자는 긴 손가락으로 설계 도안을 한페이지씩 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유영의 숨결도 같이 거칠어졌다.역시 안 되는 건가?그런데 한참 도면을 뜯어보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생각했던 것보다는 잘 그려줬네요. 아마 어제 내가 이유영 씨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군요.”“저… 정말요?”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에서 큰 돌덩이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제 자신이 그에게 남긴 첫인상이 영 별로였다는 얘기로 들렸다.“밤새 고민을 많이 한 티가 나요. 하지만 일부 디테일한 부분은 수정이 필요하겠네요.”“말씀해 주신대로 수정할게요!”유영은 희망적인 박연준의 답변에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대체적으로 서늘한 분위기를 주는 인상이지만 그 잘생김은 어딜 가지 않았다. 그는 꽤 미남형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유영은 부담스러운 시선에 고개를 숙이고 그가 지적했던 부분을 메모에 적기 시작했다.너무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에 오히려 박연준이 지적하기 미안해질 정도였다.남자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도면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는 신속히 수정해야 할 부분을 빨간색 펜으로 체크한 뒤, 그녀에게 건넸다.“여기 체크한 부분이 좀 별로네요. 전반적인 느낌은 나쁘지 않은데 디테일한 부분에서 점수를 깎아먹는 느낌이에요.”유영은 도면을 받아 다시 살폈다.박연준은 아주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녀가 놓쳤던 디테일을 하나하나 지적해냈다.‘역시 큰일을 하는 사람은 다르구나.’“어떤 식으로 수정해야 할지도 알려줘야 하는 건 아니죠?”“네, 그럴 필요까지
아침부터 유영을 강성건설로 보낸 이유도 여기 있었다.디자인에 참여한 사람만 알 수 있는 문제라 유영이 가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저는 회의하고 올 테니까 유영 씨는 좀 쉬고 있어요.”유영은 긴장이 확 풀리자 지친 기색이 확 드러났다.“알겠어요.”그 시각, 강이한은 사무실에서 온갖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세강의 디자인 팀은 업계 최고 엘리트들만 모아놨다고 평가 받고 있는데 그런 그들마저 오너의 까다로운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없었다.강이한은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디자인 구상이 보이지 않았다.이때, 조형욱이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들고 사무실을 찾았다.“사모님은 스튜디오에 취직한 게 아니라 스스로 스튜디오를 창설하셨더라고요.”강이한의 두 눈이 서슬퍼렇게 빛났다.그가 너무 아내를 얕잡아보았던 걸까?“그럼 모든 회사에 공개 입장을 보내서 그쪽 스튜디오에 일감을 주지 말라고 해.”언제까지 버티나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다.최근 보여준 그녀의 행보를 생각하면 지금도 짜증과 분노가 치밀었다.그의 가족들에 대한 태도도 그렇고 집에서 나간 뒤로 그와 완전히 선을 긋겠다는 그 당돌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10년이라는 시간이 이토록 허무했었나?그는 한 번도 자신과 유영 사이에 이토록 깊은 감정의 곬이 생길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다른 회사는 괜찮은데 강성건설 쪽은 그런 협박이 먹히지 않을 것 같네요.”조형욱이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입장을 표명했다.박연준!강이한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학교 때부터 그의 최대의 라이벌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회사의 오너가 된 시기도 비슷하고 두 회사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물밑 경쟁을 치러왔다.동교 신도시 프로젝트의 입찰에 참여한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이번에도 사실 상 세강과 강성의 경쟁이었다.그리고 그의 아내인 유영이 박연준과 손을 잡는다면 여론이 또 어떻게 떠들어댈지 훤히 보였다.강이한은 지친 듯, 눈을 감았다.그의 주변으로 섬뜩한 살기가 요동치고 있었다.“박연준 쪽은 일단 신경 쓰지 마.
이어지는 이틀 간, 유영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팀원들과 함께 강성건설 근처의 커피숍으로 가서 작업하기로 했다. 조민정은 호기롭게 커피숍 전체를 이틀 간 세내고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팀원들에게 조용하고 안정적인 작업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 위한 노력이었다.이번 수정만 제대로 끝나면 유영은 최종 도면을 가지고 강성건설을 방문할 예정이었다.만약 또 수정할 부분이 생기면 커피숍이 근처라 바로 돌아와서 수정하기도 편리했다.처음 도면을 가지고 방문했을 때, 유영은 박연준이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정 횟수가 반복되면서 그가 얼마나 까다로운 상대인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전보다 더 이상한 것 같은데요? 그리고 여기랑 여기도 수정해 주세요.”남자가 설계 도면을 그녀에게 넘기며 말했다.유영은 점점 더 숨이 막혀왔다.오늘 밤이 아마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았다.내일 아침까지 마음에 드는 설계 도면을 내놓지 못한다면 강성과의 계약은 물 건너 갔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랬기에 더욱 간절했다.강이한이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면 일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유영이 커피숍으로 돌아가자 팀원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던 조민정조차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다시 수정하라고 하네요.”유영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자리로 돌아갔다.조민정이 다가와서 말했다.“너무 낙담하지 말아요. 새로 생긴 팀이라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더 성장할 수 있어요.”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일 아침까지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시작 자체가 더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역시 이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어요. 여기부터 수정하죠.”유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녀는 지금 머리가 지끈거리고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다.하지만 상대는 강성건설이라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조민정은 고개를 끄덕인 뒤, 회의를 소집하고 함께 수정해야 할 부분을 짚어나갔다.직장 경험이 부족한 유영은 번번이 퇴짜를 맞는 상황이 오자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하
