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발해서 다음번엔 꼭 민도준 씨 만족시킬게요.]분명 순종적인 말투였지만 민도준은 액정을 통해 권하윤의 시큰둥한 표정과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비위를 맞추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액정을 타고 위로 올라가자 전에 나눈 대화가 눈에 들어왔다.[민 사장님, 어제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아침 안 드시면 몸에 안 좋아요. 특히 신장에.][죽고 싶어?][농담이에요.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줄 서서 아침을 구매한 저를 봐서라도 조금만 드셔주세요.]…….민도준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꽤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너무 순종적이어도 안 되고 방항적이어도 안되며 한상 적당한 선을 지키며 균형을 맞춰야 한다.때문에 권하윤은 손에 쥔 열쇠를 보는 순간 오늘 그 선을 잘 지켰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자꾸만 감기는 눈을 겨우 부릅뜬 채 샤워를 하더니 침대에 등이 닿기 바쁘게 기절하듯 잠들었다.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벌써 오후였다.한숨 푹 자고 나니 오히려 몸 이곳저곳이 아파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하지만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켠 순간 문태훈이 보내온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권하윤 씨, 어제 너무 급하게 가는 바람에 얘기 채 나누지 못했는데 오늘 시간 돼요?]다시 공손하게 변한 그의 말투에 어제 그녀를 협박하던 일이 꿈이었나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오후 4시.권하윤은 경성에 있는 유명한 가정 요리 전문점에 도착했다.“오래 기다렸죠?”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가방을 옆자리에 놓고는 맞은편에 앉은 문태훈에게 싱긋 미소지었다.하지만 그녀와 달리 문태훈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눈에 빨간 핏발이 서 있는 걸 보니 간밤에 잠을 설친 게 틀림없었다.믿는 구석이 있는 듯 두려워하지 않는 권하윤의 모습을 본 순간 문태훈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어젯밤 그는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가 반나절 동안 링거를 맞았는데 상대방은 오히려 아무 일 없었던 것 같은 모습이니 화가 날 만도 했다.그의 시선을 의식한 권하윤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긴
“공은채 씨 때문이거든요.”문태훈은 악의 가득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그런데 그쪽 아버지가 공은채 씨를 죽인 범인이잖아요.”“그 입 다물어!”권하윤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그 말들 다 증거도 없는 헛소리예요! 게다가 공은채 씨는…….”솔직히 권하윤도 공은채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공씨 가문에서 왜 그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지 모른다.그저 공은채가 죽은 뒤 자기 집이 발칵 뒤집혔다는 것만 알뿐.하지만 문태훈과 이 일로 실랑이를 벌인다고 얻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권하윤은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민 사장님이 공은채 씨 때문에…… 그 사람과 알게 됐다는 게 무슨 뜻이죠?”“그렇게 많은 걸 알 필요는 없어요. 그저 민 사장님이 만약 당신이 이성호 딸이라는 걸 안다면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것만 알아둬요.”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권하윤은 문태훈의 말을 믿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로 도박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입을 열었다.“말해요, 저한테 뭘 원하는지?”“뭘 원하냐고요?”문태훈은 말끝을 길게 늘어트리며 시치미를 뗐다.하지만 그걸 이미 간파한 권하윤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 일을 민 사장님한테 알리지 않은 건 이걸로 저한테서 뭔가 뜯어내려는 속셈 아니었어요?”자기가 먹지도 못하고 공손하게 다른 사람에게 권하윤을 바쳐야 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뭔가 뜻어내는 게 문태훈한테는 나았다. 때문에 그는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권하윤 씨 역시 시원시원하다니까. 그러면 저도 사양하지 않고 솔직히 말할게요. 권하윤 씨가 민 사장님의 사람이라니 저도 그쪽한테 감히 손댈 수 없게 됐으니…….”“얼마요?”권하윤은 서사를 늘여놓는 문태훈의 말을 바로 잘라버렸다. 문태훈도 자기와 엮이지 않으려는 권하윤의 태도를 알아차리고 바로 원하는 숫자를 불렀다.“200억.”권하윤은 그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혹시 저를 은행으로 보는 건 아니죠?”“권하윤 씨 지
