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목숨을 노렸으니, 목숨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줄 것이다!송혁준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씁쓸하게 웃었다.‘나쁜 사람이 된 건가?’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착함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해치게 될 것이었다.“폐... 폐하!”교도관이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급히 인사했다. 송혁준이 담담하게 물었다.“송지아 말인데요, 약은 먹나요?”“그게... 전 폐하께서 별다른 말씀이 없으셔서, 아직은 의사도 약도 제공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제가 잘 말해볼까요?”“숙부께서 의사를 찾지 않으셨다니, 그럼 그대로 두죠. 쓸데없는 힘은 들이고 싶지 않네요.”“하지만...”교도관이 어리둥절해졌다. 그럼 친누나더러 계속 이렇게 살라는 건가?송혁준이 그를 향해 씩 웃어 보이고는 떠났다.송임월이 병들었을 때, 가연이 찾은 의사 중 그 누구라도 진실을 말한 이가 있었는가?송혁준이 구치소를 나섰다.날씨가 너무나도 좋았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하늘은 파랗게 물들었다. 여름 냄새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길가의 나무들도 더욱 푸르러진 듯했다.송혁준이 문득 나석진을 떠올리고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할 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혁준아, 나 안 되겠어.”......서지현은 VIP병실에 들어온 뒤로 나석진을 극진히 간호했다. 나석진은 여자 친구를 구하려다가 어깨뼈에 총상을 입고 중태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는 척 연기하고 있었다. 서지현이 VIP병실에 들어와 그를 간호하게 되자 그는 소설에서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식물인간이 된 남편이 되고 말았다.며칠이 지났다. 나석진은 뒤척이지도 못한 채 뻣뻣하게 그곳에 누워있기만 했다.‘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하지만 지금, 그는 더 이상 못 할 것 같았다.“혁준아, 나 더는 안 되겠어. 이렇게 매일 누워만 있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그래서, 계속할 거야? 서지현 씨 주의를 끌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해? 맞다, 전에 말한 세습제 폐지, 나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혁
서지현은 조심스레 나석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콧대 쪽이 확실히 부어올라 있었다. 그녀는 다시 나석진의 얼굴을 살짝 눌러보았다.나석진은 아팠지만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동안의 연기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지금 같은 상황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야만 했다.서지현은 한숨을 쉬며 그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에는 슬픔과 확신이 함께 들어있었다. 그녀는 나석진이 다시 깨어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아저씨, 사흘이나 누워있었는데, 이제 일어날 때도 되지 않았어요? 어제 윤 선생님이 수술은 아주 잘 됐다고 했어요. 곧 깨어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마취가 조금 심하게 됐대요. 하, 이런 마취과 의사는 또 처음 봐요! 아저씨, 마취가 심하다 해도 이젠 사흘짼데, 정말 일어날 때가 됐어요... 오늘 오후에 깨어나는 거로 약속해요, 오늘 날씨가 정말 좋아요, 아저씨가 깨어나면 함께 밖에 나가 산책해요!”그 말을 듣는 나석진의 심정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했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그녀를 품에 안고 마음껏...그 생각을 하자 나석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그 모습을 본 서지현은 혹시 잘못 봤나 하고 급히 나석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나석진의 심장박동이 가빠졌다.서지현이 중얼거렸다.“잘못 본 건가?”나석진은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곽보미가 이 광경을 본다면 식물인간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손뼉 칠 것이었다.서지현이 떠났다.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그녀의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석진은 눈을 뜨고 상황을 관찰하고 싶었지만 혹여나 들통나 서지현을 화나게 할까 봐 겁이 났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서지현이 외출하면 곽보미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볼 참이었다.“아저씨.”이때 귓가에 서지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석진은 깜짝 놀랐다. 눈을 떴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서지현이 나석진의 옆에 뭔가를 내려놓았다. 이어 물소리가 들렸다.“며칠 동안 씻지도 못했는데, 몸이라도 닦아줄게요
