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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육지훈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1시가 넘었다.

별장은 섬뜩할 정도로 조용했고 거실에는 야간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다. 임가영은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육지훈은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의 말에는 조급함이 묻어났다.

“이혼, 그건 이미 오늘 점심에 합의한 거 아니야? 재산에 관해서는 섭섭하지 않게 해줄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육지훈은 임가영이 재산을 더 나눠 가지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가영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육지훈, 그 여자 때문에 나랑 이혼하고 싶은 거야?”

육지훈의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더 이상 임가영에게 숨기고 싶지도 않았고 숨길 필요도 없었다.

“그래. 내가 빚진 게 있으니까.”

육지훈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임가영은 자조하듯 웃으며 말했다.

“네가 정말 위선적이라는 걸 오늘 깨달았어. 오늘 점심에는 네가 피해자인 척 나한테 죄책감 느끼게 하고 이혼을 강요하더니 말이야. 그때 너 기뻐하고 있었지? 마침내 내 약점을 붙잡아 억지로 너와 그 여자를 만족시키려고 했잖아.”

육지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더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임가영, 그럼 오늘 너한테 다 털어놓을게. 순서를 따져도 나랑 먼저 만난 건 유안이야. 네가 우리 집에 어떻게 시집왔는지 잘 알잖아. 이제 너도 다른 사람과 만나고 있으니 아쉬울 게 없잖아. 그러니까 서로 놓아주자, 어때?”

“싫어!”

임가영의 어조는 가벼웠지만 말투는 날카로웠다.

“난 속는 게 싫어. 지난 2년 동안 너와 그 여자는 나를 바보 취급하고 속임수를 썼어. 내가 너희를 그냥 놔줄 것 같아?”

육지훈은 눈썹을 만지고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이를 악물고 물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나 이혼 안 할래.”

임가영은 이 말을 내뱉고 침실로 걸어갔다. 돌아서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2년 내내 남편이 자신을 돌아봐 주기를 기다렸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 세상 대부분의 결혼은 시간이 지나서 감정이 조금씩 생기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그녀가 육지훈에게 느꼈던 것 같은 것이다. 하지만 결혼은 궁극적으로 포용과 인내의 문제다.

임가영은 자신의 끈기가 육지훈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여자의 존재는 이미 오래전에 임가영의 모든 노력과 끈기를 무효화시켰다.

...

보름 동안 육지훈은 다시는 별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손님방에서도 머물지 않았다.

그래서 임가영은 그저 학교 연구실에 틀어박혀 수업과 연구에 집중했다. 올해 졸업반이었고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결혼 생활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사랑은 사라졌어도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은 있으니까.

지금 당장 ‘육지훈’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는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실험을 마치고 실험실에서 나오니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임가영 씨 맞죠?”

정유안은 연구실 건물 아래에서 임가영을 기다리는 듯 서 있었다. 임가영은 하혜인이 인터뷰했던 무용수인 그녀를 단번에 알아봤다.

“네, 맞는데 누구시죠?”

임가영은 차가운 어조로 말하며 그녀를 못 알아보는 척했다.

정유안은 언제나 그렇듯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영 씨, 커피숍에 가서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저는 지훈의... 친구 정유안이라고 해요.”

“친구요?”

임가영은 그녀를 비꼬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육지훈은 친구가 너무 많은데 그쪽에 대한 얘기는 못 들었어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하지만 정유안은 여전히 웃으며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가영 씨,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사실 임가영도 정유안에 대해 원망의 마음을 품고 있은지 오래되었다.

정유안이 계속 고집을 부리니 그녀의 속내를 알고 싶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해성 대학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가영 씨...”

정유안이 입을 열자마자 임가영이 끼어들었다.

“유안 씨는 지훈이의 친구니까 제가 누구인지도 알고 계실 거죠? 호칭 좀 정확히 해주세요. 사모님으로요!”

임가영은 마지막 사모님이라는 단어를 특히 강조했다.

