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는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수현은 안색이 변했다. 그때 소영이 두 사람 사이에 껴서 윤아의 공을 뺏어간 바람에...하지만 그건 수현이 제때 알아보지 못해서였다.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으니 수현도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윤아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앞으로 우리 사이에 이성이 끼는 일은 없을 거야. 남자든 여자든 말이야.”“가자. 같이 들어가자.”산기슭에 위치한 별장은 원래 어둡고 음침한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금 이 별장에서 이수철이 선우를 지키고 있었기에 별장 주위에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곳곳에 보초를 사람들이 있어 하나도 음침하지 않고 오히려 북적북적했다.수현이 들어가자 대장이 다가왔다.“대표님.”수현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어쩐 일로 오셨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대장이 수현 옆에 선 윤아를 보더니 뭔가 알아챈 듯 말했다.“대표님, 윤아 님,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대장은 그렇게 말하더니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그림자가 윤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원래는 덤덤하게 서있던 윤아는 나온 사람을 보고 기분이 크게 요동쳤다.“진 비서님.”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다시 만나려면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말이다.우진은 윤아를 보더니 의외라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윤아 님.”선우는 미소를 지으며 먼저 윤아에게 인사하더니 수현을 보며 말했다.“대표님, 오셨어요.”“안녕하세요.”윤아를 전력으로 도왔던 남자에 대해 수현은 꽤 예의를 차렸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먼저 손을 내밀기도 했다.우진은 수현이 이런 행동을 보일 줄은 몰랐기에 한 2초간 멍해 있다가 악수했다.“전에 외국에 있을 때 제 아내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환하게 웃으며 온화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윤아에 우진은 왜 차갑기로 소문난 수현이 갑자기 자기와 악수하는지 알 것 같았다.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전 그냥 대표님이 틀린 길로 계속 가는 게 싫어서였어요.”우진은
하지만 지금 그 길은 꽉 막혔으니 선우도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선우가 잘못한 건 맞지만 말이다.아니, 그냥 잘못한 게 아니라 크게 잘못한 것이다. 하지만 전에 선우의 은혜를 입었던 우진이라 선우가 잘못을 고칠 수 있게 도와주긴 해도 다른 사람을 도와 선우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을 것이다.우진이 자기를 거부한다는 걸 느낀 수현은 손을 거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아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살짝 변했다는 걸 느끼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우진은 그 정적이 오래가게 두지 않았다. 10여 초가 지나자 먼저 이렇게 물었다.“윤아 님, 대표님 만나러 오신 거예요?”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우진의 표정이 어딘가 난감해 보였다.“윤아 님, 만약 대표님 상황을 알아보러 오신 거라면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데 만나는 건 안 될 것 같네요.”오기 전 들은 대답과 같았다. 선우는 윤아를 보고 싶지 않아 했다.이미 알고 왔지만 와서도 거절당하자 윤아는 그래도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어딘가 창백한 얼굴의 윤아가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자 진우는 마음이 조금 아팠다.“윤아 님, 아니면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제가 다시 들어가서 확인해 볼게요.”“그래도 돼요?”“네, 윤아 님 대신해서 한번 설득해 볼게요. 윤아 님 일단 저쪽에 앉아서 기다리세요. 확인하고 바로 올게요.”우진이 안으로 들어가자 아까 그 대장이 나오더니 두 사람을 옆에 있는 다실로 데려갔다. 테이블에는 디저트와 차가 올라왔다.윤아는 평소에도 입맛이 없는데 아까 음식을 먹고 왔기에 아직 위가 꽉 차 있어 더 먹을 자리는 없었다.그래도 보여주기식으로 찻잔을 든 채 몇 모금 마시려 했다.하지만 찻잔을 입가에 갖다 대지도 못했는데 수현이 이를 말렸다.윤아는 멈칫하더니 그쪽을 바라봤다.수현이 윤아가 든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술을 앙다물었다. 윤아는 바로 그가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전에 당했던 게 있어서 그런지 수현은 여기서 나오는 음식을