“아저씨, 나석진 씨, 빨리 깨어나요. 아저씨가 깨어나면 반지를 끼워줄게요. 아저씨가 어딜 가든 따라갈 거예요, 절대 안 헤어질 거예요!”나석진은 뛸 듯이 기뻤다. 연기를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얌전히 있어요, 다 닦으면 시원할 거예요.”서지현이 계속해 나석진의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복근을 지나 점점 더 밑으로 향했다.나석진은 참지 못했다.지난번 손을 다쳤을 때도 서지현이 몸을 닦아주었지만, 그때는 재빨리 이불로 아래를 가렸기에 그녀가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지금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어야 했다.“응?”서지현이 어리둥절해졌다. 천천히 솟아오르는 그곳을 보며 서지현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이... 이게 무슨 일이지?지금껏 그녀가 어떤 말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는데?서지현이 눈을 도르르 굴렸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아저씨! 아저씨! 내 말 들려요?”나석진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아저씨! 말 좀 해봐요!”급해진 서지현이 나석진의 얼굴을 약하게 때리기 시작했다.‘망했다, 정말 들통났어...’그가 눈을 감고 대책을 생각하고 있을 때, 서지현이 핸드폰에 맞았던 그의 코를 건드렸다.원래도 아팠는데 예고도 없이 맞았으니, 그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질렀다.“응?”서지현이 놀랐다.나석진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눈을 뜨고는 몽롱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최대한 허약한 목소리로 물었다.“여... 기가 어디야?”서지현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나석진은 천천히 얼굴을 돌려 힘겨운 척 씩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지... 현아, 너... 너 괜찮아?”“드디어 깨어난 거예요?”크나큰 기쁨이 서지현의 이성을 잠식시켰다. 그녀는 이 모든 게 얼마나 불합리한지는 생각하지 않은 채 나석진이 깨어났다는 사실에만 몰두해 있었다.“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울지...마...”“아저씨가 다시는 못 깨어나는 줄 알았다고요!”
하필이면 이때, 핸드폰 화면이 밝아졌다. 윤찬이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고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서지현과 나석진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고는 동시에 핸드폰을 낚아챘다.그러나 나석진이 상처를 입은 탓에 핸드폰은 서지현의 손에 들어갔다. 안면인식이라는 것을 안 그녀가 핸드폰을 나석진의 눈앞에 갖다 대자 잠금이 풀렸다.서지현은 나석진에게서 멀리 떨어져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나석진이 힘겹게 일어나 그녀를 제지하려 할 때, 그녀는 이미 모든 메시지를 전부 읽은 뒤였다.[형, 이제 깨어날 때도 되지 않았어요? 지현 전하가 얼마나 걱정하는데, 너무 오래 버티는 거 아니에요? 연기를 해도 다른 병원을 찾아요. 총알 빼내는 것쯤은 작은 수술인데, 사흘씩이나 못 깨어났다는 게 알려지면 저희 의술이 안 좋은 게 아니냐, 그런 얘기가 나온단 말이에요! 맞다, 이건 마취과 의사 때문이라고 했으니, 괜히 다르게 얘기하지 마요!]나석진이 굳어졌다. 서지현은 핸드폰을 흔들거리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석진은 급히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아, 어깨 아파...”“어깨가 아파요, 등이 아파요?”“응?”“사흘씩이나 누워있었는데, 등에 굳은살은 안 생겼어요?”나석진이 억지로 웃으며 서지현을 쳐다보았다. 고양이 같던 서지현은 이제 날카로운 발톱을 자랑하는 호랑이가 되어있었다.이내 병실에 고함이 울려 퍼졌다.“나석진!”나석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진짜 망했다.“사흘 동안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당신이 못 깨어날까 봐 얼마나 자책했는데...당신이 못 깨어나면 나도 확 죽어버릴 거라고 했다고요! 그런데 연기였어요? 이게 재미있어요?”“아니, 내 얘기 들어봐, 내가 다 설명해줄게...”나석진은 울고만 싶었다. 그는 얼른 서지현의 손을 잡았다. 이제 서지현은 ‘설명 따위 필요 없다’며 그를 밀어낼 것이다. 그가 어깨를 맞은 척, 아픈 척 하면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다.“지현아, 내가 다 설명해줄게...”“그래요! 설명해봐요!”“...