정유안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알았어요. 그럼 사모님이라고 부를게요. 오늘 사모님을 찾아온 건 사과하고 싶어서예요. 나 때문에 지훈이가 그쪽을 고생 많이 시켰을 것 같아서요.”

“내가 고생을요?”

임가영은 여유로운 척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한테 무슨 고생을 시켰다고 그래요? 나는 모르겠는데요? 유안 씨,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지훈이는 저한테 정말 잘해줘요.”

그러자 정유안은 미소가 짙어지면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요? 하지만 지훈이는 사모님이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해서 너무 괴로워하고 있어요. 지훈이와 저는 대학 동창이고 만난 지 오래됐어요. 지금 가영 씨 나이 때 우린 이미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어요.”

임가영은 내연녀와 맞설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순간 자신이 정유안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내연녀 앞에서 육지훈과 함께했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더욱 그랬다.

“지훈이가 두 사람 얘기를 다 해줬어요. 할아버지의 심장 수술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거였는데 가영 씨의 어머님이 할아버지를 살리셨다고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항상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하셨고, 가영 씨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지훈이 할아버지에게 가영 씨를 맡기셨을 때 할아버지도 거절하시기 어려웠을 거라고요. 물론 가영 씨도 어른들이 주선한 결혼의 희생자이기 때문에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정유안의 목소리는 가늘고 차분했지만 임가영의 체면을 밟기에는 충분했다.

임가영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숟가락을 들고 눈앞의 커피를 마구 휘저었고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았다.

이 여자는 육지훈에 대해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임가영은 장난 같은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임가영은 차라리 정유안의 말에 맞춰 말했다.

“유안 씨가 나를 불쌍히 여기니까 나와 지훈이에게 폐 끼치지 말고 착한 사람이 되는 건 어때요?”

그 말을 듣고 정유안의 표정은 얼어붙었다. 원래는 임가영이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임가영이 그런 말을 듣고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정유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지만 지훈이는 나를 책임지겠다고 했어요. 법적으로 부부는 아니지만 부부처럼 지내왔으니까요. 가영 씨는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임가영은 테이블 밑에 놓인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정유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그들이 순결하게 지내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었겠는가?

하지만 정유안이 너무 솔직하게 말하자 임가영은 가슴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심호흡하며 물었다.

“그럼 오늘 유안 씨가 나를 찾아온 목적은 내가 두 사람을 만족시키기를 바라서인가요?”

“그렇게 해준다면 지훈이에게 부탁해서 앞으로 가영 씨가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줄게요.”

임가영이 졌다고 생각한 정유안은 이 기회를 틈타 돈으로 유혹적인 제안을 했다.

임가영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정말 미안하네요. 내가 계속 육씨 집안 사모님으로 살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이 이혼 합의금보다 훨씬 많아서요.”

“하지만 사랑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죠.”

정유안은 더 이상 미소를 짓지 않고 단호한 표정을 지은 채 다급함이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가영 씨, 이렇게 버텨도 소용없어요. 지훈이를 먼저 만난 건 나예요. 나와 지훈이야말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요.”

임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우리 둘은 결혼한 사이예요. 사랑은 선착순일지 몰라도 법은 그런 거 따지지 않아요. 우리의 혼인 증명서가 유안 씨는 명예롭지 못한 존재라는 걸 증명하고 절대 정당한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걸 설명하죠.”

바로 이때 임가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번호가 육지훈임을 확인한 임가영은 오늘이 이번 달 15일, 즉 할아버님과 식사를 하기 위해 육씨 집안 저택으로 가기로 한 날임을 기억해 냈다.

임가영은 일부러 정유안 앞에서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반대쪽에서 육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야? 오늘 같이 할아버지 댁으로 가기로 했잖아.”

“여보, 나 지금 학교에 있어. 방금 실험 끝났는데 데리러 오지 않을래?”

임가영의 목소리는 애교가 살짝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육지훈은 임가영이 내뱉은 단어가 믿기지 않아 한참 동안 얼어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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