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군형이 멈칫했다. 등 뒤가 서늘해졌다.여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아이참, 군형 씨, 우리 가게에 있기엔 참 아까워요!”“그게... 무슨 말이에요?”최군형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강소아가 최군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누구는 외동딸이라 재산을 모두 물려받을 건데! 하, 정말 좋겠어요, 그렇죠?”“이...”키가 제 가슴께밖에 안 되는 강소아 앞에서 최군형은 조금도 움직일 염을 하지 않은 채 초등학생처럼 얌전히 꾸중을 들었다. 하지만 질투하는 강소아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질투하는 강소아가 좋았다.최군형이 씩 웃었다. 그 모습이 강소아를 더욱 자극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손에 든 도시락을 꽉 쥐었다. 어찌나 힘껏 쥐었는지 손가락 끝이 하얘졌다.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갔더니 최군형이 혼자 가게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혼자 밥도 잘 챙겨 먹지 못할 최군형이 걱정돼 밥을 싸 들고 가게로 달려왔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강우재도 이 정도의 대우는 해 주지 않았다.그런데 가게 문 앞에서 뭘 봤나?우미자가 제 딸과 최군형을 이어주려고 수작 부리는 모습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어떻게 이럴 수가!강소아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이 일이 최군형 때문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이웃 아줌마들이 최군형을 자기 집으로 들이고 싶어 호시탐탐 그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하지만...그녀는 기분이 나빴다. 짜증이 났다. 어쩔 수 없이 질투하게 됐다.다른 사람은 왜 그녀의 남편을 노리는 걸까?그 아줌마들은 아직 강소아와 최군형이 가짜 결혼인 줄 몰랐기에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만약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녀의 집에 쳐들어와 최군형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최군형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짜증이 났다. 잘생기긴 왜 이렇게 잘생겼어? 괜히 이목만 끌잖아!최군형은 잔뜩 토라진 강소아의 얼굴을 서서히 가까이하고는 그녀 손에 든 도시락통을 보고 살짝 웃었다.“밥 갖다주러 온 거에요?”강소아가 눈을
그날 밤 최군형은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다. 강소아는 아직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지만 그녀의 관심은 온통 다른 데 쏠려 있었다.최군형은 평소처럼 집에 들어와 신발을 바꿔 신고는 텅텅 빈 도시락통을 주방으로 가져가 여유롭게 씻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는 사람 같았다. 심지어 도시락도 싹싹 비운 채였다.강소아는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 앉아 최군형이 자신을 달래러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뒤 주방의 물소리가 끊기더니 최군형이 손을 닦으며 걸어 나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강소아는 기분이 조금 풀렸다. 금방 웃음을 지으려는데, 최군형이 불쑥 말했다.“아직도 화났어요?”‘아예 멍청한 건 아니네.’강소아가 볼 부은 소리로 “네”하고 대답하고는 얼굴을 홱 돌렸다. 최군형이 목을 가다듬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얼굴이 순간 따뜻해 보였다. 제법 진지한 모습이었다.“그... 얘기 좀 할까요?”강소아가 멍해졌다. 웃음기를 누르기 어려웠다. 머릿속은 온통 드라마에서 본 장면들뿐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화가 나 있으면 남자 주인공은 자존심 다 버리고 여자 주인공을 달랬다. 달래는 방식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뭐 그런 건 상관없었다. 최군형은 어떻게 달랠까?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썩 낭만적인 모습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꿀 발린 소리 몇 마디만 한다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니, 행동으로 그녀의 화를 풀어줄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강소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귀 끝이 타는 듯 뜨거웠다. 그녀는 애써 자기 생각들을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했다.“네, 좋아요. 말해봐요. 듣고 있을 거니까.”“왜 화가 났는지 알고 있어요. 미자 아줌마가 저와 말하는 걸 들었죠?”“네...”“제 판단이 맞다면, 아줌마 외동딸은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거지만 우리 집의 모든 재산은 소준 씨가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겠죠. 아줌마가 저를 설득해 이 집을 떠나게 할 거로 생각했을 거고요. 맞죠?”강소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최군형은 진지한
