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멈칫하던 태준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혹시 아름한테서 들었어요?”‘아니’라는 대답이 아닌 반문.그 반문을 들은 순간 시윤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나...”그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윤은 커다란 품에 꼭 안겼다.도준이 어느새 경성에서 돌아온 거였다.그 상황을 본 태준은 의심을 피하려고 뒤로 물러났다.“민 사장님이 돌아왔으니, 전 가볼게요.”“잠깐.”도준은 갑자기 태준을 불러 세우더니 위험 가득한 목소리로 경고를 날렸다.“공아름을 처리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처리할 거야.”도준의 살기 어린 눈빛을 본 태준은 잠깐 침묵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처리할게요.”이윽고 태준은 고개를 숙인 채 도준의 품에 안겨 있는 시윤을 바라봤다.“윤이 씨가 많이 놀란 것 같으니 잘 위로해 줘요.”“내 아내는 내가 알아서 위로할 테니, 공 가주님이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그래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태준이 떠난 뒤 도준은 시윤을 복도 벤치에 앉히고는 허리를 숙여 바라봤다.“놀랐지?”“왜 이제야 왔어요?”시윤은 고개를 숙인 채 머리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도준은 그런 시윤을 탓하는 대신 그녀의 머리를 제 품에 눌렀다.“늦어서 미안해.”도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지만 시윤의 눈앞은 이미 희미해졌다.손을 들어 도준의 허리를 꼭 껴안은 시윤은 제 머리를 그의 몸에 기대 눈물을 훔쳤다.복도를 오가던 사람들은 두 사람을 힐끗힐끗 바라봤지만, 도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어 시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제 안 갈게. 앞으로 계속 옆에 있을 테니까, 이런 일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시윤은 그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물은 어느새 도준의 옷에 퍼지며 어둡게 변해갔다.당장이라도 아름의 말이 사실인지, 그 폭발 사고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는지, 그때 저를 구해준 것도 계획이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시윤은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제가 원하는 답이 아닐까 봐, 지금의 행복이 모두 허상일까 봐 무서웠다
그 뒤 며칠 동안 두 사람의 일상은 예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매일 아침 식사를 마치면 도준은 시윤과 함께 아래층에서 산책하고, 가끔 시윤이 기운 날 때면 아이 옷을 쇼핑하곤 했다.그러다 가끔 골든 빌라로 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그 사이, 도준은 별장 하나를 거 구매하려고 했지만 시윤이 거절했다. 그도 그럴 게, 집이 너무 크면 오히려 쓸쓸하기도 하고, 골든 빌라도 있기에 필요가 없었으니까.때문에 8달째 될 때 두 사람은 골든 빌라에 아기방을 만들었다.벽은 핑크색과 파랑색으로 하고, 모두 천연 재료로 장식한 뒤, 보름 동안 냄새 제거를 하고 나니 아이는 어느새 9달이 됐다.언제든지 출산할 수 있을 때라 시윤은 몸이 나날로 무거워져, 앉을 때거나 몸을 뒤척일 때도 도준의 도움이 필요했다.결국 안전을 위해 외출 횟수를 줄인 시윤은 평소에 아기방에서 시간을 보내며 미리 준비해 둔 아이 장난감과 옷을 만지는 일상을 반복했다.그때면 도준도 매번 시윤의 곁에 있었지만, 나날이 지나면서 제가 곁에 있을 때랑 없을 때 시윤의 표정이 확연히 다르다는 걸 눈치채고는 시윤 혼자 편히 아기방에 있도록 내버려두었다.그리고 오늘, 두 사람은 식탁 앞에 앉아 조용히 식사했다.도준은 시윤이 앉는 게 불편할까 봐 미리 의자를 주문 제작했었다.조용한 공간에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요즘 따라 답답함을 느낀 시윤은 몇 젓가락 입에 대더니 이내 수저를 내려놓았다.도준은 그런 시윤을 힐끗 바라봤다.“더 안 먹어?”시윤은 입을 닦고는 숨을 돌리고 나서 대답했다.“배불러요.”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부축하려는 도준을 밀어냈다.“앉아서 먹어요. 나도 앉아서 물 좀 마시고 있을게요. 안 그러면 혼자 다시 먹기 시작할 때 입맛 없을 거잖아요.”분명 관심하는 말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서 있는 것 같았다.늘 민감한 도준은 당연히 그 분위기를 읽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준도 출산을 앞둔 시윤이 아
