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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병원에 가면 틀림없이 임신 사실을 들키게 될 테니, 심윤아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우스꽝스럽게도 심윤아는 아이의 존재를 끝까지 숨기고 싶었다.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심윤아는 진수현에게 가짜 결혼을 승낙하던 순간에 이미 소위 말하는 자존심 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한다는 현실을 깨달았었다.

사랑하는 사람인 진수현 앞에서 그녀가 무슨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었을까? 하지만 아이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그동안 내려놨던 자존심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심윤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자존심을 내려놓은 지 오래됐다고 해도 존엄까지 잃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할 순 없었다.

진수현은 그녀의 말을 들은 후, 눈살을 한껏 찌푸리더니 갑자기 핸들을 꺾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심윤아는 진수현의 돌발행동을 보고 당장 차에서 내리라는 줄로 알고 손을 뻗어 차 문을 열려고 했다.

“딸깍!”

순간 차 문이 잠겼고 진수현은 백미러를 통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병원에 안 가려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어젯밤 비를 맞고 돌아온 이후로 진수현은 심윤아의 행동이 수상하게 느껴졌다.

심윤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정말 아파 죽을 정도라면, 내가 병원에 가려고 했을 거야.”

진수현은 실눈을 뜨고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자 강소영이 끼어들었다.

“수현 씨, 나 때문인 거 같아. 난... 여기서 먼저 내릴게. 윤아 씨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와.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윤아 씨 상태가 아주 위태로워 보여.”

말을 마치고 강소영은 몸을 진수현 쪽으로 기울이며 차 문의 잠금 스위치를 누르려고 했다. 그러자 진수현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제지했다. 그렇게 심윤아는 두 사람의 살결이 맞닿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진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심윤아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강소영을 보고 말했다.

“딴소리하지 마, 네 탓 아니야.”

강소영은 진수현의 손에 잡힌 자기 팔목을 쳐다보며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심윤아는 말없이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볼 뿐이었다.

강소영과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 시선을 거두었다.

“윤아 씨, 제가 오해했나 봐요. 저 때문에 윤아 씨가 수현 씨에게 투정을 부리는 건 줄 알았어요. 정말 미안해요.”

심윤아는 강소영을 힐끔 쳐다보았다.

강소영이 과거에 심윤아를 도와준 적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심윤아는 그녀가 곰의 탈을 쓴 여우가 아닐지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강소영은 심윤아에게도 은인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녀는 내키지 않았지만,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때, 강소영이 웃으며 말했다.

“병원에 가기 싫은 이유가 혹시 병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요? 제 친구 중에 귀국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스스로 작은 클리닉을 차린 친구가 있거든요. 거기로 가볼래요?”

말을 마치고 강소영은 진수현을 바라보았다.

“수현 씨, 어떻게 생각해?”

진수현은 즉시 승낙하지 않았고 한참 지나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클리닉? 믿을 만한 곳이야?”

강소영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믿을 수 없는 곳이라면 내가 어떻게 윤아 씨에게 추천하겠어? 수현 씨, 설마 나를 못 믿는 거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네 친구가 운영하는 클리닉으로 가자.”

심윤아는 눈썹을 찡그렸다.

“나는...”

순간, 진수현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았고 전방을 향해 돌진했다. 심윤아의 의사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강소영은 여전히 옆에서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윤아 씨, 걱정하지 말아요. 제 친구는 성격이 아주 싹싹하고 환자를 대할 때도 엄청 친절하다고 소문이 났어요. 제가 미리 언질 줄 테니, 더 잘해줄 거예요. 불편한 점 있으시면 얼마든지 얘기해도 돼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라고 한다면, 강소영은 한없이 상냥하고 친절하다고 할 반면, 심윤아는 제멋대로 굴기만 하는 고집불통이 따로 없다고 할 것이다. 열이 펄펄 끓을 정도로 나고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생떼를 부리고 있다고만 생각할 테니 말이다.

이 상황에서 심윤아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심윤아는 질주하는 차에 몸을 싣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진료소에 도착한 후, 강소영이 심윤아를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어때요? 아직도 머리가 아프면 제 어깨에 기대요.”

강소영은 가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고 몸에서 은은한 꽃향기를 풍겼다. 그녀는 일거수일투족이 가볍고 여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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