상대방의 동의도 거치지 않고 민도준을 내서워 남을 속이다가 결국 당사자 앞에 들키는 상황에까지 이르자 권하윤은 안절부절못했다.‘역시 사람은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맞나 보네.’만약 민도준이 이 자리에서 그녀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모든 걸 폭로하면 전에 그녀가 했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민도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런 그녀의 눈빛에 민도준은 테이블에 위의 남겨진 음식을 보더니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밖에서 이렇게 훔쳐먹었으면서 아직도 배가 안 불러?”들을수록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자기를 폭로하지 않자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윽고 민도준의 팔짱을 더욱 힘껏 끌어안으며 두 눈을 곱게 접었다.“민 사장님이 식사하시겠다면 곁에서 함께 먹어줄게요.”두 사람이 끈적하게 달라 붙어 서로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자 문태훈은 속이 후들거렸다. 이윽고 민도준이 뭔가 오해라도 할까 봐 다급히 해명했다.“저기, 사실 오늘 권하윤 씨한테 사과하려고 불렀어요. 민 사장님이 권하윤 씨와 아직 볼 일이 있는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물러날게요.”말을 마친 문태훈은 민도준의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발 빠르게 도망쳤다.다행히 일이 흐지부지 넘어가자 권하윤은 팽팽하던 긴장감이 확 풀리면서 손의 힘이 저도 모르게 풀렸다.권하윤이 꼭 껴안고 있어 따뜻해진 팔뚝이 그녀가 물러나는 순간 다시 서늘해지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이젠 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다 이건가?’순간 심술이 나는 듯 권하윤의 얼굴을 살짝 꼬집은 채 그녀의 고개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이용 가치가 없어지니 이젠 연기도 할 필요 없다 이거야?”민도준이 꼬집는 바람에 얼굴이 늘어나며 고통이 전해지자 권하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가 힘을 주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무마할까 생각하던 그때 민도준 곁에 서있는 민지훈과 맞닥뜨렸다..지금껏 유지해온 떳떳하지 못한
담배를 꺼낸 민도준은 손끝으로 담뱃갑을 톡톡 두드려 담배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었다.그러자 권하윤은 곧바로 테이블 위에 있는 라이터로 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이미 여러 번 연습을 한 뒤라 그녀는 이미 손쉽게 라이터를 켤 수 있었다. 작은 불꽃이 피어오른 라이터를 담배 아래에 대자 이내 불이 붙더니 연기가 피어올랐다.“둘재 형이 좋아하는 건 이미 다 주문했는데 혹시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민지훈이 물어본 상대는 다름 아닌 권하윤이었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메뉴판을 회전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빙 돌려 권하윤 앞으로 전해줬다.하지만 권하윤은 그걸 보기 전에 민도준을 힐끗 바라봤다. 아직까지도 남아도 된다는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까.그 때문인지 그녀의 동작은 유독 조심스러웠다. 천천히 메뉴판을 자기 쪽으로 당겨오며 곁눈질로 민도준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그러던 그때, 민도준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뭘 꾸물거려.”태도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묵인한다는 뜻이었다.권하윤은 그제야 메뉴판을 홱 집어 앞으로 가져와 메뉴를 골랐다.이미 배가 거의 찼기에 그녀는 과일차 한 잔과 디저트를 주문했다.메뉴판을 내려놓은 뒤 권하윤은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민도준 앞에 놓인 식기를 깨끗이 닦아주었다.그 덕에 간밤에 남긴 빨간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새하얀 손목과 대조되는 빨간 흔적은 눈을 자극했다.식기를 닦고 메뉴가 나오자 권하윤은 또다시 민도준 앞에 음식 놓으며 바삐 움직였다.민도준은 권하윤의 시중을 받으며 비계를 따로 떼어내라 파를 골라내라 지시해댔다.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민지훈은 일부러 상처받은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휴, 나도 참 복이 없네. 음식집어주는 사람도 없고.”“근데 제수씨, 앞으로 계속 제수씨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둘째 형수라고 부를까요?”갑작스러운 질문에 권하윤을 민도준을 힐끗 봤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니면 제 이름으로 불러주세요.”말을 마친 뒤 그녀는 빈 그릇