한참 동안 기다려서야 우진이 안에서 나왔다.우진을 보자마자 윤아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비서님.”윤아의 진정성과 믿음을 우진도 당연히 느낄 수 있었다. 하여 윤아에 대한 태도도 좋았고 목소리도 부드러웠다.“윤아 님.”“어떻게 됐어요?”윤아의 눈빛에 우진은 결론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마음이 아팠지만 더 끌어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어두운 눈빛으로 고개만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우진이 굳이 얘기해주지 않아도 그의 표정에서 이미 모든 걸 알아볼 수 있었다.윤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그런 윤아의 모습에 우진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윤아 님, 대표님은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윤아 님도 일단 만나려 하지 않는 거고요. 다음에… 언젠간 대표님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저는…”이때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던 수현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윤아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니까 일단은 돌아가자.”수현의 손길을 느낀 윤아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우진은 윤아의 어깨에 올려진 손을 보더니 마음속으로 몰래 한숨을 내쉬며 길을 내주었다.“가자. 기회는 또 있을 거야.”“잠깐만.”윤아는 뭔가 생각난 듯 수현을 불러세우더니 다시 우진 앞으로 걸어갔다.“비서님.”“무슨 일로 그러세요?”우진은 윤아가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 줄 알았지만 윤아는 우진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고마워요.”이 단어에 우진은 멈칫했다. 그가 다시 들어가서 확인해 준 것에 감사한 줄 알았지만 윤아가 설명을 덧붙였다.“전에 외국에 있을 때 비서님 도움이 없었으면 저는 이미 죽고 없었을 거예요.”며칠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우진은 그때의 윤아가 걱정되면서도 무서웠다.만약 우진이 그때 아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그렇게 윤아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지 않았다면 윤아는…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선우는 끝도 없
윤아는 그렇게 수현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윤아가 가고 나서도 우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대장이 아까 여기서 일어났던 일을 우진에게 알려줬다.우진이 이를 가만히 듣더니 그래도 아무 표정이 없었다.대장은 우진이 아무 반응이 없자 이렇게 물었다.“비서님, 이 일 그래도…”“그래도 뭐요?”대장이 뒤에 말을 잇기도 전에 우진이 엄격한 말투로 잘라버렸다.대장은 갑자기 매서워진 우진의 말투에 입을 꾹 다문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앞으로 쓸데없는 소리 그만 좀 해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이끌면서 말조심해야 한다는 거 아직도 몰라요?”대장은 우진의 훈수에 불만이 생겼지만 어쩌지는 못했고 화를 꾹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이곳에 아무 일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우진은 몸을 돌려 위층으로 향했다.우진은 곧장 선우가 갇혀있는 방으로 갔다. 문 앞에 도착해보니 선우가 커튼이 단단히 쳐진 창가에 서 있는 게 보였다.사실 지금 커튼은 살짝 틈이 벌어져 있었기에 그 틈으로 바깥을 관찰할 수 있었다.선우는 윤아가 찾아와도 만나주려 하지는 않았지만 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기에 구석에서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이런 광경에 우진의 마음은 다시 복잡해졌다.선우가 문 앞에 서 있는 동안 선우는 줄곧 창밖만 내다보았다. 마치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것처럼 무아지경이었다.어쩌다 골똘히 보는지 우진이 옆으로 다가가도 선우는 발견하지 못했다.“정말 윤아 님을 뵙고 싶다면 아까는 왜 안 보겠다고 하신 거예요?”우진의 목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지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선우가 눈을 번쩍 뜨더니 고개를 돌려 매서운 눈빛으로 우진을 노려봤다.“누가 비서님더러 들어오라고 했죠?”선우의 질책에 우진이 이렇게 설명했다.“회장님께서 제게 대표님 곁을 24시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손님들이 갔으니 다시 돌아와야죠.”이 말에 우진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24시간 옆에 붙어 있는다고요? 진 비서님이 이렇게 충성심이 깊은 줄 몰랐네요?”진 비서님이라고 부를 때 일부러