왜 생각대로 되지 않지?“얘기해요, 뭘 설명할 건데요?”나석진이 숨을 헉 들이마셨다. 서지현은 반지를 꺼내 그에게 던지고는 한 글자 한 글자 끊어가며 말했다.“거짓말쟁이!”“지현아, 그게 아니라... 난... 너무 과했어.”“변명하지 마요!”“네가 날 걱정해 줬으면 해서 그랬어! 이렇게 오래 할 생각은 없었어. 못 믿겠으면 찬이와 얘기한 걸 봐!”서지현이 눈을 크게 떴다. 기록까지 있다고?나석진은 아차 싶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 말은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서지현은 차갑게 웃으며 윤찬의 메시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확인했다. 나석진은 혼이 빠진 듯 침대에 앉아 천천히 한쪽으로 고꾸라졌다.“연기하지 마요, 정말 아프다 해도 안 믿을 거예요.”“지현...”“이제 그만 갈게요. 몸조리 잘해요.”서지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나갔다.나석진은 돌아눕고 싶었지만 어깨가 아파 어쩔 바를 몰랐다. 힘겹게 몸을 돌리려는데, 침대 위에 뭔가 딱딱한 게 걸렸다.서지현이 던진 반지 한 쌍이었다.그는 반지를 꼭 쥔 채 찬찬히 관찰했다. 보면 볼 수록 완벽한 공예로 만들어진 보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보석마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그는 짜증스레 반지를 베개 밑에 밀어 넣고는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사흘 뒤, 나석진은 퇴원했다. 원래 건강한 데다 윤찬의 의술, 윤제 그룹의 약까지 더해지니 엄청난 속도로 회복한 것이다. 상처 쪽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일상생활에는 문제없었다. 다만 최근 들어 풀이 죽어있을 뿐이었다.고용인들이 수군댔다.“도련님, 설마 지현 전하께 거절당한 건 아니겠지?”“그럴 리가! 온 남양의 여자들이 모두 도련님을 탐내고 있잖아.”“하지만 온 남양의 남자들도 지현 전하를 탐내고 있는걸?”“억지 부리지 마!”“억지가 아니야, 도련님 손가락을 잘 봐. 반지 하나는 약지에, 하나는 새끼손가락에 꼈잖아.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는 하도 작아 절반밖에 끼지 못했고. 커플링인 게 분명해. 대체 누가 커플링을 혼자 낀단 말이야?”이때
나석진이 눈을 반짝 빛냈다.“정말?”최연준이 피식 웃었다.“솔직히 딱히 도와주고 싶진 않아요, 돕는 입장은 우리인데, 뭐 부탁이라도 해야 해요?”“아니...”나석진이 말을 꺼내려다 멈칫했다. 지금은 그가 을이었다.“어떻게 도와줄 건데요?”“그건 모르죠.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겠다 했지, 어떻게 할지는 스스로 생각해야죠. 우리가 지현이를 화나게 한 것도 아니잖아요.”그 말을 들은 나석진이 김빠진 풍선처럼 소파에 털썩 앉았다.‘그러게 오버해서는 안 됐는데...’나석진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러다 강서연의 핸드폰을 가지고 놀고 있는 최군형을 보자 뭔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였다.그는 소파에서 튕겨 일어나 최군형을 끌어안았다.“어이구, 우리 조카!”최군형은 깜짝 놀라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강서연이 깜짝 놀라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군형아, 너 이렇게 잘생겼는데, 연예계 쪽은 생각 없어? 삼촌이 잘해줄게, 그런데 일단은 좀만 도와줘...”“형님! 제 아들을 이용하려고요?”“방금 말했잖아요, 방법만 생각한다면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돕겠다고.”강서연과 최연준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들이 한 말이었기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최연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어떤 방법인데요? 군형이에게 연기라도 시키겠다는 거예요?”나석진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오빠...”“물론 주인공은 나야. 하지만 군형이가 중요한 역할을 맡아줘야겠어! 지현이는 내게 화났지만, 군형이는 좋아하잖아! 군형이라면 지현이를 불러낼 수 있을 거야!”“...”강서연과 최연준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괜찮은 방법인 것 같긴 했다.“오빠, 이 방법이 통한다고 확신해요?”“당연하지!”나석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서지현은 정말 화가 난 게 아니라 삐친 것이었다. 진심을 보여준다면 서지현도 언제까지고 그를 모른 척 하지 않을 것이었다.“그럼 그렇게 하죠.”강서연이 작게 웃으며 최군형을 안아 들었다