“내가 언제 가도 된다고 했지?”민도준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눈썹을 치켜들었다. 먹빛을 머금은 눈동자는 너무 깊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남자의 행동이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권하윤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그러던 그때 민지훈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 집 음식이 맛은 괜찮지만 실내 인테리어가 별로네요. 다음번에 경인 지역으로 가요. 그쪽에 있는 레스토랑 음식 맛도 좋고 인테리어도 괜찮거든요.”권하윤은 자기가 어색해 할까 봐 민지훈이 일부러 분위기를 풀려고 끼어들었다는 걸 알고 있엇기에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일이 있은 뒤 민지훈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형 이번에 동림 부지 입찰 내놓을 생각이었어?”동림 부지는 정책적인 지원을 받는 곳이기도 하고 재개발구역이기도 하기에 큰 고깃덩이나 마찬가지였다.때문에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 땅에 눈독 들였고 민씨 가문 사람들도 당연히 그중 하나에 속한다.심지어 그 부지를 차지하려고 민상철이 직접 사람을 보낸 걸 보면 그곳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담판에 성공할 기미가 보였지만 그때 마침 민도준이 끼어들어 그 땅을 먹어버렸고 민씨 가문 전체와 척을 지는듯한 민도준의 행동으로 인해 그와 식구들의 관계는 더욱 미묘해졌다.특히 지난번에 민도준에게 협력을 제안했지만 거절을 당하자 민상철은 당연히 그가 직접 부지를 개발할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입찰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새어나갔으니 민씨 집안사람들은 당연히 가만있을 리 없다.민지훈의 말에 민도준은 귀찮은 듯 입을 열었다.“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할 말 있으면 해.”민지훈은 민도준의 이런 성격이 이미 익숙한 듯 말을 이었다.“경제력과 인맥으로 따지면 경성에서 민씨 가문을 따라올 자가 아무도 없잖아. 입찰자를 모집하겠다면 아무래도 같은 식구한테 기회를 주는 게 낫지 않겠어? 같은 식구면 일하기도 편리하고 지분 나누기도 쉽고. 누가 벌어도 다 버는 거잖아.”여기
“급할 거 뭐 있어?”민도준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그전에 계산할 거 먼저 계산하자고.”권하윤은 그의 말에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지금 민도훈이 따지려 드는 일을 생각해 보면, 그가 빌딩 한 채 손해 보게 한 거, 그의 이름을 빌려 사람을 속인 거, 그리고 민지훈을 보는 순간 그와 거리를 유지하며 도망간 거, 이 몇 가지가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갈피를 잡을 수 없자 권하윤은 결국 먼저 뉘우치는 태도라고 보여야겠다고 결심했다.“잘못했어요.”그녀는 감히 민도준을 쳐다보지도 못했지만 목소리는 되도록 진심이 묻어나 보이게 하려고 애썼다.하지만 귓가에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고개 숙이고 뭐해? 내가 사람 들 앞에 내놓지 못할 내연남이라서 그래?”‘민도준을 내연남으로 대한다고?’권하윤은 순간 머리가 찌근거렸다. 그리고 얄팍한 수단은 더 이상 소용없겠다는 판단이 서자 곧바로 의자를 민도준 쪽으로 끌어당기며 그에게 바싹 붙었다.두 의자가 틈도 없이 꼭 붙자 권하윤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민도준을 돌아봤다.“저 그런 뜻 아니에요.”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손을 올렸다.그 행동에 놀란 권하윤은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그러던 그때 남자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문지르며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들어갔다.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는 마치 검은빛을 내는 비단 같았다.그러던 그때, 부드럽게 권하윤의 머리 뒤까지 흘러간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두피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권하윤은 할 수 없이 고개를 쳐들고 남자를 바라봤다. 깨끗한 얼굴은 순간 남자의 시선 아래에 훤히 드러났다.고통스러운 표정에는 마치 학대를 당하기라도 한 듯 연약함이 묻어있었다. 민도준은 그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입꼬리를 씩 올렸다.눈빛은 여자의 눈썹에서부터 점점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더니 입술, 그리고 목덜미에 닿았다.