“타.”차가운 목소리가 유영의 잡념을 깨웠다.그녀는 차 앞으로 다가가서 썼다.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남자의 비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벌써 며칠 째 이 난리를 피우는 거야? 아직도 포기 못하겠어?”이 남자는 시비를 걸러 온 게 분명했다.유영의 실력이 마냥 형편없었더라면 컨택을 받지도 못했을 텐데도 그는 당연히 그녀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유영은 숨을 가다듬고 차갑게 말했다.“난 쉽게 포기란 거 안 해. 물론 포기하면 다시 뒤돌아보는 법도 없지.”그에게 실망했다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었다.요즘 여론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와 강이한의 상황을 다루었다.옛날에는 그에 관한 기사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보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여론에서 뭐라고 떠들어대든,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착실히 하고 싶었다.그녀에게 지금 중요한 건 자신에 대한 외부 평가가 아닌, 강성건설과의 계약 체결이었다.그녀의 쌀쌀맞은 태도에 남자의 얼굴이 구겨졌다.“타.”“나 오늘 많이 바빠.”“아직도 모르겠어? 박연준은 처음부터 당신이 설계한 그 쓰레기를 채택할 생각이 없었던 거야!”유영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쓰레기를 쳐다보는 듯한 싸늘함이 담긴 눈빛이었다.그와 오랜 시간 함께 보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그녀를 폄하한 건 처음이었다.변한 건 그녀뿐이 아니었다.강이한 역시 변했다.“당신은 물론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박 대표님은 수정할 기회라도 주셨어.”그랬다.중요한 건 기회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강이한은 예전에도 그녀에게 출근하지 말라고만 했지 한 번도 그녀의 실력을 제대로 알아준 적도, 실력을 증명할 기회를 준 적도 없었다.디자이너로서 까다로운 업계의 평가는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맹목적으로 자신을 깔아뭉개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유영은 서서히 굳어가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내 디자인 실력이 쓰레기 수준이라는 걸 일부러 알려주려고 온 거라면 이
유영에게 거절당한 강이한은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전문 디자이너들이 설계한 방안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조 비서.”“네,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조형욱이 물었다.커피숍을 떠난 뒤, 그는 목적 없이 시내를 돌고 있었다.매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강이한의 저기압도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운전기사나 조형욱은 빨리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퇴근하고 싶었다.계속 이러다가 주변 사람들이 더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병원으로 가지.”한참이 지난 뒤에야 남자가 말을 꺼냈다.하지만 조형욱이나 운전기사의 얼굴 표정은 예상했던 것처럼 편하지 않았다.매번 병원에 다녀온 뒤로 강이한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늘도 평소와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병원에 도착하자 조형욱은 강이한을 따라 병실로 올라갔다.한지음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로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과 넋을 잃은 것 같은 표정은 보는 사람의 보호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왔어요?”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강이한을 불렀다.누구와는 다르게 듣고 있어도 기분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였다.강이한이 잠깐 넋을 놓고 바라만 보고 있자 한지음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에는 제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서 주제넘은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본인이 끝까지 사과를 거부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해요.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유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강이한 입장에서는 과분한 요구가 아니었기에 당연히 사과를 받고 싶다는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는데 유영이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울 줄은 몰랐던 것이다.사과는 고사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꼴이라니!잘못을 했으면서도 뻔뻔하게 자신을 떠나려는 모습에 강이한도 화가 많이 났었다.그런데 한지음이 사과는 됐다고 하니 오히려 그녀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죄책감이 더 커졌다.“지음아.”강이한이 긴 한숨을 쉬며 그녀를 불렀다.전보다는 다정한 목소리에 한지음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흰 붕대가 눈을 가리고 있어 눈빛을 볼 수
그녀는 거대한 감정을 억누르는 듯이 한참 숨을 고르고는 계속해서 말했다.“다음에 또 비슷한 상황이 생긴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이번에는 대표님을 봐서 참고 넘어갈게요.”이대로 용서한다고?오히려 당황한 건 강이한이었다.“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강이한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의사와 간호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들은 강이한을 보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강 대표님, 한지음 씨는 안정을 취해야 해서 이제 그만 나가주셔야 합니다.”“그러죠.”자리에서 일어선 강이한이 한지음에게 말했다.“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지금은 회복에만 집중해. 모든 건 내가 알아서 할게.”지켜준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었다.한지음은 예쁜 미소로 그에게 회답했다. 보고 있어도 저절로 힐링이 되는 미소였다.강이한은 의료진을 따라 밖으로 나오고 조형욱이 그 뒤를 따랐다.강이한이 물었다.“염증 때문에 고생한다고 들었는데 후유증은 없겠죠?”“위험한 수준입니다. 사실 지금은 수술이 시급해요.”의사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강이한은 또다시 막막함을 느꼈다.두 번이나 응급수술을 받으면서 이미 한지음의 상태는 눈에 띄게 안 좋아져 있었다.매번 의사를 만나면 이식 수술이 시급하다고 하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매번 재촉하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지만 시력을 회복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어요. 지금 시기를 놓치면 더 이상 광명을 되찾기 힘들지도 모릅니다.”강이한은 할 말을 잃었다.“물론 수술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죠. 하지만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포기하기엔 나이가 아깝잖아요.”“알겠습니다.”강이한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옆에서 듣고 있던 조형욱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기증자를 찾는 일은 그가 담당하고 있었기에 상황이 얼마나 시급한지 조형욱 역시 알고 있었다.하지만 무조건 산 사람의 망막을 이식해야 하는 일인데 아무리 돈이 중해도 누가 선뜻 자신의 망막을 내놓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