“뭐? 못 찾았다고?”구봉남이 깜짝 놀라 물었다. 구성 그룹의 CCTV 시스템은 업계 안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각종 수단을 동원해 직원들을 감시하는 것은 그룹 내부의 비밀이었다.이런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많은 직원들은 감히 맞서려 하지 못했다.그런데 이런 수단이 최군형에게는 쓸모가 없어졌다니?구봉남이 진정하고는 계속해 물었다.“왜... 못 찾는 건데?”“먼저 최군형의 입사 날짜를 찾고, 그 날짜에 근거해 모든 CCTV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구성 그룹에 온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가 운전하는 트럭도 조사했는데, 추적기가 고장 난 상태였습니다. 최군형은 그 차 말고는 다른 차를 운전해 본 적도 없어요. 그래서...”구봉남은 더는 못 듣겠다는 듯 낮은 소리로 으르렁댔다.“쓸데없는 놈들!”부하는 제 잘못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푹 떨구고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 더듬거리며 말했다.“저... 사실은...”“사실은 뭐?”구봉남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최군형의 행적은 찾지 못했지만, 다른 사실을 알아냈습니다.”“말해.”“오성 최상 그룹의 큰아들 이름도 최군형입니다!”“그러니까, 이 최군형이 그 최군형이라고?”구봉남이 멈칫하더니 인상을 쓰고 말했다. 부하가 머쓱하게 웃었다.“그런 건 아니지만, 이름이 같으니 정말 아는 사이 아닐까 하고요!”구봉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화가 욱하고 올라온 듯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 부하에게 집어던졌다.“최군형 세 글자를 맡아두기라도 했어? 온 세상에서 한 명만 쓸 수 있는 거야?”“아닙...”“오성에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그깟 동명이인 찾기가 어려워?”부하가 황급히 뛰쳐나갔다. 구봉남은 그제야 의자에 앉아 넥타이를 풀고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이것들 때문에 정말 미치겠다...전과자인 트럭 기사가, 심지어 결혼도 한 사람이, 어떻게 최상 그룹 도련님과 어깨를 나란히 한단 말인가?구봉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냉정히
형님의 계속된 경영 실수로 인해 구성 그룹은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가 버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구성도 없을 터였다.하필이면 이때 음료수 문제가 터졌다. 겨우 이를 수습했더니 구자영이 또 사고를 쳤다...구봉남은 더 이상 남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그가 정말 도련님이라면...”혼잣말을 웅얼거리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이어 그는 핸드폰을 들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난번 그 호텔에 방 좀 잡아줘. 그리고 무슨 수를 쓰든 강소아를 불러나와... 아, 됐다. 내가 직접 부를게.”구자영 일 때문에 강소아는 구씨 가문의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가는 편이 더 좋을 것이었다.구봉남은 전화를 끊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거울을 보고 머리를 정리하며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오성.최군성은 병원에서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힘겹게 걷고 있었다. 그는 귀와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 전화기 저편의 최군형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나 진짜 짜증나... 엄마 아빠는 집에서 서로에게 푹 빠져서 난 안중에도 없어. 지난번에 엄마가 달걀부침 먹고 싶다고 하니까 바로 해준 거 있지. 대여섯 개는 만들어서 골라 먹으라고 했다니까! 내가 하나만 먹자고 해도 안 줬어! 주 씨 아줌마한테 해달라고 하라면서!”최군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주 씨 아줌마가 한 게 뭐 어때서? 우리 어릴 때부터 주 씨 아줌마가 밥 해주셨잖아.”“그거랑 그거랑 같아?”“그리고... 엄마 아빠가 애정 표현하시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그냥 그걸 보기가 싫어. 