“자식, 나도 네 삼촌이야!”나석진이 최군형에게 가까이 가자 최군형은 얼른 손으로 나석진을 막았다.“아냐, 아니야!”최연준이 짓궂게 웃고는 아들을 받아들고 얘기했다.“군형아, 윤찬 삼촌은 똑똑해서 안 도와줘도 돼. 그런데 이 삼촌은 조금 멍청해. 아빠가 말했지? 동정심이 있어야 한다고.”“네!”“그럼 이 멍청한 삼촌을 도와주자, 어때?”최군형이 제법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매제!”“왜요?”“아니에요.”나석진이 이를 악물고 남은 몇 글자를 뱉어냈다.“정. 말. 고. 마. 워. 요!”......날씨 좋은 주말이었다. 강서연과 서지현은 유유자적하게 교외의 풀밭에서 산책하고 있었다.서지현은 별로 나오고 싶지 않았지만 최군형의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듣고는 완전히 사르르 녹아 금세 약속을 잡았다.최군형은 곧잘 걸었지만 달릴 때면 조금 뒤뚱거렸다. 그는 넓은 풀밭에서 뛰어다니며 기분 좋은 듯 깔깔 웃었다.서지현의 눈은 계속해서 최군형을 쫓아다녔다. 그가 너무도 사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강서연이 서지현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지현아, 군형이가 그렇게도 좋아?”“당연하죠, 군형이를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네 아이도 분명 저렇게 예쁠 거야!”“언니...”“아, 잘못 말했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벌써 아이 얘기했네.”서지현이 강서연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만 보고도 서로의 뜻을 알아낼 수 있었다.서지현은 강서연이 나석진 때문에 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강서연도 서지현이 이를 알아챈 것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은 씩 웃고는 다시 천천히 걸어갔다.“아직도 화난 거야?”“아니에요.”“진짜?”“저 때문에 총까지 맞았는데요. 그다음이 어떻게 됐든 그건 사실이잖아요.”강서연이 씩 웃었다. 서지현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보아하니 나석진에게도 희망이 있었다.서지현이 입을 삐죽하며 민들레 홀씨를 털었다.“날 그렇게나 오래 걱정시켜서 화난 거예요! 내가 걱정한다는 걸 알면서도 안 일어났잖아요! 정말 너무...”“맞
서지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어릴 적 빈민가에서 학교 따위 꿈도 꾸지 못한 채 살았다. 한글도 옆집 사는 집시 할머니에게 배웠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 할머니도 거의 까막눈이라 가르쳐준 글씨 중 절반은 틀린 것이었다.조금 더 자란 뒤 그녀는 남들이 버린 교과서를 주워 와 보기 시작했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던 탓에 한 번 보고도 금방 배울 수 있었다. 독학으로 한글을 뗐을 뿐만 아니라 영어, 중국어까지 할 수 있었다.그녀는 남양에 와서야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 보았다. 하지만 이 학교는 강서연이 말한 학교와는 달랐다. 짓궂은 남학생들 대신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들뿐이었다.그래서 그녀는 강서연의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언니, 좋아한다면서 왜 괴롭히는 거예요?”“남자의 미성숙한 심리랄까? 좋아하는데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고, 주의를 끌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이...”서지현은 머리를 저으며 풉 하고 웃었다. 강서연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현아, 석진 오빠 겉으로는 상남자지만 속은 아직 어린애야, 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하지만 오빠는 널 정말 사랑해.”서지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엄마, 엄마!”최군형이 흥분한 채 뒤뚱거리며 뛰어왔다. 강서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엄마, 봐! 벌레, 벌레!”서지현도 고개를 빼 들었다. 최군형의 손에는 반딧불이 모양의 장난감이 쥐어져 있었다.“벌레, 빛이 나!”서지현이 웃으며 말했다.“반딧불이는 밤에만 빛이 나요!”“빛이 나!”최군형은 토실토실한 손으로 반딧불이의 엉덩이 부분을 가리켰다.서지현은 그제야 장난감의 엉덩이 부분에 다이아몬드 반지가 붙어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강서연이 물었다.“군형아, 이건 어디서 난 거야?”“저쪽!”최군형이 가까이 있는 풀숲을 가리키고는 서지현의 손을 잡아끌었다.“가요! 벌레 잡으러 가요!”서지현의 심장이 더욱 심하게 뛰었다. 풀숲 속에 누가 숨어있을지