“…”선우는 아무 말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우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매정하게 말했다.“당장 나가세요.”하지만 우진은 덤덤한 표정으로 안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대표님, 잊으셨나 보네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회장님이 제게 대표님 곁을 24시간 지키라고 분부하셨다고요.”두려울 게 없다는 듯한 우진의 모습에 선우는 그를 차갑게 쏘아보더니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선우가 사라지고 나서야 우진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선우네 집에서 나온 윤아는 차에 오르고 나서 쭉 창밖만 내다봤다. 수현은 윤아의 옆모습만 볼 수 있었고 그녀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차 안은 매우 조용했다. 가끔 옆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다시 고요해졌다.그런 윤아를 보고 수현이 말했다.“내일 다시 오자.”창밖을 보며 멍을 때리던 윤아가 이 말을 듣고는 멈칫하더니 이내 반응하고는 이렇게 말했다.“내일?”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보고 싶지 않을 이유는 없어. 너를 만나주려 하지 않는다면 아마 너를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럴 거야.”“…”윤아는 조용히 수현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아마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거야. 오늘 만나주지 않으면 내일 만나고 내일도 만나주지 않으면…”윤아가 대뜸 수현의 손을 잡았다.“됐어.”윤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수현의 손을 잡고 있는 힘도 매우 약했다. 수현은 그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나를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데 일단은 오지 말자.”“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넌 계속 마음이 불편할 거잖아.”윤아는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내가 불편할 게 뭐가 있어. 선우랑 만나는 것도 아닌데. 비록 지금 회장님이 가둬두시긴 했지만 무사하니 나도 좋아.”적어도 소송에 걸리거나 구치소에 들어갈 필요 없이 사적으로 화해하기로 했으니 앞으로의 인생에도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전에 선우를 보러 올 때 혹시나 그런 곳에 갈까 봐 걱정했는데 참 다행이었다.윤아에게 있어서 이런 결과를 본 것으로 만족했다.선
설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하지만 이 일에 관해서 윤아는 바로 묻지 않았다. 윤아가 묻는다 해도 수현이 알려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일단은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다짐했다.두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호텔을 잡았다. 수현은 윤아가 심심할까 봐 근처에 있는 쇼핑몰로 데리고 가서 윤아가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주려고 했다.하지만 윤아는 바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상처가 나은지 얼마나 된다고 그래? 벌써 잊은 거야?”윤아의 말은 어딘가 좀 사나웠다.“안정을 취하라고 했잖아. 안정이 뭔지 몰라?”윤아는 화가 난 나머지 두 볼이 볼록하게 튀어 올랐다. 원래는 얌전하게 들으려고 했는데 화난 윤아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장난기가 발동한 수현이 윤아의 볼을 꼬집었다.“…”윤아는 이렇게 쏘아붙이다가 수현이 볼을 꼬집자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이게 뭐 하자는 거지?“뭐 하는 거야?”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수현의 팔을 밀어내며 이렇게 말했다.“이거 놔. 지금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잖아. 이렇게 나올 거야?”수현이 손으로 윤아의 볼을 두어 번 꼬집더니 눈썹을 추켜세웠다.“지금 엄청 진지하게 듣고 있는데?”“…”윤아는 말문이 막혔다.이게 어디 사람 말을 열심히 듣는 모습인가?열심히 듣는다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의 볼을 꼬집을까?“네가 너무 엄숙해 보이길래 기분 좀 풀어주려고.”말이 끝나기 바쁘게 수현은 다시 한번 꼬집더니 그제야 손을 내렸다.“됐어. 내가 안정을 취하길 바란다니 나가지 말아야지. 호텔에서 푹 쉬자.”“그래, 이렇게 나와야지…”윤아는 자기 볼을 어루만지더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호텔에 있자니 너무 심심했던 윤아가 베란다로 나가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베란다가 꽤 컸고 아래는 노천 수영장도 있었다. 큰 수영장은 지금 햇살이 비쳐 들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지금 겨울이라 아예 수영하는 사람이 없었다. 커다란 수영장은 풍경을 감상하는 곳이 되었다.윤아는 그렇게 난간에 기대 아래로 보이는 수영장을 내려다