그래서 아이들이 갖고 노는 망치 풍선으로 한 대 때리려고 했지. 그런데 때리지도 못했어!”최군형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최군성은 망치 풍선으로 둘을 때리려다 아빠에게 반격당한 것이었다.최연준은 오랫동안 무술을 연마한 덕에 기척을 잘 읽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아직 예민했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니 등 뒤의 인기척을 읽었을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최군형의 마음속에 의심이 피어올랐다.입원 병동?육소유는 육씨 가문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모든 게 낯설 텐데, 병원에는 왜 왔을까? 어디 불편한 곳이 있나, 아니면 병문안인가?병문안이라면, 누구 보러 온 건가?그의 친부모인 육경섭과 임우정을 제외하고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이 더 있다는 건가?최군형이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서늘해졌다.최군성은 상처를 입었기에 계속 쫓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형, 일단 여기까지 말할게. 나, 나 조금만 더 가면 따라잡을 것 같아... 걱정하지 마. 이번엔 꼭 성공하고 말 테니까.”“응, 너도 조심하고.”최군성이 짧게 대답하고는 급히 통화를 종료했다. 발목이 시큰거렸지만 원래 몸이 튼튼했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육소유는 보폭이 작고 걸음이 느렸기에 최군성은 금방 그녀를 따라잡았다.육소유는 조금 무서운 듯한 얼굴로 몇 걸음마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뒤돌아볼 때마다 최군성은 벽 뒤에 숨거나, 다른 환자 뒤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입원 병동 3층까지 걸어갔다. 최군성이 등 뒤에서 서서히 그녀에게 접근했다.“아!”육소유는 창백한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최군성도 깜짝 놀라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땅에 넘어질 뻔했다.육소유는 손을 뻗어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최군성이 그 손을 잡기도 전에 육소유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녀의 눈빛이 복잡해졌다.결국 그녀는 한편에 선 채 등을 벽에 붙이고 놀란 마음을 달랬다. 방금 습관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는데 커다란 무언가가 몰래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끌어당기려고 했다!반응이 빨랐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육소유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헉헉거리며 눈을 크게 뜨고 최군성을 쳐다보았다.“저... 저 미행한 거예요?”“네?”최군성은 지팡이를 꽉 쥐었다. 방금 넘어질 뻔했을 때 발목을 잘못 움직이기라도 한 건지 다친 곳이 욱신거렸다.부축도 해주지 않는
최군성은 병원에서 겪었던 이상한 일을 전부 최군형에게 들려주었다.최군형은 듣자마자 알아채 곤 차갑게 피식 웃었다.“소유는 아마도 아저씨의 통제를 받는 것 같아. 허,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소유가 납치됐던 일에 육명진이 분명 연관이 있을 거야!”“만약 사실이 아니라면?”최군성이 계속 말을 이었다.“그럼 이 모든 일의 배후엔 육명진이 있었다는 거잖아!”“일단 이 일에 대해 누구한테도 이야기하지 마.”최군형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우린 아직 명확한 증거가 손에 없을 뿐 아니라 그리고... 경섭 아저씨랑 우정 아주머니의 기분도 고려해야 해. 두 분은 이미 딸을 찾은 거라고 믿고 계시잖아. 명확한 증거를 손에 넣기 전까지 우리는 두 분의 행복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어.”“응, 알겠어... 형, 지금 육명진은 분명 우리를 경계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이 일을 조심히 알아봐야 해!”“흠흠, 우리가 아니라 너만.”최군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다리가 다 나으면 다시 뒷조사하든 알아보자고. 절룩거리는 모습으로 뭔가를 캐내고 다닌다면 눈에 문제가 있지 않은 한 누구라도 수상하다는 걸 눈치챌 거니까.”최군성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치, 진짜로 요즘에 돌아올 생각 없는 거야? 나 발도 다쳤는데 정말로 나 보러 안 올 거야?”“너 보러... 가서 뭐해?”“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동생을 사랑하기는 하는 거야? 내가 정말로 형 사랑하는 친동생이 맞아?!”동생의 투덜거림에 최군형은 힘겹게 웃음을 참아내고 있었다.그리고 계속 진지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넌 그냥 발 한쪽만 다친 거잖아. 그런데 난 내 운명의 상대를 잃을 뻔했다고.”“와... 진짜! 최군형!!!”최군성은 이를 빠득 갈았다. 온몸에 소름도 오소소 돋았다.이때 타이밍 좋게 강소아가 위층에서 내려왔다.최군형은 더는 동생의 투덜거림을 들어줄 새가 없었다. 바로 전화를 끊고 바로 앉아 미소를 지으며 강소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강소아는 그를 보니 괜스레 그가 자신을