이름 때문인지 그날 밤 자기 전 시윤은 제 손가락으로 도준의 손가락을 살짝 걸었다.그러자 도준은 시윤의 손에 입을 맞추며 꼭 잡았다.“오늘은 웬일로 날 상대해 주네?”물론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요즘 시윤이 저를 피하는 걸 콕 집어냈다.그날 화학공장에 간 뒤로 시윤은 따져 묻지도, 그렇다고 냉전을 하지도 않았지만 도준과 벽이 생겨난 것처럼 거리를 두었다. 그걸 도준은 당연히 눈치채고 있었다.그 말에 시윤이 눈을 내리깔았다.“도준 씨.”“응.”‘혹시 나 속인 적 있어요?’시윤의 입안에서 맴돌던 질문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나 사랑해요?”“응.”분명 확신에 담긴 대답이었지만 시윤은 기뻐할 수 없었다.“그럼 도준 씨한테는 사랑이 뭐예요?”이런 질문에 도준은 지금껏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다.허무맹랑한 질문에 허무맹랑한 대답을 내놓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만 감정 기복이 심한 시윤에게 대답을 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아 결국 잠깐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난 자기 아니면 안 돼.”시윤은 눈을 뜬 채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만약 전 도준 씨 아니어도 된다고 하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시윤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게 도준이 갑자기 손을 꽉 잡았기 때문이다.그때 도준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내가 자기 아니면 안 되면 자기도 그래야 할 거야.”시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긴, 도준 씨는 처음부터 이런 성격이었지.’‘원하는 걸 못 가진 적이 없지.’‘민씨 가문도, 백제 그룹도, 공씨 가문도, 심지어 나까지.’육식하는 늑대에게 풀을 먹으라 하는 건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다.출산일이 가까워진 것 때문인지 시윤은 가슴이 점점 답답해 입을 꾹 다물고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출산일이 마침 설날이라 전날 양현숙과 시영은 모두 빌라에 모여, 한순간 시끌벅적해졌다.좋은 식재료를 갖고 온 양현숙은 오자마자 주방으로 향했고, 시영더러 시윤의 말동무를
양현숙은 시윤의 반응에 대충 눈치채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다 늙은 내가 뭘 알겠어? 그런데 가끔 아무것도 모르는 게 행복할 때도 있어. 나랑 네 아빠를 봐, 지금 따지고 싶어도 따질 데도 없어. 사람 인생은 고작 몇 십 년밖에 없어. 기쁘게 살날도 많지 않은데, 왜 서로 곤란하게 해?”시윤은 그 말이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아 양현숙을 잡은 채 따져 물었다.“엄마, 도준 씨가 혹시 엄마한테 무슨 말 했어요? 아니면 도준 씨가 저 속이는 거 진작 알고 있었어요? 말해요, 얼른 말해요!”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시윤이 계속 다급하게 따져 묻자 양현숙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나도 추측한 것뿐이야. 네 오빠가 고집은 세도, 나쁜 사람은 아니잖니. 아무 연유도 없이 그렇게 고집부릴 성격도 아니고.”그 말을 들은 순간 시윤은 양현숙의 손을 놓은 채 멍을 때렸다.“하긴, 아빠 일만 제외하면, 오빠가 그동안 날 얼마나 아껴줬는데. 뜬금없이 도준 씨를 모함할 리가 없지. 그런데 전 그때 도준 씨만 생각하느라 오빠 말 무시했어요.”양현숙은 안색이 안 좋은 시윤을 보자 다급히 위로했다.“다 지난 일이야, 지금과 미래가 제일 중요하잖아. 본인 생각 안 해도, 아이 생각은 해야지. 속상해하지 마.”불룩 튀어나온 제 배를 보던 시윤은 순간 어두워졌다. ‘아이, 또 아이네...’한때 시윤에게 행복을 안겨줬던 아이는 지금 이 순간 무형의 속박이 되어버렸다.“슬퍼하지 말라니...”시윤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어떻게 안 슬퍼해요? 만약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면, 이 결혼을 이어나갈 이유가 없잖아요.”“자기야,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이제 막 서재에서 나온 도준은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그러자 양현숙이 먼저 당황한 듯 끼어들었다.“아, 윤이가 임신한 것 때문에 생각이 많아졌나 봐, 내가 잘 타이를게.”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든 걸 손에 쥐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남자를 바라보다 보니 시윤은 문득 황당하게 느껴졌다.‘내 인