바로 뭐라 받아치려던 순간 권하윤은 자기가 지금 권씨 집안 넷째라는 걸 인지했다. 권하윤 신분이라면 그녀가 할 줄 아는 게 확실히 없었다.그녀의 침묵에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생각났어?”남자의 물음에 권하윤은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곳에서 하면 안 될까요? 저한테 별장 열쇠도 주셨잖아요. 그러니 우리 거기 가요.”하지만 민도준은 그녀의 말투를 흉내 내며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안돼.”만약 상대가 민도준이 아니고, 마침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빌딩 한 채를 빚지지 않았다면 권하윤은 아마 당장에 욕설을 퍼부었을 거다.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그녀는 그럴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민도준의 도움이 필요했다.천천히 일어나는 그녀의 동작에 의자가 뒤로 밀렸다.기왕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녀는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았다.그녀가 오늘 입은 옷은 연보라색 원피스였다. 그리고 그 안에 같은 색 계열의 실크 슬립을 받쳐 입었다.겉에 입은 치마를 벗자 슬립에 가려진 그녀의 몸이 드러났다. 그녀의 몸은 어느 한 군데라도 민도준의 손길에 닿지 않은 곳이 없다.권하윤은 일부러 자기 몸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마치 보지 못하면 그렇게 수치스럽지 않기라도 하듯이.의자에 앉은 민도준은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여자를 흥미롭게 바라봤다.“계속해.”남자의 말에 권하윤은 숨이 턱 막혔다.민도준을 힐끗 바라본 순간 그녀의 눈에 미처 읽지 못한 감정이 언뜻 지나갔다.민도준은 인내심이 바닥 나기라도 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려고 할 때 품 속에 말캉한 느낌이 전해졌다.권하윤은 어느새 손발을 그에게 두르며 품에 안기더니 약한 목소리로 그의 의견을 물었다.“여기서 무서워요. 우리 가면 안 돼요?”잠시 뜸을 들인 뒤 민도준은 낮게 코웃음을 쳤다.‘불쌍한 척하는 데 아주 도가 텄네.’지금도 보면 권하윤은 몸을 미세하게 떨면서 머리를 그의 품에 묻은 채 계속 파고들어 그를 간지럽혔다.민도준은 아무 감정이 없는 듯 그녀를 밀어냈다.“놔.
“내가 잘못했어요. 안 따라 갈래요.”“차 세워요. 얼른 차 세워…….”점점 가까워지는 정문을 쳐다보던 권하윤은 조급해진 마음에 말에도 두서가 없었다.민도준과 같이 민씨 저택 안에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아마 천지개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녀의 간청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민도준은 핸들을 돌리며 웃음 띈 음성으로 말했다.“나랑 헤어지기 섭섭한 거 아냐? 설마 나를 속인 거야?”제 발등을 찍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권하윤은 오늘 제대로 체감하는 중이다.순진한 그녀를 탓할 밖에. 두세 마디 말로 민도준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정문과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도 민도준은 차를 세울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사장님이 오늘 작심하고 그녀를 데려왔다는 걸 깨달은 권하윤은 더 이상 매달리길 포기했다.마지막 코너를 도는 순간 결심한 그녀는 안전벨트를 풀고서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공간을 통해 뒤 좌석으로 넘어갔다.입고 있던 스커트가 올라가며 다리와 속옷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운전석으로부터 희롱 섞인 눈빛이 쏟아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하윤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네 발로 기듯이 넘어갔다.뒤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밖에서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사장님, 오셨습니까?”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틈새에 웅크린 하윤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다행히 창에 선팅이 되어있는데다 제때 숨은 까닭에 정문 앞의 경비 요원은 차 뒤 공간에 엎드린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인사하며 문을 연 경비원이 허리를 굽힌 채 민도준이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거대한 민씨 저택은 본채과 별채로 되어 있었다. 또 사방을 에워싼 넓은 숲에는 여러 양식의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저택 안으로 들어선 검은색 부가티는 몇 바퀴를 돌고서야 야외 주차장에 멈춰 섰다.주차장에 있던 경비 요원이 앞으로 나와 차문을 열었다.“사장님, 오셨습니까?”차에서 내린 민도준이 새카만 차창을 힐끔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