강소준은 통화를 하던 강소아의 목소리와 어투를 떠올렸다. 절대 친구나 동창에게 하는 어투가 아니었고 혹여나 보이스 피싱이라도 당하는 것일까 걱정되어 강소아가 무심한 틈을 타 몰래 방으로 들어가 강소아가 통화하면서 끄적였던 메모지를 빼돌렸다.“형, 우리 누나는 누군가와 약속을 잡고 나간 거예요!”그에게 말해주면서 강소준은 이미 콜택시까지 불렀다.“얼른, 얼른 타세요! 빨리 누나 따라가야 해요!”최군형은 감격스러운 눈길로 그를 보았다.이 순간 그는 강소준이 너무도 고마웠고 평생 이 은혜 잊지 않으리라 생각했다.차에 올라탄 뒤 그는 메모지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그곳은 호텔이었다. 베스트 레벨 호텔 최상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고 이런 곳에서 강소아와 약속을 잡을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사실 지난번 파티에서부터 그는 강소아를 향한 남자의 시선이 미묘하다는 것을 눈치챘다.하긴, 강소아 같은 여자는 어떤 남자가 봐도 매력적이고 눈이 가는 사람이었다.하지만 그녀는 그의 아내이다.비록 가짜 결혼이긴 해도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진짜였다.최군형은 메모지를 힘껏 구겨버렸다.차는 빠르게 베스트 레벨 입구에 도착했다.최군형은 호텔 매니저에게 미리 연락해 두었었기에 그대로 돌진해 들어가도 그를 막는 사람이 없었다.막지 않을 뿐 아니라 호텔 매니저는 굽신거리며 그를 맞이했고 공손한 태도로 구봉남을 쫓아내 주겠다고 말했다.최군형은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따라오지도 마세요.”매니저는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았다.최군형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 레스토랑으로 왔다. 조용히 장식으로 가득한 벽 뒤로 다가가 그곳의 상황을 살폈다.구봉남은 강소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잔에 술을 따라 건넸지만 강소아는 거절했다.“구봉남 씨, 할 말이 있으신 거면 그냥 하세요.”강소아의 목소리가 약하게 들려왔다.“제 남편은 말을 돌려서 하는 걸 싫어하거든요. 저도 그래요. 말 돌리는 걸 딱 싫어하죠.”그 말에
구봉남은 그녀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고 어색한 웃음소리만 냈다. 그는 술을 마시며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가렸다.강소아는 남편인 최군형을 감싸주고 있었고 한참 지나도 그녀의 입에서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구봉남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조금 더운 기분이 들었고 호텔도 이상하게도 실내 온도가 높은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술을 두 모금만 마셨을 뿐인데도 몸이 더우면서 취기가 돌았다.게다가 지금까지 안줏거리라곤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테이블엔 와인 한 병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구봉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유명한 베스트 레벨이 손님 대접을 이렇게 하는 것일까?그는 직원 호출 버튼을 한참이나 눌러보았지만 마치 직원들이 증발이라도 한 듯 누구도 오는 이가 없었다.민망함이 극에 달한 구봉남은 살면서 이런 취급은 처음이었다.벽 뒤에 숨어 있던 최군형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있었다.“허, 이런. 오늘 손님이 많은가 봐요. 직원 그렇게 호출했는데도 한 명조차 안 오다니!”구봉남은 하는 수 없이 어색한 말로 상황을 무마했다.그러나 강소아는 거침없었다.“그런가요? 하지만 지금 레스토랑엔 저랑 구봉남 씨밖에 없는데요.”“그건...”구봉남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아, 그래요.”그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강소아 씨가 제 조카랑 같은 전공이라면서요. 건축디자인학과 맞죠?”강소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허허, 강소아 씨 공부를 아주 잘하시나 보네요. 그 성적이라면 어느 회사에 지원하든 다 받아줄 거예요.”“과찬이에요.”“강소아 씨, 전 정말로 강소아 씨가 제 밑에서 일하기를 바라고 있어요.”구봉남은 미소를 지으며 와인잔을 두어 번 천천히 흔들었다.그녀의 입으로 원하는 정보를 들을 수 없다면 다시 천천히 유도하면 되었다. 구성 그룹으로 와서 일하라는 말을 그녀에게 두 번째로 하는 중이었다... 강소아는 여하간에 학생이었고 구성 그룹 인턴십 기회는 거의 그녀에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설령 지난번에 거절했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