자연분만과 제왕절개 중에서 양현숙이 계획대로 순산을 선택하려 할 때, 시윤이 갑자기 막아섰다.“제왕절개로 해주세요.”“의사 선생님이 아이 크기가 적당하다고 했잖아. 너도 자연분만으로 결정했고. 그런데 왜 갑자기 바꿔? 자연분만이 아이한테도 좋고 회복도 빨라.”양현숙이 놀란 듯 설득했지만, 시윤은 여전히 제 고집을 부렸다.도준을 힐끗 본 양현숙은 시윤이 도준과 싸운 것 때문에 고집을 부린다는 걸 눈치채고는 낮은 소리로 설득했다.“윤아, 부부는 원래 다 그래. 부부 싸움은 물 베기라잖아. 게다가 너 외모에 신겨도 많이 쓰잖아. 제왕절개로 애 낳으면 흉터 남아. 너...”“그래도 제왕절개로 할래요. 제 배인데 제 마음대로 결정하지도 못해요?”고집을 부리는 시윤을 꺾지 못한 양현숙은 옆에 있는 도준을 힐끗 살폈다. 하지만 도준은 시윤을 한창 보더니 시윤의 의견을 따르라는 짤막한 답만 내놓았다....수술 준비를 마치고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도준은 시윤의 손을 꼭 잡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우선 애 낳고 나서 얘기해.”시윤은 도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눈을 감고는 묵묵히 수술실로 실려갔다.이곳의 의료진은 모두 도준이 모셔온 사람들이라 단연 업계 최고라고 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출산 직전 수많은 검사를 통해 위험을 가장 낮추는 방안도 짜놓은 상태다.하지만 그럼에도 시윤이 수술실로 들어가자 도준은 시윤을 임신시킨 제 선택을 후회했다.사랑하는 사람을 위험이 따르는 수술대에 올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도준은 짜증이 밀려왔다. 심지어 제 공제를 벗어난 일에 불안했는지 수술실을 뚫어지게 바라봤다.시간이 1분 1초 흘러 어느덧 40분이란 시간이 지났다. 양현숙도 걱정이 앞서 안절부절못하며 자꾸만 시계를 확인하며 복도를 서성거렸다.“왜 아직도 안 나오지?”그때 간호사가 다가와 위로했다.“수술 시간은 약 1시간이니 이제 곧 나올 겁니다.”양현숙은 나이가 있는 데다 고정관념까지 있어 시윤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 듯 자꾸만 한숨을 쉬었다.“갑자
시윤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병실로 옮겨진 뒤였다. 눈을 뜨자마자 병실 안에 있는 사람을 본 시윤은 흠칫 놀랐다.그때 시영이 먼저 웃으며 다가왔다.“윤이 씨, 정신 들어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다들 와줬네요?”시윤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아이는요?”“여기 있어.”양현숙은 자고 있는 아이를 안고 다가왔다. 조심성이 담긴 동작에 벌써 외할머니의 자애로움이 묻어 있었다.“예쁘지?”하지만 쭈글쭈글한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시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제가 낳은 자식이라 그런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손을 만진 순간 왠지 모를 기쁨이 솟아났다.이건 시윤이 10달 동안 품고 있던 아이다.시윤은 제 품에 아이를 안으려 했지만 양현숙은 상처를 건드릴까 봐 제 품에 안고 옆에서 보여줬다.시윤이 깨어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준비한 선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시영은 미리 준비한 금으로 된 돌 반지를 아기 침대 위에 올려 놓았고, 지훈도 두둑한 현금다발을 그 옆에 내려놓았다.그때 수인이 땡그랑거리면서 커다란 봉투를 내놓았다.“사양 말고 받아요.”커다란 봉투 안에 담긴 그릇을 본 양현숙은 낮은 소리로 물었다.“이 친구는 혹시 뭐 폐품 수거하는 친구야?”그 말에 시윤은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웃을 뻔했으나 이내 배를 끌어안으며 대답했다.“비슷해요.”하지만 그때, 옆에 있던 지훈이 양현숙이 꺼낸 물건을 보더니 눈을 둥그렇게 떴다.“이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골동품이잖아?”“이게 골동품이에요?”그 말에 양현숙은 놀란 듯 되물었다.“네, 그 안에 있는 거 가치로 환산하면 11자릿수는 될걸요.”양현숙은 후줄근하게 입은 수인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 표정을 본 수인은 싱긋 웃으며 손을 저었다.“사양 말고 받으세요. 저 윤이 씨랑 오래된 친구예요.”수인의 경박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영은 얼른 그를 옆으로 밀어 버리며 끼어들었다.“됐어, 놀라시잖아.”시끌벅적한 와중에 시윤은 주위를 빙 둘러봤다. 하지만 시
