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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임가영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어제...”

“그만해.”

육지훈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옷깃의 붉은 입술 자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자국은 분명히 그 사건 이후에 남겨진 것이었다.

육지훈의 어조는 차분하고 냉정했다.

“지난 2년 동안 널 내버려둔 것도 내 책임이야. 그런 일을 한 너를 탓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가영아, 육씨 집안은 순결하지 않은 여자를 사모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임가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 모든 설명이 부질 없어졌다.

하긴 누가 이런 말을 믿겠는가?

게다가 설사 자신이 나희애 임주희 모녀에게 당했다는 것을 밝힌다고 해도 순결을 잃은 건 사실이었다.

임가영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그럼 네 말은 이혼하자는 뜻이야?”

육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할아버지에게는 네가 이혼을 원한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 네가 바람을 피우고 외도를 했다는 걸 할아버지한테 들키지 않는 게 마지막 체면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이때 임가영은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떨어지려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한참 후, 그녀는 심호흡한 뒤 말했다.

“그럼... 내 물음에 답해줄래?”

“말해.”

육지훈의 눈빛은 바다처럼 깊어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임가영은 그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밖에 따로 만나는 사람 있어? 결혼한 지 2년이 지났는데 조금이라도 나를 좋아하긴 했어? 만약 그 여자가 없었다면 날 좋아했을까?”

육지훈은 눈을 살짝 감고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해. 결혼하던 날 내가 말했잖아.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육씨 집안 사모님 자리뿐이라고.”

육지훈은 임가영의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가영은 여자만의 직감으로 육지훈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틀 안에 변호사에게 이혼 합의서를 작성하라고 할 테니 서명하고 할아버지께 가서 설명해 줘.”

육지훈은 마치 오늘 저녁은 뭐 먹을 거냐는 듯이 가벼운 태도로 이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렇게 말한 뒤 그는 단호하게 안방을 나섰다.

임가영의 주위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 더운 여름날인데 왜 얼음 동굴 깊숙한 곳에 있는 것만 같을까?

임가영을 절망하게 만든 것은 육지훈이 이혼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도 담담한 그의 태도였다.

임가영은 육지훈의 침착함이 그의 성격이나 교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임가영은 언젠가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이렇게 끝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듣고 나니 멍해졌다. 막상 그날이 오자 임가영은 자신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육지훈을 전혀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절친 하혜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혜인아, 퇴근했어? 나... 나 있잖아...”

임가영은 마음이 답답하고 목이 막혀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혜인은 임가영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이 너무 바빠서 난감한 듯 말했다.

“가영아, 나 오늘 밤에 인터뷰가 있어서 아직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이렇게 하자. 내가 주소를 보내줄 테니 네가 날 찾으러 와. 인터뷰가 끝나면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

“그래.”

임가영은 전화를 끊은 후 곧바로 밖으로 나가기 위해 준비했다.

하혜인이 알려준 주소에 따라 그녀는 댄스 스튜디오 아래에 차를 주차했다.

오늘 스튜디오 오픈을 맞아 주인이 홍보를 목적으로 해성 방송국 기자와의 인터뷰를 주선한 것이었다.

임가영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혜인은 바로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와 차에 탔다.

“이 스튜디오 대표 너무 별로야. 원래 커팅식도 오전이었고 오프닝도 오전에 끝난다고 해서 오늘 일찍 퇴근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시간을 변경하는 바람에 여기서 인터뷰를 기다리느라 야근하게 됐어. 밤에 개업식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혜인은 임가영을 보자마자 불평하기 시작했다.

임가영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여기가 해성 빌딩이잖아. 땅 한 평이 금싸라기인 데다 부자들은 변덕이 심하지.”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하혜인은 동료로부터 올라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먼저 가 봐. 난 여기서 기다릴게.”

임가영은 도저히 힘이 없어서 하혜인에게 혼자 올라가라고 했다.

하혜인이 떠난 후 그녀의 시선은 멀지 않은 도로에 향했다. 그 순간 임가영의 검은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조금 전, 무심코 남편 육지훈이 검은 벤틀리에서 내리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는 빨간 장미꽃을 들고 있었다. 밝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였다.

핸들을 잡고 있던 임가영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육지훈은 조금 전 점심에 그녀에게 이혼을 언급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그녀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장미꽃이었다.

육지훈은 해성 빌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임가영은 곧바로 차에서 내려 멀리서 따라갔다.

댄스 스튜디오 앞에는 화려한 조명과 축제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하혜인은 지적이고 아름다운 스튜디오 대표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스튜디오 대표는 온화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유창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손에는 육지훈이 조금 전 선물한 장미꽃을 들고 있었다.

임가영은 귀에서 윙윙거림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은 육지훈에게로 향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임가영을 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완전히 스튜디오 대표에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지훈의 입가에 번진 온화한 미소조차 임가영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임가영은 주먹을 꽉 쥔 채 섣불리 다가가 따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

오픈식이 끝나고 정유안은 육지훈과 단둘이 라운지로 향했다.

“지훈아, 정말 아내한테 이혼 얘기했어?”

정유안은 육지훈의 품에 기대어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화를 내진 않으시겠지? 나 때문에 할아버지가 널 혼내면 어떡해?”

육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유안이 너는 내가 가장 아끼는 여자야. 내가 너에게 명분도 주지 못하면 차라리 손도 대지 않겠어. 그동안 묵묵히 나만 따르게 해서 너무 미안해. 어젯밤에 너의 첫 경험을 가졌으니 무책임하게 굴지 않을게.”

순간 정유안의 눈가에 잠시 사악함이 번쩍 스쳐 지나간 후 다시 가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너의 여자가 된 건 내 행운이고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정유안은 가슴을 부여잡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젯밤에 네 비서가 네가 누군가가 탄 약을 먹었다고 말해줘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렇지 않고 다른 여자가 그 방에 들어갔다면... 난 정말 감당할 수 없어. 지훈아, 난 다른 사람과 너를 공유하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이 다정하게 대화하고 있을 때 육지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임가영?

육지훈의 눈가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한 걸까?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

육지훈의 말투는 약간 차가웠다.

반대편에서 임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지훈, 나 이혼 안 할래.”

육지훈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일단 집에 와. 만나서 얘기 좀 하자.”

임가영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육지훈의 아내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은 정유안의 표정도 변했다.

“유안아, 나 먼저 돌아가야 해.”

육지훈은 솔직하게 말했다.

“이혼 문제는 잘 안될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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