“넘겨줄 수는 있는데 먼저 한가지 설명해야 할 게 있어.”“무슨 일인데?”현아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수현이 윤아를 힐끔 보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수화기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흐르더니 현아가 이렇게 쏘아붙였다.“무슨 말이야?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설마 기억 상실이 왔다고 말할 건 아니지?”“응.”현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돌아간 후로 윤아와 연락을 하지 않았기에 윤아가 안전하다는 것만 확인하고 그 뒤로는 무슨 상황인지 잘 몰랐다. 일이 너무 바빠 분주하게 돌아치다가 짬이 생기자 바로 윤아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전화를 하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전화를 하니 아예 통하지 않았다.현아는 전에 외국에 있을 때 수현의 연락처를 남겼던 게 생각났다. 수현이 무섭긴 했지만 윤아를 걱정하는 마음에 용기 내어 전화를 걸었다.그러다 결국 윤아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을 얻게 된 것이다.현아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왜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된 거지?현아는 원래 수현에게 캐물으려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됐어. 일단 핸드폰 윤아한테 넘겨줘. 내가 말 좀 해보게.”수현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기에 두 사람이 대화할 때 윤아도 수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엔 업무 전화인 줄 알고 자세히 듣지 않았는데 뒤로 갈수록 자기와 관련된 내용이 나왔다.그러다 수현이 핸드폰을 넘기며 윤아에게 말했다.“네 친구.”수현이 멈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대화해보면 생각이 좀 날 거야? 받아볼래?”윤아는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받아 갔다.“여보세요?”“윤아야!!”윤아의 목소리를 들은 현아가 흥분하며 말했다.“드디어 네 목소리를 다시 듣네? 지금 어때? 괜찮아?”윤아는 예전에 있었던 일과 사람이 기억나지 않아지만 현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뭔지 모를 익숙함과 친근함이 느껴졌다.거기다 현아의 걱정이 담긴 급박한 말투를 들으니 윤아는 코
현아가 말해준 일에 관해 윤아는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현아의 말투에서 기대가 물씬 느껴졌다.윤아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윤아가 아무 말이 없자 현아도 눈치채고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니야, 됐어. 생각 안 나면 억지로 생각할 필요 없어. 나도 곧 퇴사할 예정이니까 퇴사하면 자주 찾아갈게. 예전에 있었던 일들 들으면 생각날 수도 있잖아.”윤아는 현아의 말에서 다른 정보를 캐치했다.“퇴사?”“응. 지금 다니는 회사가 너무 힘들어서 사직서 냈거든. 결제 끝나면 돌아갈 거야. 그러면 같이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자. 아참, 하윤이랑 서훈이 본지도 꽤 됐는데 애들은 지금 뭐 해?”애들 얘기가 나오자 윤아의 눈빛이 더 온화해졌다.“지금 할머니랑 같이 있는데, 잘 지내고 있어.”“할머니랑?”현아는 할머니라는 사람이 수현의 어머니냐고 자기도 모르게 물을 뻔했다. 하윤이와 서훈이를 수현의 어머니에게 맡길 만큼 이제 괜찮아진 걸까?전에는 아이를 뺏어갈까 봐 걱정하던 윤아였다.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지금 윤아는 기억을 잃은 상태라는 게 생각나 다시 꿀꺽 삼켰다.이런 일은 일단 얘기해주지 않기로 했다. 예전의 기억이 없으니 이런 일을 얘기하면 머리만 더 복잡해질 것이다.그리고 전에 발생한 일을 전부 윤아에게 알려준다 해도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현아가 친구로서 일의 자초지종을 다 알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 일을 겪은 건 윤아이니 윤아의 마음속 깊은 생각까지는 파고들지 못할 것이다.만약 이 시점에서 현아가 말을 잘못한다면 윤아의 마음은 더 어수선해질 수밖에 없다.이렇게 생각한 현아는 하려던 말을 제쳐두고 이렇게 말했다.“그래, 알았어. 나 기다리고 있어. 가면 연락할게.”“그래.”윤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언제쯤 올 거야?”“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대표님만 동의하면 아마 빠를걸? 근데 인수인계도 해야 하고 해서 아직은 잘 모르겠어.”“업무 인수인계라면 빨리 끝나진 않겠네.”“내가 최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