말할 때 목소리를 조절하지 않은 탓에 ‘너무 시끄러워’라는 단어가 들린 순간 모든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그때 정은숙이 목휴식하는데 방해하면 안 되지. 우린 이만 가고 내일 다시 올게.”소리를 낮추며 말했다.“하긴, 우리 손주며느리 시영도 얼른 정은숙을 부축하며 분위기를 풀었다.“그래요. 도준 오빠가 호텔 미리 예약하고 음식도 주문했거든요. 이따가 저랑 지훈이 호텔로 모실게요. 증손자 보셨는데, 그냥 가실 순 없잖아요.”시영의 임기응변 덕에 모든 사람들은 기쁨을 안고 병실을 나섰다. 그제야 맨 뒤에 있던 시영이 다른 사람들 몰래 호텔과 음식을 예약하고 웃으며 그 뒤를 따라나섰다....방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지자 양현숙은 아이를 안쪽 병실로 안고 들어갔다. 사실 병실에서 대신 아이를 돌볼까도 생각했지만 시윤과 도준의 표정을 살피더니 결국 문을 닫고 조용히 병실을 나서며 속으로 두 사람이 아이 때문이라도 지난 일을 털어 버리길 바랐다.아이나 다를까, 둘만의 공간을 남겨줬는데도 둘의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아이가 배고팠는지 깨어나 울기 시작했다. 시윤은 모유가 없었지만 곧바로 전에 양현숙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기 전에 먼저 젖을 빠는 동작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그래야 모유가 생겨나도록 촉진할 수 있고, 아이도 젖을 빠는 걸 배울 수 있다던 말.하지만 병실에 저와 도준뿐이라 갑자기 어색해진 시윤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불러줘요.”도준은 쉴 새 없이 울어대는 아이를 품어 안으며 대답했다.“어머님은 연세도 많은데 하루 종일 고생하셔서 휴식해야해.”그러더니 시윤에게 다가오며 그녀의 옷자락으로 시선을 돌렸다.“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단추 풀어.”그 시각, 해질녘의 노을이 도준의 어깨에 드리워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있는 도준은 평소 날카롭던 모습이 아이 때문에 사라져 신기할 따름이었다.그런 도준을 한창 보다가 숨넘어갈 듯 우는 아이를 보더니 시윤은 끝내 단추
시윤은 임신했을 때 아이가 태어나면 해방될 거라고 여겼는데, 아이가 태어나자 부모로서의 숙제가 이제야 시작됐다는 걸 깨달았다.그도 그럴 게, 의사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울기 시작해 헐레벌떡 기저귀를 갈아줘야 했으니까.처음에는 도준과 대화를 나눠볼까 생각했던 시윤도 자꾸만 터지는 돌발 상황에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참다 보니 마치 한데 붙은 것처럼 좀처럼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저녁이 되자 도준은 시윤과 함께 병실에서 잠을 청했다.하지만 두세 시간마다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것도 도준이 대신했다.저는 편히 자게 두고 조용히 아이를 안고 우유를 먹이는 도준을 보자 시윤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왜 우는 건지 시윤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분명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행복한데, 이 행복 뒤에 얼마나 많은 함정과 족쇄가 있는지 아는 사람은 시윤뿐이다.심지어 행복을 누려야 할지 아니면 아파해야 할지도 몰라 그 족쇄가 저를 점점 묶도록 내버려두었다....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시윤도 점점 회복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혼자 걷기까지 했다. 게다가 누워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 적당히 마사지하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도준은 가끔 아이를 어른들께 맡기고는 문을 닫고 시윤을 마사지해 주곤 했다.임신 말기에 다리가 좀 부은 시윤은 도준의 마사지 덕에 다리는 한결 편해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갑갑해졌다.그때 마침 물건 가지러 들어온 소혜가 그 모습을 보고는 병실 문과 도준을 번갈아 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어, 오빠 도준 오빠 맞아? 귀신 들린 건 아니지?”“아니야. 그런데 네가 귀신이 되고 싶다면 도와줄 수는 있어.”‘맞네!’소혜는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젖병을 찾아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그 시각, 진태섭은 밖에서 민도윤을 품에 안은 채 활짝 웃으며 어린애 목소리를 흉내 냈다.“우리 손주, 할아비 좀 봐봐.”그걸 본 소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젖병을 내려놓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다 문을 나선 순간 잘생긴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